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보존과 향토사 발굴이 문화발전의 힘”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잔잔하기도 하고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가야만 한다.’

환갑이 되어 낸 책머리에 삶이 녹아있다. 어렵사리 풀어낸 첫 문장에 고민과 용기가 교차한다. 저자는 책을 일컬어 ‘평소 생각이나 느낌을 적었으나 남을 이해하기보다 주관적인 글이 많다’고 밝혔다. ‘90년대부터 적은 글을 한데 모으다 보니 시대상에 어긋날 수 있다’고도 했다. 수줍게 건넨 인사지만 부끄러움에 뒤로 숨는 일은 없었다. 몇 장 넘기고서 본 궤도에 오른 이야기는 이내 힘이 실렸다.

지난 10일 마산문화원에서 만난 임영주(62) 마산문화원장은 ‘책머리’와 똑 닮았다. 조심스러운 첫 대면이 끝나자 당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쉴 틈 없이 이야기가 쏟아졌다. 생각해보면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임영주 원장은 합천 황매산 자락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미 오래전 마산으로 와 터를 잡았지만 지금도 틈틈이 합천을 찾는다. 묘목을 심고 텃밭도 일구며 ‘주말농장 가꾸기’에 흥미를 붙였다. 이 날도 그는 합천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 원장./김구연 기자

“농사일 좀 보고 오는 길입니다. 얼굴이 많이 탔지요? 오른쪽 눈 밑에는 깔다구한테 물렸습니다.”

흔히 떠올리기 쉬운 ‘문화원장님’과는 사뭇 달랐다. 온화한 모습이야 차치하더라도 학구파 느낌을 찾기 어려웠다. 목소리는 컸고 성격은 털털해 보였다.

“깔다구때문에 눈이 많이 부었지요. 사진은 왼쪽에서 찍어주세요. 그럼,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되나요? 일단….”

예상밖 이력, 국내 1호 국가기능장

태어난 곳은 ‘촌’이지만 일찍이 그는 도시로 나왔다. ‘장남은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그 시대 통용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선구자였던 아버지 역할이 컸다. 농사뿐만 아니라 목수일과 기계를 다루는 일에도 능숙했던 아버지는 자녀들을 일찍 도시로 내 보냈다. 그 덕에 임영주 원장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진주농림고등전문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장래를 생각하여 기술을 배워나갔고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키워나갔다. 결국 부산조선공사 연수원에서 기술교육을 받기에 이르렀다.

“젊었을 적에 ‘기술 익히기’에 매진했어요. 당시에는 공업기술이 핵심이었죠. 지금도 문화원장이 용접할 줄 안다고 하면 다들 놀라요. 거짓말하는 줄 알죠. 부산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용접 1급 기능사 자격증을 획득했어요. 그리고 마산으로 건너와 수출자유지역내에 있는 군함 만드는 회사에 취업하였습니다. 1973년이었죠."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에는 기술학원 강사도 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직장 4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외국계 건설회사로 이직했고 중동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슈퍼바이저로 투입됐다.

“당시 한국의 직장과 비교하면 외국계 기업의 해외현장 취업은 월급이 열 배 정도 차이 났어요. 게다가 선진 기술을 익힐 기회도 많았죠. 그렇다고 또 거기에 만족할 수는 없었어요.”

임영주 마산문화원 원장./김구연 기자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1981년 귀국하면서 현 두산중공업 전신인 현대양행으로 또 한 번 직장을 옮겼다. 더불어 창원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 7대학 창원캠퍼스)에 입학했다.

그는 항상 ‘재능이 없더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의지는 늘 행동으로 이어가며 도전을 즐겼다. 새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부러워할 만한 삶을 만들었으나 안주하지 않았다.

1983년 그는 기능대학 졸업과 동시에 다니던 회사에서 과감하게 나왔다. 다행히 타고난 건강한 신체도 힘을 보탰다.

“잘 다니던 회사를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많이 고민했죠. 아까운 점이 많았지만 미련 없이 버렸어요. 그래야 한 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남은 것도 있었다. 졸업 전 그는 ‘국가기능장’ 자격을 취득한 것이다. 그것도 국내 1호였다. 그는 그것을 살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껏 배운 기술과 현장 경험을 잘 살린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 길로 학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중공업체에서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터라 별 무리가 없었다. 이윽고 ‘경남기술학원’을 개원했다. 사무실은 마산 산호동에 두고 실습장은 마산 양덕동에 뒀다. 한평생을 함께 한 ‘학원’은 그렇게 시작됐다.

임영주 마산문화원 원장./김구연 기자

기술학원원장에서 문화원장으로

겁 없이 뛰어든 사업이었지만 승승장구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70여 명의 수강생을 데리고 강의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임영주 원장은 기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학원총연합회 경상남도지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창설 멤버로 나서기도 했다.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조직 기반을 다진 이후에는 경남초대회장에도 올랐다. 정치권에 몸담아 다양한 직책을 맡아도 봤다.

오늘날 그의 약력에 붙는 ‘창원기능대학총동창회장’, ‘마산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장’, ‘경남학원안전공제회설립초대이사장’, ‘마산교육행정자문위원장’ 대한논리속독연구학회이사장 등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기술학원을 10년간 이끌었다. 물론 사이사이 ‘경남용접고압가스’, ‘환경 품질학원’ 등으로 가르침의 변화를 주기도 했지만 늘 공업기술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90년대 들어서 공업기술 인기가 시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몇 년 지나서 모든 기술학원이 하나 둘 죽어 나갔죠. 변화가 필요했어요.”

그동안 쌓아온 업적이 하루아침에 날아갈 판이었다. 그렇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은 뻔한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는 전공을 버리기로 했다.

   

“완전히 바꿨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그를 살리기로 했죠. 마침 고등학교 때 속독을 배운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때 배운 걸 응용해서 당시에 맞게 재개발했죠. ‘논리정속독’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보통 사람보다 두 배에서 세 배 가까이 빨리 보는 독서법을 만들어냈어요.”

그렇게 기술학원은 독서·속독‧논술학원으로 탈바꿈했다. 다행히 학부모들 반응이 좋았다. 게다가 ‘독서 방법론’을 앞세워 방송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탄 덕에 몇 개의 체인학원도 개설할 수 있었다. 임영주 원장은 자체 교재를 만들고 관련특허를 7개나 내는 등 의욕적으로 새 사업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끝도 있었다. 정부의 교육제도, 환경 변화 등으로 얼마 전 마지막 남은 학원을 정리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규모를 축소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꽃샘추위’라는 수필을 써 정리했다.

‘꽃샘추위는 결코 꽃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피는 것을 잠시 쉬게 한다.’

열성을 다한 세월은 잠시 쉼표를 찍었다. 그렇지만 그사이 자란 다른 새싹이 꽃을 피우고 있다.

“한국학원총연합회 경상남도지회장이었던 94년에 마산문화원장님이 문화원 이사 자리를 권했어요. 당시 음악‧미술‧서예 등 예술분야 학원이 많았는데 그들과 쉽게 어울렸던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늘 ‘투잡인생’이었기에 딱히 어려울 건 없었죠. 그렇게 이사를 거쳐 부원장을 8년 동안 맡았어요. 그리하여 지난 2004년에는 경선으로 당선되어 제8대 마산문화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도 잇따랐다. 수필 전문지 ‘수필과 비평’에 작품 ‘제비꽃’이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게 된 것이다. 국내 1호 국가기능장이 수필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학창시절에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혈기가 왕성할 때 정치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없으며 만년이 되면 자아실현을 해 나간다 했어요. 그 말이 딱 맞아떨어졌죠. 새로운 길이었어요.”

용접을 익히고 가르쳤던 기능장은 이제 문학을 가까이하고 문화를 알리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원장으로 연임해 마산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올바른 지역 역사관 세우기 위해

“마산에서 순수하게 바다를 상징하는 무형문화재는 250년 전부터 이어온 성신대제가 유일합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삶을 이어온 마산 사람들에게 이런 유서 깊은 문화재가 있다는 것은 획기적이고 놀라운 일이죠. 성신대제는 그야말로 시민들이 주가 된 문화 행사였습니다.”

과거를 훑고 돌아온 자리에는 다시 마산문화원 원장이 앉아 있었다. 임영주 원장은 재임 후 세 가지 문화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성신대제’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과 ‘마산시사’ 발간, 신라시대 최고 학자라 불리는 ‘최치원 선생’의 유적을 발굴하고 문학적 업적 등을 알리는 일이 여기에 포함한다. 성과도 좋다.

먼저 성신대제는 바다를 이웃해 삶을 꾸려왔던 마산 사람들이 별신에게 제를 지내 삶의 평안과 풍요를 빌고서 벌인 대동축전을 말한다. 임영주 원장은 이 축전이 지닌 가치를 알아보고 2006년부터 조사·발굴에 매진했다. 그리하여 2010년에는 첫 보존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 이후 미흡한 점을 보완하며 매년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등재도 추진할 예정이다.

지난 2011년에 낸 마산시사도 의미가 남다르다. 발간 시점만 봐도 그간의 고통이 묻어나온다. 마산시사는 2010년 7월 마산이 창원, 진해와 통합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나왔다. 마산시사를 발간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2008년이었지만 2009년에 시작해 2년이 넘는 시간을 매달린 까닭이다. 마산 지역의 모든 것을 생생히 증언하는 책자로 길이 남을 것을 생각하고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자 온갖 정성을 쏟았다.

“통합창원시가 출범한 시점에서 마산의 마지막을 정리한 책입니다. 물론 박순천, 이은상 등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지만 마산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봅니다.”

최치원 선생과 관련한 사업도 한창 진행 중이다. 마산 문학의 뿌리가 될 수 있는 최치원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지난해에는 설화집을 발간했고, 올해는 학술 발표회와 기타 자료집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이 외에도 그는 마산문화원에서 꾸준히 이어온 문화학교 운영, 마산휘호대회, 전통민속놀이 보존, 문화 탐방행사, 부설 국제노인이다대학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1980년부터 이어오는 일본 미노미 공민관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민간외교관 역할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다.

임영주 마산문화원 원장./김구연 기자

“어른과 청소년들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에 모든 세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또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편향된 문화 흐름도 아쉽습니다. 마산만 해도 내서 지역이 다르고 구산면, 진전면이 또 다릅니다. 우리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죠.”

그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부족한 역사성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교육 체계는 문제가 있다 봐요. 국사를 모르다 보니 가까운 우리 지역 역사도 모르게 되죠. 어른들 역할도 중요하다 생각해요. 교육 체계를 개편하고, 그에 힘을 보태는 데 어른들이 늘어난다면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우리 마산문화원 역시 지역사 강의를 열고, 다채로운 행사를 이어가는 등 아낌없이 지원해야죠."

이에 그는 그 중심을 ‘전통문화 보존과 향토사 발굴’에 뒀다. 궁극적으로는 문화 사업이라 할지라도 마산 지역의 전통문화 보존과 향토사를 일깨우고 알리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야만 균형 발전이 있고 올바른 통합 효과가 나타나리라 본 것이다.

그의 패기만큼 마산문화원도 ‘젊다’

임영주 원장은 카메라를 늘 곁에 둔다. 1976년 사진 동아리 활동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일이 단순한 취미 이상이 되었다. 그간 그의 손을 거쳐 간 카메라도 200여 종이 넘는다. 한 때는 사진작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미련은 없다. 제 뜻을 다 펴지 못했더라도 그저 자유롭게 여행하고 소중한 추억을 카메라에 담는 일 자체가 행복임을 알았다.

“한평생 이어온 학원도 인생도 이제 마무리 단계가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성실히 수필을 써가며 문화원에서 그간 활동했던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남기고 싶기도 해요. 사진을 가까이 둔 것도 참 행운이죠. 기록을 남겼고 또 남길 수 있으니까요.”

2012년 그는 60갑자가 돌아오는 갑년을 맞았었다. 그리고 스스로 뜻 깊은 일 하나를 했다.

그동안 지역 언론사, 대학신문 각종 잡지 등 사회생활 틈틈이 기고한 글을 모아 송곡(松谷) 임영주 산문집 ‘소나무는 흙을 탓하지 않는다’를 내놓은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실었지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저희 집에 가면 사람 인(人) 다섯 자와 말씀 어(語) 다섯 자가 크게 쓰여 있습니다. 가훈인 셈이죠. 속살은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뜻입니다. 말도 마찬가지고요. 지금껏 살아온 길도 앞으로 펼쳐나갈 길도 다 이 안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꽃샘추위는 모두 지나갔다. 다시 꽃이 피려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 이젠 ‘푸름’이 찾아왔다.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해졌다지만 그가 남긴 말이나 써 나갈 글, 마산문화원의 발걸음은 여전히 패기만만하다. 그가, 마산문화원이 여전히 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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