“이런 슬픈 일 더는 생기지 않도록 할게”

2014년 새해 첫 날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동의 한 카페에서 시우 아버지 김용만 씨를 만났다. 월영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시우군은 지난 해 12월 12일 학교 앞 인도에서 교통사고로 8살 짧은 생을 마쳤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시우 군을 인도 뒤편 정비소에서 나오던 트럭이 친 것이다. 유난히 밝고 예의바른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은 슬픔 이상의 것이 되었다.
시우 아버지 김용만 씨는 학교와 경찰서 사이 인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은 눈물마저 멎게 했다. 장례식 조의금을 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정부와 지자체를 상대로 재발 방지를 위한 소송을 하기 위해서였다. 유난히 아이 사랑이 깊었던 그는 ‘아이들’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의 직업은 교사다.

지난 연말 처음 취재를 위해 만났던 그는 수척해 있었고, 금방이라도 쏟아낼 듯 눈물을 온 몸에 담고 있었다. 떠난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인터뷰(경남도민일보 12월 26일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시우 아버지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여 일 지나 만난 그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오늘 둘째 아이 데리고 외출해 보려고 해요. 사고 나고 처음이죠. 아내나 둘째도 마음 치료가 필요하니까요”

그간 진행 중이던 소송에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학교안전공제회와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하고 지자체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느꼈던 상실감과 교사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아들을 잃은 사연만큼이나 안타까웠다.

그간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 교사로서의 삶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집사람과 밤에 차 한 잔씩 하며 거의 매일 이야기합니다. 시우 생각, 힘들었던 일, 슬픈 감정을 함께 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저는 못 느꼈는데 며칠 전 아내가 내가 너무 우울해 보인다며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단식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사연을 들은 밀양의 이계삼 선생님이 제안하셔서 해보기로 했습니다.”

- 소송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습니까?

“내일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는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끝까지 싸울 생각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었죠. 그런데 무보험 차량(시우를 친 트럭) 사고에 대해 정부가, 하굣길 교통사고에 대해 학교안전공제회가 보험금을 지급하고 지자체와 정비회사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하는 소송과 중복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법원 입장에선 이미 구상권 행사를 통해 지자체의 책임을 물었기 때문에 중복이 되는 것이죠. 법적으로 시우 죽음에 대해서 보상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돈 밖에 없고, 그것으로 지자체의 책임을 법이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돈이 중요하냐는 것이 아니라 관련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있는지 고민 중입니다.

   

또한 우리가 소송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보험사로 돈이 다 들어갑니다. 금액이 들어오면 일순위로 보험사에 변제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남으면 학교안전공제회에도 지급해야 합니다. 게다가 소송비용까지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가 다 책임을 져야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송은 취하하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법 개정과 관련 활동에 매진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를 부인과 하고 있습니다.”

- 법과 관련한 문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도로교통안전법인가가 있다던데 이번 이 사건도 도로교통안전법상 시설물로는 하자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최소한 상업시설이 인도를 점령하게 될 시 명확한 안전조치가 있어야 하고, 그게 없다면 허가를 내주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그 부분이 지금도 의문입니다. (사고원인이 된)정비소가 처음엔 작았습니다. 그런데 확장하면서 이런 일이 생긴 겁니다. 스쿨존이고 길이 좁은데다 횡단보도 앞 인도로 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그게 어떻게 허가를 받았는지 지금도 너무 궁금합니다. 방송 인터뷰에 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지자체)관계자의 입장이 나오던데 원래 그 지역 길이 좁았다는 답변만 반복하니 미치겠더군요. 이 일 이후에 월영초등학교 학부모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시우 사건 이후 아이들을 직접 등교시키는 학부모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 이번 일 이전에도 스쿨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동네로 이사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차도에 횡단보도가 있더군요. 민원을 두 차례 정도 냈습니다. 처음 올리고 반응이 없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구청관계자와 중부경찰서에서 나와 현장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여기 안전봉 밖에 박을 수밖에 없다. 예산이 없다. 그리고 민원에 올리신 글은 내려주시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설치된 봉을 보니 도저히 안전할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해 줬으니 다행이다 하고 살고 있었죠.”

90˚각도로 두 개의 횡단보도가 교차하고 있는 지점에 박힌 봉은 위태해 보였다. 확인을 위해 찾은 시간에도 끊임없이 위에서 내려온 차들이 그 봉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우회전하고 있었다. 언제든 같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구조였다. 다행히 이번 사건은 사고현장 바로 뒤편에 있는 경찰서 차량의 블랙박스에 당시 상황이 그대로 담겼다.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도 지루한 책임공방에 피를 말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만 씨는 차마 그 화면까진 볼 수 없었다.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고1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게 빚 때문이었죠. 상 치르자마자 집에 빨간 딱지들이 붙었죠. 어머니, 여동생이랑 창원 명곡로터리 근처 술집 창고에서 살았습니다. 많이 어려웠죠. 그래서 비뚤어지기도 하고…. 동생은 내 대학 공부를 위해 진학을 포기했죠. 미용기술 배워서 살고 있어요.”

- 교사는 어떤 계기로 된 것이죠?

   

“경상대 사범대 교육학과 대학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었습니다. 한총련과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라는 단체 활동을 했었죠. 하지만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거제에 배 만들러 가고 독서실 총무, 전단지 돌리기, 주유소, 성인오락실 웨이터 등등 5~6년 동안 온갖 일을 했죠.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동료 교사가 제게 왜 학교로 안 들어가냐고 묻더군요. 저더러 학교에서 아이들 만나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가 노량진에서 공부하던 책까지 주더군요. 학점도 엉망이고 가산점도 없어 포기하고 살았죠. 그런데 그 말 듣고 그 해 5월에 노량진에 가서 12월에 합격했죠. 아버지 제사와 명절에도 집에 안 가고 책상 위에 어머니 사진 붙여 놓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랑 통화 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최종합격하고 어머니, 동생 모두 울었죠.”

- 그렇게 시작한 교사생활은 어땠습니까?

학교는 학원과 달랐습니다. 수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업무처리능력, 인간관계 이런 것이 중요하더군요. 그래서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소풍날이었는데 아이들이랑 놀 계획을 세워 하루 종일 놀았죠. 그런데 소풍 다음날 선배교사가 “왜 아이들하고 노느냐”며 혼내더군요. 저는 시험 끝나면 아이들이랑 항상 축구를 했습니다. 학원 때문에 부모님들께 일일이 양해 전화를 드렸죠. 가정방문도 했습니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 집을 차례대로 돌며 마지막 집에선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죠. 부모님은 거의 안 계셔서 편지를 남기고 왔습니다. 때문에 가정방문 하는 한 달은 거의 매일 라면을 먹었죠.”

- 학생들에게야 좋은 추억이겠지만 미운털이 박히진 않았나요?

“당연하죠. 전교조 일 하면서도 그랬고. 하지만 아이들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좋은 교사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아이들과 더 놀고 싶었습니다. 이번 일에도 그 친구들이 많이 왔습니다. 이제 다들 20대 중반이죠.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 부인도 교사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과 시우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2004년 마산중학교 근무 당시 이인식 선생님이 소개로 한 번 스치듯 만났다가 그 해 12월 참교육실천대회에서 상담사례 발표하는 것 보고 반했죠.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를 만난 것이죠. 6개월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시우는 팔삭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위험했었죠. 숨을 못 쉬었으니…. 의사들도 확신하지 못했죠.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 넘게 있었습니다. 기관지가 안 좋다 하더군요. 늘 불안했죠. 하지만 건강하게 자라줘서 언제나 고마웠죠. 그런데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못 넘기로 결국….

그저께는 시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담배 피면서 하늘보고 울고 있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죠. 그러다 든 생각이 아… 내가 시우한테 받은 사랑이 크구나…. 시우는 언제나 내가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시우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 슬픔이 좀 줄더군요. 그리고 시우한테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내가 학교 다닐 땐 좋은 선생님 보다는 나쁜 선생님이 많았습니다. 나를 바라봐 주는 분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숫자로 판단하지 않고 자연의 소중함과 아이들답게 놀고 자라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갯벌에서 놀아 본 학생들은 쉽게 갯벌을 메울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안전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자라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시우에게 받은 사랑을 갚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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