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여가문화원 원장, 조정림 마산YMCA부장

지난 10월 19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거리 일대에서는 약 25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대형행사가 열렸다. 경남지역 NGO들 대부분이 참석했으며, 각자 부스를 설치하고 체험활동, 기념품 증정, 상담 등을 했으며 메인무대에서는 ‘창동 역사 탐방 라디엔티어링’, ‘골든벨 행사’, ‘NGO한마당(동아리 경연대회)’ 등이 열렸다. 또한 각 지역에서도 연계행사가 열렸으며, 창동 인근 카페에서는 위안부 할머니와의 대화, 사회적 경제에 대한 토론, 도심재생에 대한 토론 등이 열렸다. 그리고 10월 31일에는 ‘이그나이트 마산’이라는 행사가 3‧15아트센터에서 열려 12명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노하우나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2013 경남NGO박람회’ 부속행사였다.

‘2013 경남NGO박람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메인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를 총 책임지는 이종호 여가문화원원장, 또 한 사람은 대회 사무국장으로서 모든 회의를 열고 행사장에서도 사람들을 관리하고 행사에 대한 모든 것을 꿰고 있는 조정림 마산YMCA 시민사업부장. NGO의 특성상 적은 인력으로 모든 행사를 치러내야 하는데, 이 두 사람의 활약으로 ‘2013경남NGO박람회’는 많은 행사들을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의 활약이 올해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작년 창원시 성산구 용지공원에서 열린 ‘2012년NGO박람회’에서도 두 사람의 활약은 시작됐다. 이때부터 기자는 두 사람을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 싶어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임종금 기자

그들은 어쩌다 ‘운동가’가 됐나?

오랫동안 두 사람을 인터뷰 하고 싶었으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경남NGO박람회 외에도 온갖 일정과 행사를 소화하고 있었다. 매일 일정을 달고 산다는 기자도 머쓱할 정도로 그들은 하루하루 숨 쉴 틈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11월 5일 마산YMCA에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먼저 두 사람의 ‘호구조사’부터 시작했다.

이종호: 저는 충북 청주 사람입니다. 1960년생이고 경남공업전문대학 80학번으로 오면서 경남과 인연이 됐습니다. 마산에서 처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았습니다. 청주에 집이 있고, 저는 마산에서 일을 보는 일종의 주말부부입니다.

-청주면 주말부부로 하기에는 너무 먼 곳이 아닙니까?

이종호: 이렇게 떨어져 산 지가 14~5년은 됐습니다. 어떨 때는 바빠서 6개월 동안 집에 못 간 적도 있습니다. 쇼핑할 때 부부들이 손 잡고 하는 것을 보면 가끔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허허.

조정림: 저는 김해가 고향이고, 1976년생입니다.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95학번으로 오면서 마산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자녀는 딸만 둘 있습니다.

/임종금 기자

-저는 두 분을 작년부터 알았는데, 두 분은 손이 척척 잘 맞는 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으셨던 것 같은데….

이종호: 저는 1984년부터 마산YMCA 실무자를 했습니다. 제가 처음 YMCA를 안 게 대학에 가니 당시 황주석(2007년 별세) 선배가 한창 대학별로 YMCA를 만들 때였습니다. 심심해서 동아리 하나 해볼까? 싶어서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책을 읽다 보니 자연히 코가 꿰여 군대 갔다 와서 실무자가 된 겁니다.

조정림: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안에 학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회과학연구회 또박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선배들 따라 다니다 보니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산에서 있었던 3‧15항쟁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4‧3항쟁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고.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내가 대학생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까 고민하다 보니 자연히 운동권에 휩쓸리게 된 겁니다. 그래도 저는 교사를 해 보려고 교직이수도 하는 등 착실하게 대학을 다녔습니다. 졸업할 때 1999년인데, 당시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마산YMCA에 가서 용돈벌이라도 하자고 생각한 게 지금까지 YMCA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두 분 다 YMCA사람들이네요.

이종호, 조정림: 네.

이종호 원장님. 마산YMCA를 하다가 지금은 여가문화원을 하시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종호: 마산수출자유구역에 ‘한국스타’라는 업체가 있었습니다. 송년회 행사를 하는데, YMCA에서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그쪽 전문가는 아닌데 오로지 고등학교 때 잠시 응원단장 했다는 죄로 강사로 나가게 됐습니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을 주는 겁니다. 마산YMCA재정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강사비를 YMCA로 입금해 주니까 선배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겁니다. 야, 이게 돈이 되는 것 같다. 1985년부터 지역에서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노동현장에서는 레크리에이션 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제가 안 다닌 현장이 없습니다. 돈도 많이 못 받았고, 돈을 받고도 돌려준 곳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 ‘운동’쪽으로만 다니니까 당시 YMCA이사회 그룹이 보수적이었는데, 그 분들과 많이 부딪혔습니다. 그러다 1993년부터 독립해서 ‘레크리에이션 문화원’을 만들어 창원 성원오피스텔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그럼 돈을 좀 버셨습니까?

이종호: 행사를 많이 하고, 한 때는 직원 20여 명을 두기도 했습니다. 특히 삼성항공 전 사원 교육을 48차시로 했는데, 1994~95년 당시 돈으로 9600만 원을 받았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는 삼성과 노동운동 현장을 다니신 원장님과는 ‘결’이 안 맞을 텐데요.

이종호: 아마 S&T노동자들을 데리고 시민노래마당인가 했는데, 그 걸 삼성항공 인사과 사람들이 본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전 사원 프로그램 매뉴얼을 짜 달라고 했습니다. 매뉴얼을 짜고 나서도 긴가민가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알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안 될 거 세게 불러나 보자고 해서 한 차시당 200만 원’으로 했는데, 아무 소리 안하고 돈을 주는 겁니다.

/임종금 기자

-그럼 그 뒤로 계속 마산 창원에 계셨습니까?

이종호: 2001년에 통영에도 YMCA를 만들자고 해서 2002년에 통영으로 갔습니다. 2008년 까지 통영YMCA사무총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청주에서 YMCA를 조직한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올라가서 1년 정도 또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오래 떠나 있으니까 고향이 낯설었습니다. 동기들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고. 2009년에 다시 마산으로 와서 이렇게 있습니다.

-많은 행사 중에 기억이 나는 곳이 있을 텐데요.

이종호: 한번은 해군 제3함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2~3년 간 했는데, 반응이 좋았고, 특히 김종철 제독 본인이 만족을 했습니다. 나중에 고맙다고 통영 욕지로도 가족 휴양을 가라고 군함을 내 준 일이 있습니다. 창원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 대상으로 4~5년 정도 행사를 한 것 같습니다. 두 행사 모두 돈 되는 행사는 아니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사람들은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 연수원에서 공무원 프로그램을 하면 그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몸을 아예 안 움직입니다. 7~8년 간 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못하겠다고 그만뒀습니다. 도식적인 분위기가 강하고. 관료주의를 못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조정림 부장은 하염없이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다이어리에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 중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조정림: 아, 일정 정리하고 있습니다.

-24살에 마산YMCA에 인턴으로 오셨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뭡니까?

조정림: 제가 딱 들어가자 이윤기 부장(현 마산YMCA기획부장)님이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했습니다. 그게 일종의 훈련인 셈입니다. 스스로 기획하고 조직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당시 마산YMCA는 ‘레크리에이션 연구회’ 밖에는 동아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청년 조직은 제가 맡겠다’고 하고 동아리를 만들고 대학생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임종금 기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조정림: 역사탐방 동아리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또 공공근로나 헌옷수거사업도 제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애를 많이 쓴 곳이 경남대 YMCA입니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저는 뭐든지 열심히 하자는 주의입니다. 열심히 했지만 결국 망해 먹었습니다. 좀 모임이 활성화 되려고 하면 예비역들이 와서 흐려 놓는 겁니다. 그걸 반복하다가 결국 이윤기 부장님이 ‘거긴 정리해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상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직은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마산YMCA에서 계속 계셨는데, 지금 건물도 있고 형편이 다른 NGO에 비해서는 나아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이종호: 제가 있을 때만도 2년 마다 전세기간이 끝나면 본부를 옮긴다고 식겁을 했습니다. 그걸 8~9년 동안 한 것 같습니다.

조정림: 이 건물은 IMF때 부도가 난 건물을 헐값에 경매로 사들인 겁니다.

-회원은 몇 명입니까?

조정림: 후원회원까지 합치면 3000명 정도 됩니다.

-부장님이 시민사업부 부장님인데, 마산YMCA 조직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조정림: 저희는 총 직원이 24명입니다. 유아교육부, 사회교육부, 사회체육부, 청소년사업부, 시민사업부가 있습니다. 그 위에 기획부장님이 계시고, 더 위에 차윤재 사무총장님이 계십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로는 총회와 이사회가 있습니다. 제가 있는 시민사업부는 저 포함 3명입니다. 에너지 절약 캠페인, 학생 교육, 현안별 집해 행사, 소비자 캠페인, 물가감시 활동, 각종 조사사업, 시민중계실(전화상담 업무)까지 합니다. 3명인데 죽어납니다.

경남NGO박람회에서 의기투합

-경남NGO박람회에서 두 분을 제가 뵀는데요, 상당히 큰 규모의 행산데,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조정림: 김두관 지사가 당선 되면서 NGO들이 ‘NGO센터’를 김 지사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각 단체들이 임대료 때문에 제대로 활동도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센터에서 많은 단체가 공간을 공유도 하고, 강당이나 회의도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예산문제가 있어서 ‘NGO박람회’로 돌린 겁니다.

/임종금 기자

-이게 2011년부터 시작된 건데, 작년과 올해는 제가 봐서 아는데, 2011년에는 어땠습니까?

이종호: 1회 때는 도청 잔디밭에서 했습니다만 문제가 많았습니다. 관변단체(새마을운동회, 한국자유총연맹 등)가 같이 참여하니 이게 ‘코드’가 안 맞는 겁니다. 2회부터 순수 NGO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습니다. 또 1회 때는 비도 오고 잔디가 다 상해서 도청 측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도 적게 왔습니다.

-작년에는 창원 용지공원 넓은 곳에서 했는데, 올해 갑자기 다소 비좁은 창동으로 옮긴 이유가 뭡니까?

조정림: 지역의 문화와 우리 지역의 것들을 찾아 나가는 것도 NGO의 활동이 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용도 있고, 재미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싶었습니다. 작년에는 체험활동을 많이 했습니다만 용지공원이 따로 사람을 안 부르면 찾아오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창동으로 도심재생과 연계해서 해 봤습니다. 창동상인회에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창동에 우연히 와 보니 이런 게 있더라. 시민들의 호응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본부 천막에 가면 자원봉사자 빼면 인원이 5명 내외로 보이던데, 그 적은 인원으로도 이런 큰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이유는 뭡니까?

조정림: 일단 무대와 각종 집기들은 이종호 원장님이 어떻게든 해결하시니까 큰 힘이 됩니다. 집행위원들의 역할이 딱딱 나눠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고 작년에 해봤기 때문에 머릿속에 순서나 계획이 다 서 있습니다. 이제 각 단체들도 3회 째가 되니까 대강 감을 잡은 듯 합니다. 벌써 내년엔 ‘우리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단체가 있을 정도입니다.

-작년에도 그렇고, 올해도 정말 10분도 쉬는 시간 없이 메인 무대에서 계속 행사를 진행하고, 경품을 나눠주고, 다시 행사를 진행하고. 제가 시간을 재보니 8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계신 것 같았는데, 이렇게까지 하시면 안 힘드십니까?

이종호: 제가 생명평화축제 사회를 12년 동안 봤습니다. 여기서 배운 게 ‘쉴 틈을 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12시부터 사람들이 오면 오후 5시 30분까지 끝까지 사람들이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고 행사도 알차게 됩니다. 항간에 다른 축제장에 가서 ‘NGO박람회 가니까 경품도 주고 온갖 것을 다 하던데 여긴 뭐 없냐’는 소리도 들린답니다. 가수 준비시킨다고 30분 정도 사람들을 놔두면 사람들 다 떠나 버립니다.

-그렇더라도 8시간 동안 똑같은 놀이만 할 수 없고, 여러 가지 놀이나 활동을 계속 해야 하는데 어떻게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옵니까?

이종호: 저 사람을 어떻게 내 속으로 끌어들여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할까? 그걸 매일 고민합니다. 즉, 청중에게는 ‘저 사람이 뭘 할까’궁금하게 하는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내년에 해 보고 싶은 행사가 있습니까?

이종호: 내년에도 박람회가 열리면, 저는 ‘거짓말 대회’를 해 보고 싶습니다. 정치적으로 잘못한 것을 풍자할 수도 있고, 부부간이나 학교에서 얘기한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시키려면

시민사회운동이 위기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위기가 아닌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갈수록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가는데 시민사회운동이 활성화 방안은 뭐가 있을까?

조정림: 조직화 된 사람들을 배출해 내야 합니다. 조직화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시민사회단체에 와서 기타를 치기도 하고 산에 가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영화도 봅니다. 그런데 이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YMCA에서 합니다. 왜냐하면 신명나게 자기 삶을 고민하고 철학에 대해 생각할 기회,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모임이 활성화 되고, 그 분들이 자연스럽게 자신과 사회에 고민을 하면서 시민사회운동이 활성화 됩니다. 프랑스나 독일은 각 계층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서 조직화된 사람들을 계속 생산해 내지만 우리는 그게 어렵기 때문에 소모임이 매개가 되는 겁니다. 또 기회가 되면 사회교육을 통해 생각 있는 아이들을 꾸준히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종호: 사람들이 너무 여유 없이 살아갑니다. 가족중심의 놀이 프로그램들이 지역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여가도 활용할 수 있고, 아이들이 문화도 즐길 수 있고, 가족 간에 소통도 가능합니다. 박람회 때 한 라디엔티어링도 좋고, 진해 여성회에서 하는 역할 가족극도 재미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각 단체에 묶여서 하는 것보다 오픈해서 공개된 자리에서 많이 알릴 수 있는 곳에서 해야 합니다. 너무 NGO들은 단체별로 묶여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각자 경험이 달라 처방도 달랐지만, 근본은 같았다. 사람들과 더 넓게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남NGO박람회에서 이종호 원장이 8시간 동안 쉼 없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을 때, 부지불식간에 그가 한 말이 기억났다. “여기 계신 여러분이 NGO에 가입만 하셨어도, 감히 정치인들이 저렇게 깽판을 칠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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