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열여섯 살 소년기적을캐내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유일한 16살 소년은 한산도 굴 양식장에서 학교 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만 봤다. 소년은 마냥 부러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다짐했다. 저 친구들보다 먼저 사회생활에 성공하리라고.

통영시 동호동 굴수하식수협 포구에서 출발한 배는 40여 분이 지나 굴 수확현장에 도착했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굴 세척기 뒤에서 34년 전 바다를 보며 성공을 다짐했던 소년을 만났다. 김진열(50) 씨. 그는 고향인 한산도 앞바다에서 굴을 키우며 그의 꿈도 완성해 가고 있었다. "배 타고 오신다고 고생하셨죠. 여기 떠 있는 하얀 부표가 저의 전부입니다."

바다 위에 빼곡하게 떠 있는 부표 밑에서는 그의 삶과 함께 해온 굴이 자라고 있었다.

"굴 채취에 들어가면 짬이 없어요. 배 위 작업 마치고 굴 박신 공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죠."

한산도 앞바다에서 따온 굴을 손질하는 공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굴 데기 벗기는 공장도 제철을 맞이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굴 경매부터 다녀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곧 경매할 시간이라 조합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를 인터뷰하고자 5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주앉았다. 그는 하루 일과를 시작한 지 꼬박 11시간 만에 앉아본다고 했다. "굴과의 인연이요. 허허, 친구들이 중학교 간다고 할 때 저는 바닷가 굴 공장으로 갔으니 오래된 인연이네요."

씁쓸한 웃음으로 시작된 인터뷰. 굴과 함께 한 삶이 그에겐 짐이었을까?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한산도에서 그의 아버지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 일을 했다.

그의 유일한 학창시절인 초등학교 때의 기억도 거의 없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소풍과 수학여행은 사치였다. 학교 가는 것보다 집안 일이 먼저였다. 11살 때부터 그는 형과 함께 아버지 나룻배 일을 도왔다. 세상의 모든 가난은 자기 집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집도 논도 밭도 없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단칸 오두막에 어머니와 4형제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청각 장애가 있던 형을 대신해서 그가 가장이 된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입니다. 공부는 꿈도 못 꾸었죠. 16살 때 굴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아마 첫 월급으로 2만 원을 받았죠."

소년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굴 일을 택했다. 가족을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닷가에서 굴을 따며 교복 입은 친구들을 보았다. 소년은 빨리 돈을 벌어서 집을 일으키겠다고 늘 바다에 다짐했다.

"공장에서 인정을 빨리 받았어요. 취직한 지 2년, 18살에 굴 공장 주임이 되었죠. 일도 일이지만 믿음이 중요하지요. 그 당시 공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성실, 약속, 신뢰, 믿음이 아직도 제가 사업하며 지키는 덕목입니다."

   

요즘 굴 작업은 기계가 힘든 일을 대신하지만 그가 일하던 80년대 굴 공장은 전부 사람의 힘에 의존했다. 고단하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며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가난과 무지를 위로받는 안식처였다. 그런 그를 하늘은 버리지 않았다.

20살 되던 해 교회에서 풍금을 치던 여성과 백 년을 약속한 것이다.

"가난과 무지를 벗어나려고 결혼을 빨리했어요. 혼자 있으면 책임감이 없잖아요. 가정을 빨리 가져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업 대신 사회생활을 택했던 그에게 또 하나의 삶의 목적이 생긴 것이다.

젊은 부부는 같은 목표를 향해 억척같이 일했다. 부인 덕에 주변에서는 '복 많은 김진열' 씨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바다가 그 부러움을 시기했을까?

"바다일 하며 아픔도 있죠. 25년 전 아들 녀석 한 명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소홀했죠."

4살 된 아들을 먼저 보낸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을 원망하겠습니까. 전부 제 탓이죠. 바다를 어떻게 원망합니까? 그래도 바다가 삶 전부인데…."

▲ 크레인을 이용해 굴망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김진열 씨.▼ 그물망에 굴을 가득 담기 위해 굴을 고르게 펴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

그가 16살에서 50세가 될 때까지 굴 키우는 일에서 단 3일 떠나 본 적이 있다. 굴 키우는 기술보다 배 몰고 고기 잡는 기술이 더 낫다고 판단한 어머니의 권유로 기선권현망 배에 올라탄 것이다.

"딱 3일 했어요. 이건 아니라고 판단했죠. 굴 양식은 돈 버는 대로 바다에 한 줄 한 줄씩 늘려 가면 되는데 기선 어업은 목돈이 들어간다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배에서 내려 한산도로 돌아왔죠."

한산도로 돌아온 그는 27살에 성실, 약속, 신뢰, 믿음을 바탕으로 소규모 굴 양식장을 창업했다.

"동생들에게는 절대로 가빠천(긴 비옷)과 장화를 신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거죠. 관공서에 갈 때마다 한자와 영어를 몰라 한탄했던 내 처지를 동생들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죠."

지독한 가난과 무지도 그의 성실함과 고집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산도 공장을 통영 동암마을로 확장해서 옮긴 지 7년째인 올해도 그는 굴 풍년을 기대한다.

16살, 2만 원 월급쟁이 섬 소년은 연 매출 수억 원의 굴 수산공장 CEO로 변신 중이다.

5시간을 기다리고 2시간 남짓한 인터뷰를 마치며 그의 눈은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입이 백 개, 천 개라도 다 말 못해요. 아내를 만나지 못 했다면 여기까지는 못 왔을 겁니다."

그는 모든 성공 원인을 아내 문신선 씨에게 돌리며 바삐 일터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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