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을 살아도 종교적 영성으로 살고픈 사람

10월 4일 오후 2시. 하동군 화개면 의신 마을에 있는 반달곰빌리지체험관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전남 순천에서, 거제에서, 창원에서 남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자연치유관광포럼 경남지부가 6개월 한 학기 총 2학기 교육과정으로 마련한 ‘지리산자연치유학교’가 개강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께 의신 마을에 도착한 나는 앞서 10월 2일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해서 취재하고 싶었지만, 개강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문찬인(60) 학교장과 도통 말 한마디를 붙이기 어려웠다. 참가하기로 한 사람들이 언제 도착하는지 점검하고, 서울에서 오기로 한 강사들은 또 어떻게 됐는지 점검해가면서 행사장과 숙소를 돌면서 미진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이틀 전에 만나 인터뷰를 한 것이 백번 잘한 일이었다.

그에 앞서 2일 점심시간에 하동읍 재첩특화마을에 있는 한 식당에서 재첩 회무침을 앞에 두고 그를 만나 3시간 가까이 인터뷰했다.

그를 만나기 전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연세대를 졸업했고 고시 공부를 하다가 7급 공무원으로 공직 시작, 창원시에서 기획통으로 알려져, 아내의 병을 고치고자 창원시에서 한창 잘 나가다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하동군으로 자원해서 전입, 동양학에 조예가 깊고 공무원 사이에서 도인으로 불리며 이제는 명예퇴직해 자연인으로 돌아가 자연치유와 동양학을 전파하는데 열심이다’는 정도였다.

아내의 치병(治病)에서 접한 ‘자연치유’

/정성인 기자

그는 만 50세가 되던 해에 자청해서 하동군으로 왔다. 창원시에서 농산물도매시장관리사무소장으로 있던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하동으로 자원한 것은 아내를 위해서였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내가 유방암과 갑상선 항진증으로 무척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안식교도다.

그런 안식교에 이상구 박사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킨 자연치유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내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 자연치유에 대한 눈을 뜨게 됐다는 것. 하동은 천혜의 관광 자원이 있는데다 우리나라에서 기(氣)가 가장 잘 모여있다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를 잘 버무리면 ‘치유관광’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

“요즘은 의료관광객을 유치하고자 나라에서도 적극 나서 지원하고 있잖습니까. 하지만 하동은 의료 인프라가 안돼 의료관광을 할 처지는 안 되고, 뭐 방법이 없을까 싶었는데 아내를 보면서 ‘치유관광’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자연의 힘을 빌려 내 몸 안에서 스스로 병을 다스려나가는 ‘치유’라면 하동만 한 곳도 없겠다 싶더라는 것.

그래서 그런 계통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묻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서 관련 정보를 줄 테니 배우러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욕심이 동했죠. 하지만 서울까지 한 달에 두 번씩 가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게으른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에 출발해 서울 가 강의 듣고 바로 하동으로 오는 게 도저히 할 수 없겠더란 말이죠. 그렇다면 서울까지 배우러 갈 게 아니라 차라리 지리산에서 강좌를 개설하면 오히려 실습까지 되니 서울서 하는 것보다 훨씬 어필 할 수 있겠고 효율적이겠다, 뭐 그런 생각에서 퇴직하고 곧바로 지리산 치유학교를 개설하게 됐습니다. 일종의 중간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1년이라는 긴 호흡을 갖고 가는 겁니다. 매주 금·토 1박 2일로 해서 1년간 운영하는데 이게 탄력이 붙으면 그야말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힐링캠프도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단기간으로 운영하되 실제로 참가자들 스스로 자연치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공과는 상관없이 공무원이 된 이유

그는 고성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1살 때 부산으로 이주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정성인 기자

“그래서인지 고향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어요. 가봐야 친구도 없고 일가들도 다 도시로 나가 사니 썩 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몸과 정신이 지쳤을 때 고향 고성군이 아니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하동군을 쉽게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은 서울에서 연세대 독어독문학과를 다녔다. 당시야 어디 대학을 전공 보고 진학할 때이던가. “부인께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문 교장은 독문학을 전공했으니 집에 가면 문화적 감수성이 넘쳐 흐르겠습니다”고 물었더니 손사래다.

“문화적 감수성은 모르겠고, 종교적 감수성은 넘쳐 흘러요. 하하. 아내는 종교적 신심이 아주 독실합니다. 성경이고 신학적 견해고 간에 웬만한 목사보다도 훨씬 깊이 있는 해석을 해내곤 하니까요.”

그의 아내는 본채 안방에 온갖 종교(기독교) 관련 서적을 쌓아두고 있고, 그는 아래채에 불상을 모셔두고 있다니 어지간한 가정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독문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역사나 동양학 같은데 관심이 많았고 스스로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 무렵 유학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에도 독일로 간다거나 독문학을 계속 공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그는 대학 다닐 때 모르몬교에 흠뻑 취해 있었다.

“모르몬교는 제사, 장로, 대장로로 이어지는 계급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나는 제사에까지 올랐습니다. 장로만 남았는데 교단에서 브리검 영 대학에 유학을 시켜준다는 겁니다. 물론, 유학 마치고 나면 5년간 모르몬교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조건이 붙었죠.”

그에게 찾아온 큰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유학이라는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습니다. 위에 형님이 한 분 계시지만 6·25 때 지체와 정신이 모두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사실상 내가 장남이었죠. 아무리 공부가 좋다 해도 투병 중인 아버지를 두고 내 욕심 차려 유학을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공무원 공부였다. 그의 아버지도 공무원으로 고향 마을 면장을 지냈기에 공무원으로 나가는 데 거부감은 없었다고.

“공직에 대한 인식도 있고 해서 공무원을 선택했지만, 그때 유학 갔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졌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옥천사에서 이른바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대학 나와서 공무원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죠. 하지만 병 든 아버지를 모시고자 고시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3년을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7급인데, 당시 직제로는 4급이었죠.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정성인 기자

그렇게 그의 공무원 이력은 시작됐다.

마침내 종교적 깨달음을 경험하다

모르몬교에서 주선해준 유학을 못 가게 되면서 모르몬교와 인연도 정리돼 갔다.

“유학을 못 가게 된 사정도 있었고, 뭔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공무원이 됐고요. 당시 3생이라고 하죠, 전생과 현생, 내생에 대해 매우 궁금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속 시원히 얘기해줄 수 있는 게 필요했는데 한 한국 전통 종교에서 그런 걸 얘기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가게 됐습니다.”

요즘도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들의 특징은 대개 ‘복이 많다 → 하지만 한 가지 막혀서 잘 안 풀린다 → 막힌 걸 뚫으려면 조상님께 제를 지내야 한다 → 제는 내가 지낸다 → 일단 집으로 가자 → 너는 돈을 준비해라’로 이어진다.

“조상에 제사 지내야 한대서 제사도 지내고 그리하면서 본부 교단에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때 당시 천사, 선무, 선사, 선감 식으로 계급이 가는데 선무를 받았어요. 교인 명단을 주는데 40명쯤 됐어요.”

이 종교가 독특한 다단계 구조였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교세가 급격히 확산한 배경도 이런 다단계 구조가 톡톡히 구실을 했다는 설명이다.

“40명을 관리하는데, 기독교로 치면 십일조에 해당해요. 치성금이라고 했는데, 형편에 따라 매달 치성금을 내면 받아서 60%를 내가 먹고 40%를 나를 관리하는 천사에게 상납하는 형식이었지요. 이렇게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하다 보니 ‘이게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기 치는 거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자각을 하기까지 그도 당시 돈으로 2000여만 원을 교단에 바쳤다.

“사람을 어떻게 꼬드기느냐면 ‘지금 본부 교단에 뭘 해야 하는데 선감 님 꿈에 문 형제가 나타났대요. 아무래도 문 형제가 그걸 좀 거들어야 할 모양이다’ 하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거기 들어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당한 압력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안 하면 무슨 해가 있을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 탈퇴했습니다.”

/정성인 기자

하지만 그 교단은 집요했다. 하동군으로 옮기고 나서도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오곤 했지만, 전화도 안 받고 온다고 하면 피하고 하면서 인연을 끊는 데도 매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45세쯤 됐을 때였는데 고성에 있는 문수암에 갔다.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다 해서 틈새로 엿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만세불전이라고 새로 지은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 들어가서 삼배를 올리다가 그야말로 종교적 깨달음을 경험한다.

“삼배를 올리는데, 환상이겠지만 부처님이 주장자를 들고 와서 나를 때리더라고요. 그런데 한 대만 더 맞으면 확 뭔가 하여튼 트일 것 같은데 그 한 대를 때려주지 않더군요. ‘아 한 대만 한 대만’ 이렇게 입안으로 발악했는데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함께 갔던 일행이 그가 나오지 않자 부르며 와서 보니 그는 거의 실신하다시피 하고 있었다고. 그래 일행이 그를 부축해서 나오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고 한다.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는 겁니다. 즐겁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아, 그렇게 자연도 아름답고 모든 게 즐겁고 그런 겁니다. 자란만에 섬들이 번뜩이는 것 같고 물속에는 고기들이 막 다니는 느낌도 들고 너무나 황홀한 겁니다.

그런 황홀경의 종교체험이 30여 분간 계속되었습니다.”

/정성인 기자

그런 황홀경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됐다. 정도는 좀 약해졌지만. 그래서 불교를 ‘냅다 들고 팠다’. ‘그 황홀했던 정신세계가 불교의 그것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걸 느껴보자’는 생각에서 불교 관련 책을 사서 보고 서울에 있는 불교 법사대학을 2년간 다니며 주말마다 강의 듣고 통신강의 듣고 해서 ‘법사’가 됐다. 그렇게 얻은 법명이 ‘현정(玄定)’이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의 말로는 ‘지식이 믿음을 방해한’ 것이다.

동양학에 푹 빠지다

“개인적으로 불교에 관한 책은 막 사들여 보고 나름대로 했는데 ‘지식이 믿음을 방해한다’는 말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너무 이론적으로 빠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불교의 생성과정과 철학적 기반 같은 ‘이론’을 파고들었다. 그중에는 불교와 인도철학의 관련성 같은 것도 포함됐다.

힌두교는 범세계적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지 못했고 불교는 북방과 남방이 각각 보편성을 지니게 되면서 세계적 종교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 철학이 정말 정치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불교 철학만큼 정치하지는 못하다는 것.

“특히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탐구한 유식이론 같은 것은 ‘아 어떻게 그렇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저렇게 참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도 현대의 선불교를 보면서 회의도 많이 느낀다고.

“집에 부처님을 모실 정도로 진력을 다했는데 아직도 ‘부처가 깨달은 것은 뭘까’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연기다 사성제다 하지만, 연기법이라는 뻔하잖아요. 12 연기설인데 이게 있으니 저게 있고, 저게 있으니 이것이 있다는 건데 그 진리는 부처님이 없어도 있던 진리고 부처가 있건 없건 세상의 진리라는 거죠.”

부처가 되는 길을 현대 불교가 막고 있다는 생각, 이런 것은 자비의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에 고민이 깊다. 그리해서 지난해 말 공직에서 퇴임 후 유불선을 개관해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주마간산’이라고 말했는데 인터뷰 3시간 남짓 중 2시간 가까이 동양학에 대해 유불선을 넘나들며 설파하는 게 예사 내공이 아니다.

/정성인 기자

“유교라는 게 요약하면 딱 세 마디입니다. 첫째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해서 하늘이 명한 것이 본성이라는 겁니다. 다음으로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爲)’라고 그 본래 성품을 잘 다스리는 것이 곧 도이며 마지막으로 ‘수도위지교(修道之謂敎)’로 그 도를 잘 닦아 가는 것이 곧 교라는 겁입니다. 그래서 논어도 맨 처음이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배우고 때로 익히니 그 역시 즐겁지 아니한가)’ 아닙니까.”

퇴계의 경 사상부터 남경의 경과 의,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도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이다.

하지만 이런 동양학에 대해서도 그는 회의하고 있다.

“세계 4대 종교라고 하는 것 중 세상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뿐입니다. 유교나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지요.”

유교나 불교는 세상이 어떻게 생성됐건 간에 세상이 운영되는 원리,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만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음양학’에 심취해있다. ‘음양학’이야말로 동양사상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해준다는 것.

그는 지금까지, 식견이 들고부터 한순간도 어떤 종교적 영성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그 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기본적으로 어떤 것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얘기했다. ‘지적 호기심’에 지나치게 충만했다는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불교나 음양학을 떠난다면 다음 정착지는 이슬람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내는 섭섭해할 수도 있겠네요. 안방에 그렇게 쌓여있는 기독교 관련 책은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데 느닷없이 이슬람교라고 하면 말입니다.”

/정성인 기자

인터뷰 중 식당 주인이 뭐 부족한 것 없는지 물어보러 들어왔다. 문 교장은 그를 보고 “재첩 육수에 메밀국수를 넣고 배를 갈아 넣어 양념하는 레시피를 개발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재첩이고 메밀이고 배고 모두 하동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메밀은 그렇다 하고 재첩이나 배는 하동 특산물이니 이를 잘 조합해서 지역의 특색 먹거리로 만들어보라는 아이디어였는데, 그는 공무원 퇴직 뒤에도 하동을 걱정하고 하동이 먹고 살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배달 옛 역사>라는 책을 써서 지인들에게 1000여 권을 나눠주기도 했다는데, 앞으로 ‘초보가 알려주는 동양학 이야기’라는 주제로 책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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