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움츠러드는 추운 겨울이지만 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다.

무엇보다 해산물. 그간 아예 보이지 않거나 선도가 떨어지던 굴, 홍합, 가리비, 바지락, 꼬막, 대하, 대게, 대구, 물메기, 도미, 방어, 아귀, 명태, 참조기, 홍어, 대게, 꽁치(과메기) 등이 1년 중 최고의 맛을 간직한 채 시장에 쏟아진다.

그리고 김치. 요즘은 좀 드문 풍경이 됐지만 찬바람이 솔솔 불면 집집마다 음식점마다 제철 배추, 무 등으로 김장김치를 담가 겨울 내내 먹는다. 이밖에 남해 특산물로 유명한 시금치, 유자를 비롯해 사과, 귤, 우엉과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만든 국수(평양냉면, 막국수, 소바) 도 가장 맛있을 시기이다.

다른 계절보다 겨울이 매력적인 건 역설적이지만 춥기 때문이다. 해산물이든 뭐든 웬만해선 잘 상하지 하고 꽤 오래 신선도와 맛이 유지된다. 각종 세균이나 벌레의 활동도 뜸해져서 집·식당·야외 어디를 가도 위생 문제 걱정이 덜하다. 왜 그렇지 않은가. 고온 다습한 여름에는 생선회 등 날것 그대로의 해산물 요리를 꺼리지만 겨울에는 ‘거침없이’ 먹고 있는 우리들이다.

1년 내내 배추김치 정상일까?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자. 위에 나열된 음식들, 평소 1년 내내 열심히 혹은 무의식적으로 찾아 먹거나 늘 식탁에 올라오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배추김치가 대표적이겠다. 어디를 가나, 하다못해 분식점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더라도 뒤따라 나오고 또 뒤따라 나와야 하는 게 배추김치다.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까. 무심코(?) 일상이 된 우리의 식습관이 몰고 온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대다수 식당의 배추김치는 저가의 중국산이 점령한 지 오래다. 지난해 김치(대부분 배추김치) 총 수입액 중 90%(1억 1082만 6000달러)가 중국산이었고 배추 수입량도 매년 수십 배씩 폭증하고 있다.

마산 어시장에서 먹은 방어회(왼쪽)와 굴. 요즘 한창 맛있는 녀석들이다./고동우 기자

원래 김치는 그때그때 철마다 나오는 다양한 재료를 소금, 젓갈,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 오래오래 두고 먹는 저장음식 문화다. 배추김치나 무김치는 겨울 한철의 김치였을 뿐, 봄에는 미나리, 갓, 얼갈이, 여름에는 부추, 열무, 오이, 가을에는 총각무, 가지 등으로 김치를 담갔다. 요즘 우리가 먹는 김치는 기껏해야 10종도 채 안 되는 듯싶지만, 과거에는 무려 300종이나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물론 재배 기술이 발달해 1년 내내 관련 채소가 나오긴 하지만 제철이 아닐 땐 아무래도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해산물 쪽도 제철의 개념이 실종된 지 오래다. 마트에 가보면 각종 생선부터 문어, 낙지, 새우, 주꾸미, 조개 등 수입 해산물이 넘쳐난다. 우리 바다에선 제철이 아닌 데다 예의 선도도 나빠 개인적으로는 구입을 꺼리는 편인데, 어쨌든 찾는 사람이 있으니 갖다놓는 것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다른 신선한 해산물이 많은데 굳이 이런 것까지 사먹을 필요가 있을까?

남녀노소 온 국민이 ‘사시사철’ 즐겨먹는 명태나 민물장어(뱀장어)의 경우를 보면 배추김치처럼 상황이 심각하다. 최근 명태는 제철(겨울) 여부를 떠나 아예 국내에서 거의 잡히지가 않는다. 대부분 러시아, 일본 등에서 수입하거나 북태평양 러시아 수역에서 입어료를 내고 잡아오고 있다. 그래서 한때 ‘국민 생선’답지 않게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는데 요즘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 공포로 오히려 가격이 떨어지는 추세다. 안전상 문제로 안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과도한 소비와 무분별한 남획(그리고 기후 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이 명태 어획량 감소의 주원인이라니 이 역시 우리가 ‘제철’을 배신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이 제철인 민물장어 또한 소비가 급증하고 연안 개발로 서식처가 줄어들면서 ‘멸종’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냉동, 수입 가리지 않고 시장에 나오고 있으나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입 냉동 명태(동태). 요즘 명태는 대부분 러시아, 일본산이다./경남도민일보 DB

제철은 물론이고, 수급 상황과 생태계 변화를 주시하면서 적절히 소비하고 적절히 즐겨 먹는 현명한 식습관은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선도도 떨어지고 물량도 많지 않은 재료를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먹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계절의 은혜를 얻는 능력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요리사인 박찬일은 최근 <경향신문> 칼럼 ‘아끼는 식재료 배추·대파’에서 이렇게 말했다.

“곰곰 생각하니, 맛이란 결국 계절이 주는 선물 같다. 인간이 아무리 분석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들, 계절이 살찌우는 맛의 부피는 따라갈 수 없다. 숨겨진 맛의 비밀이란 결국은 계절의 은혜를 얻는 능력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다.”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제철 음식의 축복에 대한 ‘완벽한’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평소 장보기에 관심이 없고 둔감한 사람이라도 요즘은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제철 음식 정보를 다 알 수 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정보와 지식을, 그러니까 박찬일이 말한 ‘계절의 은혜를 얻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스스로 ‘계절이 주는 선물’을 차버려야 할 까닭이 있을까.

시간 있을 때 당신이 먹는 음식의 제철 정보를 확인하기 바란다. 최근 수급 상황 등까지 알아보면 더 좋다. 물량이 부족하거나 비싸고 심지어 맛까지 떨어지면 소비를 자제하고, 풍성하고 저렴하고 여기에 맛까지 좋으면 열심히 찾아 먹으면 된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물건은 절대 사지 않는 사람보다 더 힘 센 장사는 없다.” 중국 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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