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트리오나 색소폰(혹은 트럼펫) 쿼텟 등 전통적인 악기편성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때때로 틀을 깨는 파격적인 구성에서 신선한 감흥을 느끼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접했던 피아노 색소폰 이중주나, 기타 세 대가 리드 악기로 등장하는 트리오 기타 등이 그러했다. 라이브 공연 도중 종종 벌어지는 피아노 드럼 이중주나 다른 조합들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과문한 탓인지 트럼펫과 기타, 드럼으로 이뤄진 3인조는 들어본 바 없다.

처음 접한 트럼펫 기타 드럼 트리오

올 초 우연한 기회에 2012년도 앨범 <Quiver>를 만났다. 라인업은 트럼펫에 론 마일즈(Ron Miles), 기타에 빌 프리셀(Bill Frisell), 드럼에 브라이언 블레이드(Brian Blade)다. 앨범 표지를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베이스가 빠진 빈 공간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 트럼펫과 드럼 톤이야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냐만, 기타가 빌 프리셀이니만큼 3인조 사운드가 예사롭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론 마일스.

아니나 다를까? 이 앨범은 재즈가 지닌 넓이와 힘을 다시 한 번 내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어눌한 듯 맑은 기타, 베이스 기타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드럼, 그 위를 절묘하게 누비는 트럼펫까지. “어떻게 된 게 이놈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토록 독창적이야?” 가슴 한구석에서 시기와 불만이 가득 솟아올랐다.

흔히 재즈가 재즈답게 되려면 재즈라고 부를 수 있는 ‘질감’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재즈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그 영역을 무한대로 넓히고 있는 지금 스윙이나, 흑인, 아프리칸 리듬과 같은 단어만으로 재즈를 설명한다는 건 무리다. 용광로 같은 흡입력을 지닌 재즈를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분모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장르 간 구분조차 모호해지는 이 시대에 무엇이 재즈고 무엇이 재즈가 아닌지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론 마일스.

케니G는 재즈가 아니다

그 공통분모가 바로 톤(Tone), 즉 질감이다. 이 이론(?)에 입각해 살펴보자. 케니G 음악은 과연 재즈일까? 평론가들은 재즈가 아니라며, 그 이유에 대해 “음색이나 연주가 재즈적인 질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비슷하게 팝적 요소가 많은 마들렌 페이루(Madeleine Peyloux)는 어떨까? 올갠이 돋보이는 고풍스런 백 밴드 반주에 맞춰 어쿠스틱 기타로 흡사 시를 읽듯 노래하는 그녀에게선 독특한 질감이 느껴진다. 빌리 홀리데이를 닮은 목소리 때문에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목소리를 포함한 전체적인 사운드는 분명 그녀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재즈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떤 연주가 ‘재즈 질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재즈어법을 따라야 한다. 드러머 빌리 하트(Billy Hart)는 이를 간결하게 표현한다. “기술적으로 두 박자와 세 박자를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건, 재즈팬들이 좋아하는 질감을 확실하게 연출하는 방법이다.” 그는 재즈연주자라면 어떤 특별한 질감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그 첫 번째 전제로 재즈어법에 충실할 것을 주문한다.

재즈어법에 충실하되 독창성 갖춰야

특별한 질감이 특별함을 획득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독창성’이다. 앞에서 말한 론 마일스 트리오는 ‘예전엔 미처 몰랐던 새 경지’다. 세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새 조합이 이토록 환상적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 참신함에 기쁨을 토하면서 ‘아! 재즈란 이렇게 확장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키스 자렛(Keith Jarrett) 트리오는 30년 넘게 같은 멤버로 활동 중이다. 히트곡을 양산하는 팝 음악이 아닌 이상, 이 정도 수명이라면 마니아를 제외하곤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전설로 추앙받는 빌리 홀리데이도 한결같은 스타일 때문에 40세를 넘기자 대중들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이 트리오는 건재하다. 아니 해를 거듭할수록 윤기를 더한다. 이유가 뭘까? 피아노 트리오가 지닌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도, 그들만이 지닌 매력을 끊임없이 구현해온 덕분이다. 그 매력이란 바로 ‘익숙함 위에 창출한 새로움’, 즉 특별한 질감이다.

가령 그들이 주특기로 내세우는 스탠더드곡들은 청자(聽者)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익숙한 리듬과 멜로디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은 연주를 거부한다. 보는 이에 따라 ‘뭐 늘 똑같구먼!’ 할 사람도 있겠으나, 그건 재즈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세 사람이 창조하는 사운드, 그리고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인터플레이는 숨넘어가는 긴장과 이완을 선사한다.

시인이 풍우를 각별하게 느끼듯

질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중심이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옮겨졌다. 세계음악이긴 한데 그래도 재즈는 미국산 제품인데, 어째 그 흐름이 갈수록 동양정신을 닮아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느 나라에서건 시인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그들이 느끼는 ‘그 시대(時代) 풍우(風雨)’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이를 통해 사물과 사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다. 재즈가 특별한 질감을 갖고, 미국을 넘어 세계와 호흡하고, 드디어 사람들 가슴속에 안착한 데에는 재즈인들이 느끼는 ‘이 시대 풍우’가 범인들보다 훨씬 더 각별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풍우라는 말보다는 ‘가락’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겠다. 그들이 각별하게 느낀 ‘이 시대 가락’이야말로 풍우까지 집어삼킨 덩어리 일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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