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신문이 언론정도 지키고 살아남는 방법은?

양산시민신문 김명관(48) 대표. 익히 그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백지에서부터 양산시민신문을 건실한 풀뿌리 언론으로 일군 사람이다. 하지만 김명관 대표 그 자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인이 된 신문사 대표

김명관 대표는 최근 시인이 됐다. 신문사 사장으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지역 토호들처럼 문예지 몇 백 권 사 주는 조건으로 등단한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문학저널> 6월호에 3편의 시를 당선시킨 것이다.

-시인이 되셨는데, 원래부터 시를 좋아하시고 자주 쓰셨나요?

“저도 그렇고 제 처도 그렇고, 굉장히 독서를 좋아합니다. 신문에 난 어지간한 책들은 다 사 봅니다. 시도 어릴 때부터 줄곧 써 왔고, 한번은 어디 시골 같은 곳에서 딱 1년 동안 외부소식 끊고 ‘시집 한 권만 쓰자’고 마음먹은 적도 있습니다.”

김명관 양산시민신문 대표./임종금 기자

-도대체 시인은 어떻게 해야 될 수 있습니까? 저도 시를 써 보려다가 안 돼서 접었는데….

“시인은 자연을 보는 통찰력, 사람을 보는 통찰력이 일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에 빠져 화려한 수사만 나열해서는 진정한 시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공감을 줘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와는 동 떨어진 얘기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인터뷰 시작할 때부터 그의 아이폰은 쉴새없이 윙윙거렸다. 도대체 무슨 메시지가 저렇게 많이 들어오나 싶었다.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제가 아침이면 시를 지인들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내줍니다. 그날의 분위기나 느낌에 맞는 시를 골라서 보내드립니다. 때때로 제 자작시를 보내드리기도 하죠. 지금 제가 보내드리는 분들이 대략 950명 정도 됩니다. 많은 분들이 답을 보내주십니다.”

매일 그 날에 맞는 시 한 편씩을 선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물리적으로 엄청난 독서량이 깔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독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지금 집에 책이 한 5000여 권 있습니다. 시집만 900권입니다. 책 때문에 집을 꾸밀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개인의 집에 책이 5000권 꽂혀 있는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책으로 즐비한 김명관 대표의 집 거실.

양산시민신문 어떻게 창간했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양산시민신문 창간 이전에 김 대표님 행적을 찾아보려고 해도 거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고향은 산청이라고 들었는데, 양산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1991년에 결혼을 하면서 왔습니다.”

-그럼 신문사 경영 이전에는 뭘 하시고 사셨습니까?

“사업을 했습니다. 신문사 경영 직전까지 유학사업을 했었습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사업도 해봤습니다.”

-사업가를 하시다가 양산시민신문을 창간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이게 이야기가 깁니다만,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1년에 제가 노사모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2002년 대선을 치르고 대선 당일 저녁 양산 노사모를 해체하고 ‘양동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있다가 2003년 2월 초순입니다. 김두관 전 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김 지사가 그러는 겁니다. ‘김명관 대표는 요즘 뭐 합니까?’, ‘저야 유학사업 하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지사가 ‘지역신문 해 보면 어때요? 이제 앞으로 지방분권이 굉장히 활성화 될 건데, 올곧은 지역신문의 역할이 크게 필요하다. 남해신문, 옥천신문, 진주신문 등을 소개해 줄 테니 공부해보면 어떻겠나’고 합니다.”

-그 말이 공감이 되시던가요?

“솔직히 시민단체를 해 보니까 언론의 도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또 언론을 하게 되면 굉장히 많은 아젠다를 이끌고 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신문사를 창간하기로 하고 남해신문, 옥천신문, 지역언론의 대가인 장호순 교수를 찾아다니면서 지역신문에 대해 배운다.

김명관 양산시민신문 대표./임종금 기자

“저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제가 신문공부 할 때 스승들이 모두 정도(正道)만 가는 분들을 만난 겁니다. 당시 저는 완전히 백지상태였습니다. 만약 그 분들이 꼼수를 가르쳐줬더라면 꼼수로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정도만 가르쳐주셔서 그것만 머릿속에 익혔습니다. 그분들이 가르쳐 준 정도 덕분에 양산시민신문을 이만큼 이끌어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부를 마친 다음 2003년 6월 창간준비호를 내고 같은 해 8월 23일, 시민주주 방식으로 양산시민신문을 창간했다.

풀뿌리 신문이 살아남는 법

-당시 양산에도 지역신문이 있었습니까?

“네, 양산신문이라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초창기에 안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신문을 시작하면서부터 일부러 관공서 광고를 안 받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성공을 확신하는 분들은 드물었습니다. ‘얼마나 가나 보자’ 이런 시선이었습니다. 그러니 광고도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해 12월이 되자 통장에 자본금이 바닥났습니다. 당시에 매달 600만 원이 들어가야 하는데 돈이 어딨습니까? 제 집을 팔아서 경비를 대곤 했습니다.”

-그럼 돌파구를 어디서 마련하신 겁니까?

“지역신문들의 실패사례를 모두 모았습니다. 해당 지역에서는 실패했을지라도 양산에서는 어찌될지 모르는 거죠. 또 실패사례를 보면서 왜 실패했는지 분석해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돌파구로 삼은 것은 학교 교지 사업이었다. 거의 모든 학교에는 신문이나 교지가 있는데, 교지 편집과 출판을 신문사가 수주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다른 신문사들이 실패한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교지 제작을 할 때 철저히 ‘을’의 위치에 서야 하는데 신문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 측에서 ‘이건 좀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줘야 하는데, 신문사는 ‘그냥 넘어갑시다’고 하고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신문사가 힘이 세다는 거죠. 그러니 다음부터는 신문사에 수주를 안 주는 겁니다. 저희는 철저히 을의 입장에서 교지 제작 사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군분투 하다 보니 창간 1년이 지났다. 창간 1년이 지나면서 주변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광고도 들어오기 시작하고, 신문도 봐주기 시작했다. 학교 교지 제작도 입소문이 퍼져 양산지역을 석권하고 창원지역 학교 교지도 제작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문화공연 팜플렛, 출판 사업에 진출해 성과를 거뒀다. 요즘엔 무엇으로 수익을 내고 있을까?

“최근에는 면지(해당 면 지역 역사와 정보를 총괄한 책), 상공회의소 책자, 양산시우수기업제품안내 등 지역신문에서 기존에 안 했던 것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스토리텔링 사업과도 연결하는 겁니다.”

스토리텔링 사업이라. 요즘 하도 남발되는 단어라서 무슨 내용인지 감이 안 왔다. 김 대표는 최근 만든 하북면지를 시범으로 보였다. 각 마을마다 QR코드가 박혀 있었다. 아이폰으로 찍자 양산시민신문에서 만든 해당마을 모바일 홈페이지가 열렸다. 면지에서는 다 설명하지 못했던 마을에 대한 각종 정보와 함께 이장의 인사 동영상도 함께 있었다. 이를 또 학교 ‘우리 마을 알기 수업’과 연결시킨다고 했다. 이런 방식을 양산 지역 문화재, 양산 지역 기업에도 적용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수익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양산 지역 모든 정보가 양산시민신문에 집중되고 있었다.

QR코드가 박힌 하북면지 모습./임종금 기자

언론은 정책을 바꿀 수 있어야

하지만 이렇게 수익을 창출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바로 ‘펜이 약해지는 현상’이다. 또 양산시민신문은 상공회의소가 입주한 건물에 있으며, 주변에 금융기관이 즐비한 양산의 핵심지에 자리잡고 있다. 비판기사를 쓰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우리 신문은 자본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기자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나는 사업 할 테니, 기자는 기사 쓰는 데에만 신경 써라. 저희 신문은 편집권이 철저히 분리 돼 있습니다. 신문에 비판기사는 무조건 나갑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불만이 쌓이겠죠. 이를 달래는 건 기자가 아니라 신문사 사장인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악의적으로 한 게 아니다. 애정이 있으니 비판하는 것이다. 계속 설득하는 겁니다. 또 기사의 일관성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왔다갔다하면 신뢰를 잃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지금은 비판기사가 나와도 이해해주는 분위깁니다. 다른 언론이 비판기사를 썼다면 모르겠는데, 양산시민신문이 했다면 이해한다는 겁니다.”

   

하긴, 편집국 뿐만 아니라 대표이사실에도 일부러 보란 듯이 ‘직원윤리강령’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김 대표는 “우리 신문은 명절에 아예 선물이 안 들어옵니다. 오히려 제가 선물을 사서 돌립니다.”

-제가 듣기로 양산시민신문의 기획취재가 많은 편이라 들었습니다. 취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기획취재를 많이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잘못된 것은 고발하고, 거기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정책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입안자를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동의를 해 줘야 정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론과 권력의 유착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기획기사를 많이 씁니다. 올레길 기획기사를 내보내니 시청 기획실에서 연락이 오는 겁니다. 자료 다 달라고. 그래서 지금의 양산 올레길이 탄생한 겁니다. 평생학습도시 사업도 일본과 싱가포르까지 기자를 보내 취재를 했습니다. 생태하천도시 할 때도 역시 기자를 해외에 보내 기획취재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언론사가 정책결정 과정에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화는 도시의 살을 채우는 것”

양산시민신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문화와 연관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김 대표는 양산좋은아버지합창단장을 맡고 있으며, 양산시민신문은 직속으로 ‘러브엔젤스 중창단(단장 이성덕)’을 운영중이다. 문화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산업이 도시의 뼈대라면, 거기에 살을 입히는 것은 문화예술과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문이 창간할 때 양산의 문화는 정말 척박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분들을 양산에 모셔 오도록 많이 공을 기울였습니다. 또 문화와 예술 쪽은 정말 애정을 가지고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하자. 전국 최초로 어린이 심포니에타라고 해서 현악단을 만들었습니다. 지휘자 선생님 급여도 당연히 드리고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하우를 살려서 러브엔젤스 중창단을 만든 겁니다.”

양산시민신문 창간 8주년 행사 당시 김명관 대표.

지역신문에서 만든 중창단. 성과가 얼마나 있을까?

“도 단위는 기본이고, 전국단위의 수상도 자주 했습니다. 주로 창작동요제에서 상을 많이 받습니다. 한 번은 유엔참사관이 연락이 와서 유엔에서 공연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삯만 1억이 넘어 포기했습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납니다.”

그는 앞으로도 문화에 열정을 쏟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문예지를 하나 복간할 예정입니다. ‘주변인과 시’라는 문예지인데, 정말 뛰어난 분들이 많았습니다. 4년 만에 제가 복간하는 겁니다. 이미 출판 등록까지 마쳤습니다. 올 겨울호부터 나올 건데 좋은 작품과 작가들이 많습니다. 또 러브엔젤스 중창단은 세계적인 어린이 합창단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끝으로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지 물어봤다.

“양산시민신문으로 인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에게 늘 미안합니다. 그 분들이 우리 신문의 진정성을 알아줄 때까지 노력해서 언젠가 양산시민신문이 전국 최고의 지역신문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언론의 정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올곧게 살면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은 증명하고 싶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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