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글쓰기는 자주적인 개인으로서 세상을 보는 창

경남도민일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릴까? 순위를 매기지는 않았지만, 홍창신(60) 선생의 칼럼이 주목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10~20대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루리웹’이라는 게임커뮤니티에도 그의 글이 번져 나간 것을 보면 그 글 속에 숨겨진 힘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의 퇴행, 오래 가지 못할 것”

홍창신 선생을 진주시 평거동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최근 그의 칼럼에서는 깊은 분노와 답답함이 느껴진다. 진주의료원 폐업,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진보당 사태, 언론의 침묵속에서 그는 “좀 상식적으로 살자. 애 터지는 세월이다”고 일갈하고 있다. 그 ‘애터짐’의 근원을 먼저 짚고 싶었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뻔뻔하다는 생각, 모욕감이 듭니다. 뻔한 짓을 하면서도 어찌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그러는지. 모든 정치행위는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우리 같은 사람으로 본다면 우리를 한 없이 가볍고 업수이 보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사회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돌아가고 있는 일의 앞뒤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예 모른 척 하고 속일라고 드니까 어이가 없는 겁니다.”

홍창신 칼럼니스트./임종금 기자

그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예를 들었다.

“김기춘 비서실장 같은 사람이 나섰습니다. 74살입니다. 천재적이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박정희 때 이미 출세를 했습니다. 박정희 시대부터 권부에 있다가 그 후에 역할을 많이 하고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넘어가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 갑자기 나와서 그때 하던 행태를 하니까 황당한 겁니다.”

-그럼 30~4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까?

“옛날에는 경찰서 앞을 잘 못 지나갔습니다. 자기가 운동권이나 지은 죄가 없이 소시민으로 살아도 경찰서 앞을 지나가는 게 두려운 겁니다. 이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지독하게 일방적이고 소시민들은 맨날 당하는 쪽에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 준 게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인데, 이제 다시 (경찰서 앞이 두려운) 시대로 돌아오고 있다고 봅니다. 다른 점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학교 운동장 마당에서 5,6학년 형들이 김주열 최루탄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 때는 소시민들이 정치를 매우 중요하다고 느끼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정치를 경원하게 만들고 혐오하고 있는데, 이 거대한 퇴행을 언론이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적 퇴행이 오래 갈까요?

“길게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손석희가 JTBC에 갔을 때 그걸 느꼈습니다. 삼성이나 중앙일보 쪽에서 박근혜 같은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리라고 판단하지 않았고, 그 이후를 대비한 것이 손석희 기용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고 독한 놈들에게도 다루어졌고 고생도 많이 해봤습니다. 역사 속에서 긴 관점으로 본다면 이런 것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정반합으로 통해서 발전으로 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초조하고 갑갑한 것은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빼놓지 않았다.

홍창신 칼럼니스트./임종금 기자

“지금 정권이 하는 것을 보면, 국정원 공무원들의 선거개입이 드러나니까 이석기·정상회담 대화록·전교조·전공노를 갖다 붙여서 본질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이건 도저히 야권에서는 따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석기나 그런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법에 의해서 처벌하면 될 일인데, 결국엔 그 공분할 수 있는 적을 맹글어서 국민이 분노하도록 유도하면서 자기들의 세력을 일탈시키지 않고 뭉쳐지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런 방식을 지속한다면 옛날에는 결국 전쟁을 일으켰는데 저들도 위험한 일을 도모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돕니다.”

“우리나라 언론인, 자존감으로 버텨야”

기자가 여러 주변 사람들에게 취합한 정보를 모으면, 경남도민일보에 칼럼 쓰기 전, 과거 진주신문에 그가 글을 쓸 때도 지금처럼 영향력이 컸고 ‘광팬’이 많았다. 그의 글의 비결이 뭘까?

“글쎄요. 저는 뭐 그다지 (영향력이 큰 줄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은 먹물이 깊이 배여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직책이나 직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민으로서 글을 쓰는 겁니다. 시민이라는 것은 어떤 권위나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 시골에 살면서 우리나라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내 생각이 이웃들의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리고 글을 무슨 고급스러운 어휘나 문장 보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투리도 많이 들어가고 내 이웃과 같은 단어로 글을 씁니다.”

-언론에 대해서 글을 많이 쓰셨는데요. 요즘 자주 보시는 미디어가 있으십니까?

“종이신문은 안 봅니다. 전부 다 인터넷으로 보는데, 뷰스앤뉴스·오마이뉴스·한겨레신문·경향신문·중앙일보·MBC·JTBC등입니다. 조선일보는 예전에는 봤는데, 요즘은 클릭이 안 됩니다. 기분이 더러워집니다.”

-과거에도 언론이 정권의 편에서 쓰고 그랬지 않습니까?

“차라리 70~80년대 기자들이 지금 기자들 보다 낫습니다. 그때는 기사를 바른대로 쓸 수가 없었지만, 행간 속에서 의미를 어떻게든 넣어서 알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아예 대놓고 뻔뻔하게 한쪽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또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 같은 진보적 언론에서도 ‘우짜든지 붙들고 이거는 우리가 기자의 사명으로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안 느껴집니다.”

-예전에 <나는 꼼수다>에 대한 글도 쓰셨는데, 나꼼수는 어떻습니까?

“대단하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알리고 덤벼든 게 강준만과 김어준입니다. 그래서 진주신문에서 1999년에 김어준 총수를 초청했습니다. 당시 31살짜리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말도 잘하고 터프하고 욕도 잘 하니까 무례하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의바른 청년이었습니다. 김어준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신 이런 발상이 어디서 나오냐?’ 김 총수 대답이 ‘우리가 갖고 있던 점잖함, 그 속에 감춰진 이중성을 까발리고 싶었고, 배경에는 혼자서 전 세계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홍창신 칼럼니스트./임종금 기자

-나꼼수의 역할을 다른 언론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쪽엔 김어준이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는 못 하는 김어준, 딴지일보, 나꼼수 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됐을 때, 딴지일보에 김어준이 이렇게 선포했죠. ‘씨바 전쟁이다. 형아는 니네들이랑은 놀 시간 없다’. 겉으로는 글도 안 쓰고 가만히 수면 아래에 있는 숨겨진 고수들과 응시하는 세력들을 한 번에 확 일으키는 저력입니다. 훌륭한 말보다도 강한 선동이 있습니다. 그게 역사의 변곡점들을 만드는 겁니다. 딴지일보가 이 사회에 10년 동안 미친 역할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언론이 어떻게 될까요? 요즘 야권에서 제도적으로 방송의 독립성 등을 강화시켜야 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제도적인 개혁만으로는 어렵다고 봅니다. 리영희 선생이나 송건호 선생 같은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비록 밥벌이가 적어도 세상에 힘이 있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나설 수 있는 이들이 언론인데 자존감으로 버텨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로 겁박 당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지. 이렇게 하려면 내적인 자기 성숙이 이뤄져야지 외적인 환경이 변화한다고 생길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지역언론은 어찌 해야 할까요?

“성공사례를 하나 꼽는다면 오스트리아의 자이퉁이라는 지역신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자가 옆집 이웃의 기사들을 다 올린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토양이 다르지만, 그런 방법적 측면도 찾아볼 필요가 있겠고, 근본적으로는 시민 사회에서 같이 도와가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장애인에게 시선 꽂는 것을 거둬야

홍창신 선생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함께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형평운동기념사업회다. 먼저 왜 ‘형평’인지 궁금했다. 평등이나 분배가 아니라.

“먼저 이해하고 가셔야 할 게, 진주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각종 민중들의 의병이나 항쟁이 많았습니다

홍창신 칼럼니스트./임종금 기자

. 왜 형평이냐? 당시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일으켰는데, 고기 무게를 다는 저울을 본따 형평이라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일본에도 똑같이 백정들이 수평사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형평운동이 일어난 근원으로는 제가 생각하기에 이렇습니다. 의령 출신인 장지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백정의 아들입니다. 백정 집안이지만 돈을 잘 벌어 일본 유학도 갔다 왔는데 조선에서는 백정 아들이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겁니다. 또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돼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린다. 단순히 기념만 하는 단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백정이 없을까요? 백정과 같이 차별받는 사람이 없을까요? 딱 제가 느끼기에 지금의 백정은 동성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백정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몸은 남자지만 정신이 여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걸 억지로 치료하고 고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1992년에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서 탑도 세우고 학술적인 역사적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 제가 장사(음식점)를 하면서 돈도 좀 벌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냐?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재가 장애인입니다. 이 분들이 부르면 실어다주자…. 그러고 있다가 2003년에 다시 기념사업회를 재창립 하면서 ‘역사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실질적인 형평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많은 불평등을 형평기념사업회에서 다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2003년에 진주 모 초등학교에서 학생을 입학시키려 했는데, 장애인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특수학교로 가라고 했습니다. 몸만 불편할 뿐 정신이 멀쩡한데 어떻게 특수학교에 보내느냐.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여태까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장애 학생들을 위해서 어떻게 한 겁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장애인은 시혜의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교나 기독교의 문제로 그런 시각이 고정 돼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주 어린 유아들은 그런 편견이 없는 겁니다. 어른들에게서 그런 편견이 나오고 사회화 되는 겁니다. 학교에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물론 장애인 시설이 규정대로 된 학교는 거의 없었습니다. 특수학급이 있다고 해도 학교 안에서 ‘병신들 반’으로 완전히 섬처럼 소외돼 있습니다. 문제를 더 살펴보니 본질은 선생님들의 인식이 아주 낮다는 겁니다. 선생님들이 개념을 갖고 있다면 좀 나을 텐데, 선생님들이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 한 두 아이에게 신경을 못 써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교육시키고 교재를 만들고 학교 수업시간에 지도를 하게끔 했습니다. 이후 노인문제, 이주노동자 문제도 함께 했습니다.”

-요즘 장애인 시설도 많아지고 좀 나아진 것 아닙니까?

“많이 바뀐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장애인이 운전면허도 못 쳤습니다. 요즘엔 장애인 콜 택시도 있고 진주시는 무장애 도시로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장애인 문제는 이겁니다. 대형마트에 엄마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가면, 마트에 딱 들어가는 그 순간 수백 개의 시선이 쏟아집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질 못합니다. 그 시선을 거두는 게 본질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자연스럽게 봐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직 안 되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사람은 일생 동안 과반 이상을 장애로 삽니다. 완전히 온 몸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40대만 넘어도 하나씩 말을 안 듣기 시작합니다. 이걸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제가 듣기로 요즘 영화 관련해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청에서 하는 시민교양강좌 같은 겁니다. 인권이라고 말을 하면 너무 진부하지 않습니까? 인권. 이 말 뒤에 붙일 말이 없습니다. 영화를 얘기하면서 인권 문제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영화는 독립 영화나 다큐 영화가 아닌가?

“대중적인 영화에서도 소재는 많습니다. ’아이엠 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신지체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해도 그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게 감명 깊게 알려준 영화입니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을 다루면서 동성애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아시스’도 논란이 있지만 노인의 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영화가 있습니다. 물론 제 강의를 많은 분들이 듣는 건 아닙니다만, 한 명이라도 바뀌면 주변에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이 있으십니까?

“홍상수 감독, 임순례 감독, ‘트루맛 쇼’ 만든 김재환 감독, 마이클 무어 감독을 좋아합니다.”

장애나 인권문제, 소위 ‘OECD’국가라고 신경 쓰는 모양새는 내는 데,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는 언제쯤 이뤄질까?

“미국이라고 달랐겠습니까? 미국은 2차 대전 때 본국은 매우 풍요
로웠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니 자기 자식이 장애를 달고 온 겁니다. 월남전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자기 자식이 장애를 가지게 되자 인식이 바뀐 겁니다.”

그와의 인터뷰가 끝났다. 인터뷰 하기 전에도 인터뷰 중에도 그는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서 밝히질 않았다.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담기에는 지면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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