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어민 피땀이 맺은 결실 '진까이'는 특별했다

오늘날 피조개는 95% 이상 양식이다. 자연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업하는데 들어가는 돈만큼 괜찮은 수익이 나지 않아, 대부분 양식으로 눈 돌렸다. 진해만을 비롯해 통영·거제 연안, 사량도 해역, 남해 강진만, 전남 여수 가막만·여자만 등에 양식장이 몰려 있다.

피조개 양식에 대한 이야기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간다. 1907년 조선어업령이 만들어질 때 기록에 등장하는데, 실제로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대 들어 보급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본격화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수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즈음 양식 수산물에 관심이 한창 옮아갈 때였다. 피조개가 대표적이었다. 정부 지원 속에서 1968년 일본 수출 물꼬를 텄다. 어민들도 적극적으로 피조개에 눈 돌리기 시작했다. 진해만은 피조개 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파도가 세지 않고, 조류 흐름이 적당했다. 무엇보다 피조개 서식장소인 펄이 무르고 깨끗해 더없이 좋았다. 1970년대 중반 들어 진해에는 피조개 양식장이 바다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창원시 진해구 수치 앞바다 한가운데 있는 작업장에서 피조개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이즈음 국내 최초로 종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진이 움막을 짓고 굴 양식장에서 10년 가까이 시험을 거듭한 끝에 결실을 얻었다. 당시 경남도는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반색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달러 박스로 집중 육성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정부 융자·지원이 대폭 늘었다.

이런 가운데 어민들은 경험 속에서 이런저런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산자락이 바다와 연결되고, 육지 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곳에서 피조개 유생이 잘 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진해 명동 앞바다에서 피조개 채묘 연구가 이어졌다. 고된 시간을 풀기 위해 배에서 술자리가 마련됐는데 1명이 바다에 빠져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다. 연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아니더라도 시험 종묘가 하루 밤새 도난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1973년경을 기점으로 본격화한 피조개양식은 1980년대 중·후반 정점에 달했다. 1986년 생산량은 5만 8000톤에 이르렀고, 1988년에는 1600억 원이라는 수출액을 올렸다. 수산물 수출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규모로 최고 품목에 자리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일본으로 많이 들어간 이유는 초밥용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피조개를 '아카가이'라 하는데, 진해에서 나는 것은 '진까이'라 부르며 더 특별히 대했다. 빛깔 좋고 맛 좋은 것에서 이름값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다른 지역에서 나는 것보다 두 배가량 비싸게 쳐줬다. 이 기간 진해에는 피조개 일본 수출 업체가 20개 넘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어민 연 수익이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넘는 4000만 원까지 됐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대량 폐사와 종패 부족이 이어졌다. 많을 때는 40∼50%에 이르던 생존율이 1∼2%밖에 안 되며 연간 생산량은 2만 톤 아래로 떨어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는 연간 2000톤 내외에 그치고 있다.

여름철 고수온·빈산소수괴·저염분 등이 서식환경을 악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본격화한 부산신항사업 탓이 크다. 주로 제덕·가덕·수도·괴정·연도 같은 곳에서 많이 했는데 신항 매립으로 어장이 소멸했고, 수질이 떨어진 것뿐만 아니라 유속 변화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바다에 대형 조선소도 달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진해 어민들은 옛 생각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보름 중에 잘될 때 작업일이 10일은 됐다 치면, 지금은 5일도 안 되지. 신항 빼고 항로 빼고 나면 어장 자체가 별로 없거든. 다른 어종도 마찬가지고…."

   

이런 가운데 국립수산과학원은 2005년부터 2012년까지 '피조개 양식 복원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양식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년 내내 펄 바닥에 둘 것이 아니라 수온에 따라 물속에 매달아 양식하는 쪽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와 동시에 종패를 생산해 어민들에게 공급했다.

진해 어민들은 스스로 머리를 싸매며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진해에 있는 14개 어촌계 모두 피조개 양식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어촌계는 공동배양장을 만들어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데, 최근 시험 살포 결과 생존율을 90%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이런저런 노력 속에서 4∼5년 전부터 조금씩 나아지는 분위기다. 지금은 속천항에서 5∼6분 정도 배 타고 나갈 거리에 어장이 주로 형성돼 있다.

   

1985년 만들어진 피조개양식수협은 마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일본 수출 경로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시절 피조개는 일본에 전량 수출해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맛보기 어려웠다. 수출 가격이 워낙 높았기에 국내에 풀어도 그 가격으로 사 먹을 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환율이 떨어지면서 가격이 하락했다. 좋은 시절에 비하면 5분의 1 정도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초밥에 이용되는 해산물이 다양해지면서 피조개도 덜 찾게 됐다. 더군다나 중국·러시아·북한산과 경쟁까지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수출보다 내수용으로 눈 돌리고 있다. 소비량에서 내수용이 이미 수출용을 앞질렀다. 그럼에도 '피조개는 비싸다'는 인식이 강해 소비가 아직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진해에서는 서울 국회 앞에서 시식회를 여는 등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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