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씩씩한 폐사지와 드넓은 억새 평원

사람들은 합천이라 하면 가야산과 해인사만 있는 줄 아는 경우가 많다. 또 사람들은 합천 황매산이라 하면 봄철 평원에 펼쳐지는 철쭉꽃만 아름다운 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산재 엄청난 바위산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폐사지 영암사지도 씩씩하면서 멋지고, 황매산 또한 봄 철쭉 못지않게 가을이면 평원을 가득 메우는 억새가 대단하다.
<피플 파워>는 앞으로 ‘이웃 고을 마실 가자’를 통해 경남은 물론 경북과 전남·북을 찾아 해당 지역의 자연과 생태를 둘러보고 지역 특산물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올리려고 한다.

지난 11월 6일 아침 일행과 함께 가을이 저물어가는 즈음 합천을 향해 나섰다.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지와 새로 내고 단장한 기적길이 있는 황매산을 찾아서였다. 원래는 40명으로 한정했지만 어쩌다보니 버스 한 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돼서 7인승 자동차를 서둘러 동원해야 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폐사지 같지 않은 망한 절터, 영암사지

한 바탕 소동을 치른 끝에 오전 10시 즈음에 영암사지 들머리에 당도했다. 일행은 큰길에서 내려 모산재 영암사지를 향해 걸어갔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영암사지가 있었고 그 뒤로는 커다란 바위가 하얗게 빛나는 모산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영암사지는 이를테면 망한 절터다. 망한 절터는 대부분 느낌이 스산하거나 고즈넉하다. 영암사지는 그렇지 않다. 밝고 환한 편이며 주는 느낌 또한 씩씩한 쪽에 가깝다. 옛날 다듬은 석조물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편이어서도 그렇고 뒤를 받치는 모산재가 매우 기운이 세어서도 그렇다.

/김휜주 기자

사람들은 절터와 모산재가 안겨주는 전체 느낌을 누리면서 삼층석탑을 지나 돌계단을 타고 가운데 금당으로 오른다. 통돌로 된 돌계단은 가파른 편이어서 날렵한 인상을 준다. 천천히 걸어오르는데 처음 눈길이 마주치는 데는 돌축대에 조각된 험악한 얼굴이다. 아무래도 이렇게 본당으로 걸어오는 이들에게 스며 있기 마련인 삿된 기운을 내쫓기 위해서일 듯하다.

이어서 바로 앞에 있는 쌍사자석등에서 사자 엉덩이도 한 번씩 쓰다듬는다. 유홍준 선생이 새로 펴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표지에 이 사진이 쓰이고 나서 이 사자 엉덩이는 ‘국민 엉덩이’가 됐다. 그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과 손바닥 깊숙하게 녹아든다.

그러고는 금당 아래를 둘러싸고 있는 축대에 새겨진 조각들을 둘러본다. 연꽃 무늬가 있고 동물 모양도 있다. 머리가 덥수룩한 모양새로 미뤄 사자로 보는 이가 많은데 어쨌거나 그 표정이 즐겁고 행동거지가 날래게 생겼다. 사람들은 낮은 소리로 감탄한다.

왼쪽 금당터로 옮겨간다. 석등이 깨어진 아랫도리가 앞에 있고 양 옆으로 귀부가 있는 모양에 비춰볼 때 말하자면 개산조사(開山祖師)를 모시던 자리이지 싶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영암사에 대한 기록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왼쪽 귀부의 거북은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있고 오른쪽 귀부 거북은 머리를 다소곳하게 숙인 채다.

/김휜주 기자

사람들은 두 거북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면서 그 조각의 섬세함과 뚜렷함에 한 번 더 놀란다. 등을 쓰다듬으면 등딱지 뚜렷한 구분이 느껴지고 목에서는 힘줄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꼬리 틀어올린 맵시를 보면서 그것이 탁 튕겨져 나올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밖에도 영암사지는 둘러볼 것이 많다. 당간지주도 있고 물을 담아 쓰던 석조(石槽)도 있다. 쓰다 남았는지 모를 부재로 곳곳에 널려 있고 기와 조각은 곳곳에서 마주친다. 이렇게 둘러본 마지막은 왼쪽 아래 새로 지은 절간이 있는 쪽으로 나가는 걸음이다.

이렇게 해서 빠져나간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굽어지는 흙길을 따라 휘감아 돌면서 이 망한 절터와 모산재를 한 번 크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위쪽 삼층석탑이나 쌍사자석등이 있던 데서 하던 조망과 달리 절터가 갖춘 따뜻함과 씩씩함과 온전함을 새롭게 맛보게 된다.

이렇게 설핏 둘러보는 데만도 1시간 넘게 걸렸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새겨본다면 2시간으로도 모자라는 데가 바로 여기 영암사지다. 들머리 600년도 더 된 느티나무를 지나 내려와 밥집 ‘철쭉꽃 필 무렵’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기뻐하고 놀라워했다. 밥과 반찬과 국이 심심하고 맛이 있고 좋았기 때문이다. 주인은 황매산에서 나는 나물을 썼다고 했다.

새로 낸 ‘기적길’ 따라 황매산 억새 탐방

밥을 먹고 나서 한숨 고른 다음 바로 옆 황매산군립공원으로 옮겨갔다. 공원 들머리에서 내려 새로 낸 기적길을 걸었다. 합천군이 개발한 ‘나를 살리는 길-합천활로(活路)’ 여덟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황매산 기적길’이다. 기적길은 개울과 나란히 나 있다. 걷는 내내 흐르는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김휜주 기자

아무래도 산을 오르는 길이다 보니 땀도 났고 숨도 조금은 가빠졌지만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았다. 쉬지 않고 걸었더니 40분 남짓 만에 위쪽 오토캠핑장에 가닿았다. 여기서부터는 다들 자유 행동이다. 황매산 꼭대기까지 갔다 와도 좋겠고 곳곳에 무리지어 있는 억새 덤불로 들어가 즐겨도 좋겠다. 물론 생태가 망가지지 않도록 자연에 대해 배려는 해야 마땅하겠다.

억새는 꽃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에 많이 날아가 조금 바래져 있었다. 하지만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단발머리 소녀 물기 머금은 빗은 머리 같은 어린 억새는 그것대로 멋있고 한껏 피어오른 처녀 같은 다 큰 억새는 그것대로 아름답다. 그리고 바람에 이삭을 날린 마른 억새는 세상 모든 어지러움과 욕심을 털어낸 듯 가벼워 보여서 또 그럴 듯한 것이다.

여기저기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바라보이는 데마다 억새가 자리잡고 있다. 살짝 넘어가는 오후 햇살을 이 억새들은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가 되쏘고 있다. 그렇게 되쏘여 돌아오는 햇살에 눈이 아린다.

/김휜주 기자

억새는 멀리 있는 산들과도 잘 어울렸다. 단풍으로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원경(遠景)과 가까이 억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근경(近景)이 함께 눈에 담을만하다.

경남에서는 밀양 재약산 옛날에는 사자평이라 일컫던 산들늪 억새와 창녕 화왕산 꼭대기 전설을 머금은 연못을 둘러싼 들판 억새가 이름을 내고 있지만 여기 합천 황매산 억새도 재약산이나 화왕산에 절대 밀리지 않을 듯한 태세인 것이다.

일행들을 살펴보니 어떤 이들은 억새 덤불 한가운데 마련돼 있는 긴의자에 앉아 즐거운 수다에 빠져 있다. 어떤 이는 억새 무성한 드넓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 바위에 올라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고 있다.

또 한 무리는 황매산 꼭대기를 발걸음을 재게 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에 풀섶에 들어가 가져온 손전화를 꺼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어떤 이는 라디오를 들고 왔는지 대중가요를 조그맣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발길을 옮기고 있다.

황매산 막걸리, 합천로컬푸드와 삼가 소고기

이렇게 둘러보다가 일행 몇몇을 불러 모아서는 가게에 들어갔다. 손수 담근 막걸리와 합천서 나는 콩으로 만든 손두부를 먹었다. 또 옆에서 할머니 한 분이 파는 홍시도 사서 넷이 나눠 먹었다. 이웃 고을을 찾아 떠나는 즐거움이 여기에 다 모여 있다. 눈길과 발길은 그것이 닿는대로 누리면서 지역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이렇게 가볍게 맛보는 것이다.

3시 즈음에 발길을 산아래로 돌렸다. 3시30분 즈음에 군립공원 들머리 주차장에 이동 장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번 마실에 앞서 합천로컬푸드영농조합법인(055-933-9696)과 섭외해 만든 자리였다. 합천로컬푸드는 공공의 이익과 법인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은 업체다.

/김휜주 기자

몇몇은 천막도 치고 물건도 죄다 갖춘 그런 장터를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제 이동 장터는 단출했다. 달랑 탑차 하나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싣고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실은 알찼다. 합천 명물인 밤묵을 빠뜨려서 아쉬웠지만 다들 제대로 된 로컬푸드를 가져온 것이다. 가야산 사과, 고구마, 우리밀 시배지답게 우리밀 과자와 빵, 토마토, 버섯 그리고 들깨·수수·조 같은 잡곡…. 사과도 금방 동이 났다. 고구마를 담은 궤짝도 금세 사라졌다. 대체로 과일과 우리밀과자는 잘 팔렸다. 잡곡이 덜 나갔는데, 아마도 자기 사는 집 근처 매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이렇게 해서 가는데 일행 가운데 요청 겸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가는 길목에 삼가면이 있고 삼가는 또 소고기가 좋기로 이름나 있으니 거기 한 번 들러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누구한테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합천 아는 이에게서 한 군데 추천받아 가는 길에 들렀다. 해인축산식당(055-933-4194)이었다.

/김휜주 기자

들르지 않았으면 큰 일이 날 뻔했다. 합천로컬푸드보다 사람이 더 붐볐다. 고작 50명이 들어왔는데도 고기 사려는 줄이 길게 이어졌다. 해인축산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특상품만 취급한다. 처음 가져올 때도 비계를 떼어낸 상태인데 여기서 손님들한테 줄 때 한 번 더 비계를 베어낸다. 삼가에서는 여기뿐 아니라 모든 가게가 그렇게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그대로 내줘도 손님한테 불만이 없을 듯한데 굳이 비계를 베어내는 칼질을 한 번 더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자기만 비계를 한 번 더 떼어낸다고 얘기해도 딴죽 걸거나 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삼가 모두가 그리한다고 했다. 삼가 고기가 계속 유명한 까닭이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삼가에서 이렇게 30분 남짓 지체가 됐다. 덕분에 일행은 도착 예정 시각인 6시를 많이 넘겨야 했다. 그래도 불만인 사람은 없었다. 창원에 닿아 헤어질 때는 다들 시원한 물을 한 모금 잘 머금은 듯이 개운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