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맛 뽑아내고 해풍, 단맛 퍼뜨렸다

남해는 여름 시금치를 하지 않는다. 시도는 했지만 실패했다. 여름 시금치를 하는 곳은 주로 고랭지다. 특히 소비자가 많은 수도권 인근 지역이다. 여름 시금치는 금방 시들어 수송 거리가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해는 모두 겨울 시금치다. 그것도 비닐하우스 아닌 노지에서 자란 것들이다. 그래서 '남해 시금치'는 10월부터 3월 중순까지 나는 '겨울 노지 시금치'를 말한다.

◇억척스러운 사람들이 찾은 보물 = 남해 전체 면적 가운데 경지는 25%도 채 안 된다. 넉넉하지 못한 땅이면서 유배지이기도 했던 남해는 여기 사람들을 억척스럽게 만들었다. 스스로 "논·밭두렁까지 콩을 심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농한기에는 좀 쉴 만도 한데, 손놀리는 게 그리 아까웠던가 보다. 1970년대까지는 벼농사 끝낸 겨울 땅에 보리·밀·콩을 심었다.

남해군 곳곳에 펼쳐져 있는 시금치 밭. /박일호 기자

1980년대 들어서는 마늘을 많이 심었는데 벌이가 괜찮았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마늘 파종 후 한동안 비는 시기도 그냥 두지 않았다. 마늘 땅 사이사이에 시금치를 심었다. 물론 자기 밥상에 올리기 위한 소규모였다. 내다 판다 하더라도 경조사비 정도 건진다는 생각으로 했다. 그런데 외지로 떠난 이들 가운데는 고향 사람들에게 "시금치 캘 때 됐으니 조금만 부쳐봐라"는 부탁을 종종 했다. 남해 시금치는 그렇게 바깥으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한편으로 마늘농사는 20년 넘게 효자 노릇을 했지만, 나이 든 이들은 갈수록 힘겨워했다. 마늘은 잔손 갈 일이 많다. 특히 파종·수확 철에는 사람을 써야 하는데, 일손 구하기가 해마다 어려웠다. 당연히 일당도 치솟아 인건비 부담이 컸다.

노지에서 시금치 작업 중인 남해 아낙들. /박일호 기자

생활력 강한 이곳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빨리 눈 돌렸다. 시금치였다. 2000년대 이후 서면·설천면 같은 곳에서 재배를 본격화했다. 서울 쪽에 상품화해 본격적으로 내놓은 것은 5~6년 전부터다. 벼·소·마늘에서 이제 시금치로 옮아가는 분위기다. 2011년 160억 원이던 생산액이 2012년 300억 원으로 두 배 가량 늘었다. 겨울의 여유를 포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시금치-벼농사 사이에 할 수 있는 또 다른 뭔가를 찾는 눈치다.

◇단맛 강한 개량종 사용 = 농사라는 게 의지만 있다고 될 일은 아니다. 자연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겨울 시금치는 이른 아침에는 작업하지 않는다. 이때는 땅이 얼어있기 때문이다. 서리가 사라지고 땅이 녹는 오전 11시 가까이 돼서야 작업한다. 시금치는 겨울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당도를 높인다. 낮에 햇빛에서 얻은 영양분을 밤에 당으로 만든다. 너무 추우면 땅이 얼고, 너무 따듯하면 단맛이 덜 들기에 적당한 일교차가 있어야 한다. 눈 내리는 날도 거의 없어야 한다. 여기에 바닷바람도 중요하다. 해풍을 받은 시금치는 길게 자라지 않고 뿌리를 중심으로 옆으로 퍼진다. 오히려 그래서 뿌리·줄기·잎에 양분이 골고루 퍼진다.

남해 시금치는 비닐하우스 아닌 전부 노지에서 재배한 것이다. /박일호 기자

남해는 이러한 조건이 맞아떨어진다. 남해와 더불어 시금치 주산지인 경북 포항, 전남 신안은 모두 바다를 끼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통영·고성·거제에서도 많이 하는 추세다. 하지만 남해 사람들은 "바다 인근이라고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니고, 공해 덜한 곳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둔다.

시금치 단 묶음 작업 중인 할머니. /박일호 기자

남해 시금치는 특히 단맛을 더한다. 이는 품종이 큰 몫을 한다. 시금치 품종은 200가지도 넘는다. 오늘날 밥상에 오르는 시금치는 모두 개량종이라고 보면 된다. 재래종은 단맛이 강하지만 성장이 떨어진다. 지금은 개량종에 밀려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남해에서 재배하는 시금치는 재래종과 유사한 품종이다. 여기 사람들은 '사계절종'이라 부른다. 품종 자체가 단맛이 강하다. 1980년대 재미를 본 포항은 '무스탕'이라는 서양계 시금치를 주로 한다. 일명 '물시금치'로 불린다. 쉽게 물러지기에 단으로 묶지 않고 그냥 포개서 상품화한다. 빨리 크고 색깔·모양이 좋지만 당은 떨어진다. 포항에서 나는 것은 주로 서울 쪽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대전을 기준으로 위쪽 사람들은 모양·때깔로 먹고, 그 아래 사람들은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1990년대는 전남 신안,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남해 시금치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포항·신안에서도 사계절종을 많이 심는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가격 좋아 '금치' = 남해에는 시금치 집하장이 곳곳에 있다. 서너 마을당 집하장 한 개 꼴로 있다. 10월부터 3월 중순까지는 토요일 빼고 매일 경매가 이뤄진다.

지난해에는 시금치 재미를 톡톡히 봤다. 주산지인 신안군에 눈이 많이 내려, 남해가 상대적으로 그 덕을 봤다. 10kg에 6만 4000원까지 하기도 했으니 '金치'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다른 농작물과 달리 영농비가 적게 들어 순이익은 매출액의 80% 이상 된다고 한다.

올해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남해군 이동면 한 마을에서 방송이 흘러나온다. "시금치 물량을 조절 좀 해 주세요. 소비처는 한정돼 있는데, 현재 너무 많이 출하해 시세가 엄청 떨어져 있습니다."

설천농협 집하장에서는 토요일 빼고는 매일 경매가 열린다. /박일호 기자

12월 중순 현재 가격이 8000~1만 원에서 왔다갔다한다. 지난해의 6분의 1도 안 될 만큼 떨어졌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큰 태풍이 없어 시금치가 많이 쏟아져 나온다. 풍작이 달갑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제 파종·수확 때 기계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래도 호미로 씨름하는 아낙들 모습은 여전하다. 한 사람이 하루에 많게는 70kg까지 캔다고 한다. 쭈그리고 앉아 하는 일이다 보니 무릎 관절로 고생하는 이가 많다. 사람을 쓰려면 일당 5만 원은 생각해야 한다. 올해는 시세가 좋지 않아 그럴 엄두를 못 낸다. 그냥 가족이 달라붙어 할 수밖에 없다.

남해 시금치는 시장보다는 대형마트 쪽에 주로 납품되는데, 이곳 사람들은 '판로 다양화'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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