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왕조 여덟 성을 섬기다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충성스럽지 않는 신하는 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풍도(馮道)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 지나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몇 가지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풍도를 평가한 말이다. 중국 역사상 왕조교체가 가장 빈번했던 오대(五代)시대를 살았던 풍도는 아직도 이런저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동양 명교(名敎)사회가 가장 꺼리는 철새 행보를 밥 먹듯이 한 까닭이다.

당나라 말에 태어난 그는 출사이후 다섯 왕조, 여덟 성, 열한 명의 황제를 잇달아 섬겼다. 그래서 고래로 절개와 염치를 이야기할 때 ‘반면교사’로 첫 손꼽히는 인물이다. 특히 연신 반란이 일어나고 황제가 뒤바뀌는 마당에도 태연히 새 왕조를 받아들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직무에 몰두한지라, 성리학 전통이 강한 곳에서는 다들 그를 상종 못 할 ‘금수’로 여겼다. 사마광의 논평은 그 대표적인 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이런 행보는 먼저 오대라는 혼란기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설명 가능하다. 줄지어 새 왕조를 개창한 군부 실력자들은 통치명분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덕망을 지닌 인물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자였던 풍도는 이런 점에서 적임자였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 성품을 지닌 데다, 높은 지위를 빌미로 자신을 과시하고 사욕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솔선해서 천자 교체극을 연출하면서도, 신흥왕조들이 백성을 핍박하는 것을 담대하게 저지하고 거란 군대가 벌이는 대학살을 멈추게 했다. 풍도는 자신이 유학자임에도 절개를 잃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전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한데, 자신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믿었다.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맹자의 말처럼 풍도는 그 두 가지를 잘 분별할 줄 알았다. 풍도가 비록 50년 동안 수많은 왕조를 거쳤지만 백성들이 끝끝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백성을 어루만지려 노력한 덕분이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李卓吾)가 <장서(藏書)>에서 풍도를 두둔한 말이다. 후인들은 그래서“풍도는 양지만을 찾아다니는 요즘 해바라기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품격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사실 무인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마당에 문인들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난세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할 일을 찾을 뿐이었다. 풍도는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다 유학으로 단련된 그는 타고난 낙천가였다. 살벌한 전란기에 그가 남긴 일화를 보자.

<귀전록(歸田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풍도와 화응이 함께 앉았는데, 화응이 풍도에게 “공의 신발은 새것인데, 얼마나 주고 사셨소?”하고 물었다. 풍도는 왼발을 들며 “9백 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화응은 말단 관리에게 “그런데 내 신발은 어째서 1천8백 문이나 들었는가?”하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러자 풍도는 오른발을 들어 “이쪽도 9백 문”이라고 말했다.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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