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기 척박해도 산양삼 재배 최적지 … 전국 최초 '생산이력제' 자부심

인삼은 사람 손길 가까운 곳에서 인위적으로 생육환경을 맞춰 기른다. 인공재배 개념이다. 산양삼은 '산에서 기르는 산삼'이라 하지만, 자연에 맡겨두는 쪽이다. 산삼 씨를 뿌린 이후에는 들짐승이 넘보지 못하도록 하고, 낙엽을 덮어주며 잡초를 제거한다. 사람 손길이 들어가는 건 그 정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산양삼이 잘 자랄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함양 산양삼'에는 자연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호흡해야 하는 이곳 사람들 삶이 녹아있다.

산이 품고 또 품은 고장

남쪽 지리산(1915m), 북쪽 남덕유산(1507m)·금원산(1353m)·기백산(1331m), 서쪽 백운산(1279m)·삼봉산(1187m)…. 함양에는 1000m 넘는 산만 15개다.

   

전체 면적 가운데 농지로 쓸 수 있는 땅은 15%도 채 되지 않는다. 쌀·보리·감자·배추·마늘·양파 같은 것을 재배한다지만 다른 고장에 비해 넉넉하게 내놓지 못한다. 살림살이도 풍요로울 리 없다. 그렇다고 둘러싼 산을 원망할 노릇만은 아니다. 그 덕을 본 것도 있다.

이곳 자연은 척박한 땅을 안긴 대신 약초와 나물을 내놓았다. 함양 사람들은 약초를 생활 깊숙이 가져왔다. 산에 나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습관적으로 약초를 키웠다. 민간요법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병원이 들어서는 것을 크게 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약초가 이곳 사람들 삶을 풍성하게 하지는 못했다. 부족한 땅에서 논·밭 일구는 것도 여전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가장 함양다운 것'을 생각했다. 그것이 산삼, 즉 산양삼이었다.

오늘날 함양 사람들은 산양삼 이야기를 하면서 엮는 것이 있다. 진시황 명을 받아 불로초를 찾으러 다니던 신하가 이곳 삼봉산에서 산삼을 구해갔다는 이야기다.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 경계인 이곳 깃대봉(1015m)에서 산삼이 가장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함양 땅은 산양삼이 필요로 하는 물·바람·볕·부엽토 같은 조건을 충족한다. 가물어도 땅을 파보면 땅이 적당히 젖어 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든 바람이 잘 통한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볕도 내놓는다. 30년 이상 된 나무가 듬성듬성 자리해 좋은 부엽토를 선사한다.

군은 산양삼을 특산물로 키우기 위해 2003년 재배 농가 지원에 나섰다. 10년간 250억 원을 들여 450여 재배농가를 육성했다. 5∼7년을 필요로 하는 산양삼이 이제 본격적인 결실 채비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300억 원 가까운 소득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지난 2006년에는 전국 최초로 '산양삼 생산이력제'를 시행했다. 함양 사람들이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다.

"산삼은 귀하고 비싸서 속여 파는 이가 많잖아. 사는 사람도 늘 미심쩍을 수밖에 없고…. 그런데 함양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 산양삼 하는 농가가 생산이력제에 모두 참여해 하나하나 기록을 남기니, 누구 하나 장난칠 수가 없지."

삼국시대 중국에 내놓은 산삼

옛 문헌을 보면 중국 <급취장(기원전 48~33년)>에 '삼(蔘)'이 처음 등장한다. 우리나라 것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명의별록(451년)>에 '백제가 양나라에 인삼을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신라도 중국에 인삼을 바치거나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한국산 인삼'을 지칭하는 '고려인삼'은 중국에서 우리나라 것을 구분해 부른 것이 유래라 한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나는 것을 '고려삼'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신라·백제까지 포함한 삼국에서 나는 삼까지 두루 말할 때 '고려삼'이라 했다. 당시 삼국 가운데 고구려 위세가 가장 강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덧붙는다. 고려삼은 이후 '고려인삼'이란 이름으로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인삼과 같은 인공재배가 시작된 것은 조선 시대 1500∼1600년대로 전해진다. 백성들이 산삼을 나라에 바쳐야 할 양은 정해져 있으니 그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듯하다. 이를 견디다 못한 누군가가 꾀를 내 산삼 씨를 산에 심은 것이다. 그것이 몇 년 후 효과를 보자 집 앞까지 가져와 재배한 것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후에는 중국·일본 무역품으로 활용하면서 제법 큰 돈 만진 이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사람 손 많이 탄 인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산양삼이 부쩍 이름 내밀고 있다. 산양삼은 귀에 익숙한 '장뇌삼'과 다를 것 없다. 중국산 장뇌삼이 국내에서 자연산으로 둔갑하는 일이 생기면서 그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산림청에서 새 용어를 만든 것이 곧 산양삼이다.

서양에서는 1700년대 프랑스인 선교사에 의해 퍼져 나갔다 한다. 선교사는 압록강·두만강 사이에서 산삼을 접하고서는 비슷한 자연환경인 캐나다 어느 지역에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인디언을 통해 마침내 발견한 것이 '북미삼' 효시가 되었다.

농사하기 척박한 이 땅은 대신 귀하디귀한 산삼을 내놓는다. /김구연 기자 sajin@

사람 모양과 비슷할수록 높이 쳐

산양삼은 캐기 전 잎·가지·열매 상태만 보고서는 몇 년 산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뿌리를 통해 가늠하는 것이 몇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뇌두 개수다.

줄기가 붙었던 자리인 뇌두는 1년에 한 개씩 붙는다. 그런데 중국 같은 곳에서는 뇌두로 장난을 치기도 한단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뇌두를 잘라 화학약품으로 다른 것에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평생 삼을 본 이들도 속을 정도라고 한다. 이것 아니더라도 산양삼은 생육환경이 맞지 않으면 성장을 멈추기에 뇌두 개수만으로 몇 년 산인지를 온전히 구분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산양삼은 생김새가 사람 모양새와 비슷할수록 좋다. 또한 몸통을 감고 있는 가락지가 많고 깊은 것을 높이 쳐준다. 잔뿌리가 많고 만졌을 때 까칠한 것도 기준이 된다 한다. 맛을 봤을 때는 향이 진하고 단단한 것이 좀 더 나은 것이라 보면 되겠다.

중국에서 들어온 것은 한국산에 기준을 맞추기에 외형만 놓고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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