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간판만 봐도 오랜 친구 만난 듯 반가워요”

“추억이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름답게 포장되기 마련이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땐 사실 이렇게 말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았거든요.” 서울에서 살면서도 떠나온 고향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의 가족일 수도,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다.

무척이나 뜨거운 날씨가 ‘이미 여름이 왔다’는 느낌을 전한 6월의 어느 날 만난 한국지방세연구원 공경희(38) 홍보팀장은 도심에서 피어나는 열기보다 더 열정적인 삶을 이야기했다. 그가 전하는 말 속에는 경남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결하면서도 정리하기 편했다. 기사를 정리하는 중 대화에서 남긴 그의 답변 한 줄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경남·부산지역에서 성장하셨죠?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요?

“네, 중·고등학교시절은 그렇게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어요. 조금 소심하고 내성적인편이라 얌전히 학교생활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주변 친구들은 어떻게 기억할진 모르겠지만요. (웃음) 대학시절부터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평소 하고 싶던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대학 4년 동안 몇 편의 연극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날 정도랍니다. 무대에서 나를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남들 앞에 나서는데도 점점 익숙해졌어요.

공경희 한국지방세연구원 홍보팀장


학창시절 특별한 추억이 있나요?

“특별한 추억이라면 연극 연습하느라 학과수업도 빼먹고 늘 동아리방 구석에서 대본연습하거나, 텅 빈 무대 핀 조명 아래에 혼자 연극 동작 연습들을 했던 기억들이죠. 한번은 추운 겨울 해운대 해변에 모래를 쌓아 가설무대를 만들고 친구들과 그곳에서 즉석공연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저희들을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들조차도 충분히 즐기고 싶었을 만큼 그땐 연극에 미쳐있었죠. 그때 저흰 미쳐야만 비로소 미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시험 기간이면 선배들 족보에 의지해서 얼렁뚱땅 넘어가고 밀린 리포트는 친구들 숙제 여기저기 동냥해서 짜깁기하여 내곤했죠.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학창시절조차도 제겐 너무 소중하게 남아있어요. 정말 그 시절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잖아요. 지금 만약 저에게 ‘그런 무대를 줄 테니 다시 미쳐보겠냐’고 묻는다고 해서 선뜻 나설 수 없을 것 같아요. 공연수익이 얼마일지 먼저 계산부터 하게 되고 대신 내가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하는지 이해득실부터 따질 테니까요.”

연극에 쏟은 열정을 통해 무엇을 배웠나요? 요즘 대학생들에게 남길 말이 있나요?

“학과 성적보다 연극을 향한 열정이 더 소중했고 한 달 아르바이트 월급보다 무대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더 고귀하다고 믿었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아요. 덕분에 자신을 새로이 일깨울 수 있었고 지금의 홍보 업무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적극성도 몸소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요즘 대학생들이 너무 취업에 매달려 대학생활을 공부나 스펙으로만 채워가고 있는 게 참 안타까워요. 좀 식상할 진 몰라도 대학시절만큼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런 것들이 A+성적표나 높은 토익점수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는 못해도 그보다 더 소중한 인생의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방송작가와 리포터 생활은 어땠나요? 당시 에피소드가 있으면 몇 가지 말씀해주세요.

“우연히 리포터 활동을 하게 됐는데… 시골마을 찾아다니면서 어르신들 만나면서 같이 농손 일도 돕고 들녘에서 새참도 먹고 그런 프로그램들이요. (웃음) 그런 건 싹싹해야 되잖아요? 어르신들이랑 막걸리 한 사발도 시원하게 들이키고 그래야하는데… 제가 성격이 그렇게 넉살이 좋지 못해서 참 어렵더라고요. (웃음) 게다가 그때 회사에 말을 안 했지만 사실 임신 5개월이었거든요. 회사에선 그런지 꿈에도 몰랐었죠. 그래서 결국 출산 때까지 몰래 일을 했어요. 심지어 만삭 때 배를 타고 어부들이랑 고기를 잡으러 가고요. 10킬로가 넘는 그물을 끌어당기면서 같이 일을 하고 그랬어요. 당시 방송을 보시고 ‘위험한 일을 했다’고 어머니께 무척이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나요. (웃음)”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신 건 아닌가요?

“물론 (당시) 같이 일했던 스텝들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출산을 하면서 리포터도 그만뒀었죠. 이후에 방송작가를 시작했어요. 전공이 국문학과라서 오히려 작가가 나에게 더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방송작가는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니더라고요. 말을 써야 하는 거죠. 글이나 말이나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하늘과 땅 차이더라고요. 차라리 글을 쓰라고 하면 어떻게든 지어내겠지만 말을 글로 옮기는 데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더라고요. 게다가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이 라디오 생방송 Daily 시사프로그램이었어요. 시사도 낯설었지만 매일 2시간짜리 라디오 생방송 원고를 쓴다는 것은 정말 전쟁이었죠.”

공경희 한국지방세연구원 홍보팀장

방송작가를 할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나요?

“고작 방송 10분 전인데도 오프닝 원고가 떠오르지 않아서 스튜디오 안에서 MC들이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어요. 오프닝 원고는 대부분 제일 마지막에 쓰거든요. 하루 방송내용을 압축해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원고 정리가 끝나야 오프닝 원고를 쓸 수 있었어요. 또 어떤 때는 방송 원고를 다 썼는데 갑자기 정전이 돼서 원고가 다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어요. 시청자 라디오 전화 연결을 했는데 시청자가 생각지도 않은 비방용 멘트를 하는 바람에 스텝들이 초긴장상태가 돼 버린 적도 있었죠.

생방송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죠. 약 4년 동안 매일 라디오 생방송을 했는데 덕분에 신경성 위염, 과민성대장증상 등 갖가지 질병을 얻었죠. (웃음) 한번은 서울에서 게스트를 어렵게 섭외해서 모셨는데 그날따라 스텝들 준비를 못했던 거예요. 제가 스텝들에게 녹화 일정을 전달하지 못했던 거죠. 스튜디오도 전혀 준비되지 못했고 카메라 감독들도 스탠바이 안 돼 있고 그냥 원고만 써서 손님을 모셔온 셈이었던 거죠. 그 이후는 생각하기도 싫어요. (웃음)

하지만 누구나 생각하듯 방송국은 참 매력적인 곳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또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남들에게 선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수렴해서 전달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도 지니면서 또 그 여론을 이끌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경남도에도 근무하셨지요? 서울로 온 배경은요?

“경남도청 공보관실에 약 1년 4개월 정도 근무를 했어요. 제 인생에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해고 간절하게 노력해서 제 힘으로 직장을 얻은 곳은 경남도청이 처음이었어요. 재미있긴 했지만 방송국의 불안정한 생활에 점점 지쳐 있었죠. 도청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조직생활을 제대로 배우고 공무원 간의 동료애도 조금씩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경남도청에서는 좀 더 근무를 하고 싶었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3년 가까이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었던 데다 마침 지금 근무를 하고 있는 한국지방세연구원의 홍보담당자로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때 한국지방세연구원은 개원을 위해서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개원하기 위해서는 홍보담당자가 급하게 필요해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도청직원들과 정도 많이 쌓였고 무엇보다 조금씩 직장생활을 배워가고 있었던 저로서는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갈등을 했어요. 가족생활을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렵게 얻는 공무원생활을 포기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제 서울 생활을 한지 약 2년이 지났습니다. 아직은 길가다가 ‘경남’이라는 간판만 봐도 오랜 친구 만난 듯 반갑고 흥분하면 경상도 사투리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그런데도 가끔 창원에 오면 친구들은 벌써 ‘서울깍쟁이’ 다 됐다고 해요. 그런데 제게 경남은 친정과도 같은 곳이죠. (웃음)”

공경희 한국지방세연구원 홍보팀장


지방세연구원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한국지방세연구원은 지난 2011년 안전행정부가 주관하고 244개 지자체가 출연하여 설립한 기관입니다. 지방세와 지방재정, 나아가 지역발전을 위한 지방자치, 분권을 연구하는 곳이죠. 우리나라의 지방세는 국세대비 2대 8의 구조로 이른바 ‘2할 자치’에 머물고 있어요. 하지만 세출면에서는 6대 4의 구조지요. 한마디로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많은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해마다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는 점차 낮아져요. 심지어 자체수입만으로는 공무원 월급조차 줄 수 없는 곳이 있을 정도지요.

우리 연구원은 이렇게 갈수록 열악해지는 지방재정을 확충하고 지방세제를 개편하기 위해 전문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어요. 저는 새로 설립한 연구원인 만큼 우선 우리 연구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홍보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더불어 연구원의 설립목적인 지방세제 개편과 지방재정 확충을 위한 연구 활동을 널리 알림으로써 우리 연구원의 연구 성과가 지역발전을 위해 실질적인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사업을 추진하고 있답니다.”

좋아하는 분야나 취미 또는 특기가 있으세요?

“직장맘들에게 취미는 사치죠. 늘 일상에 쫓겨 다니느라 딱히 취미생활을 즐길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요. 골프를 좋아하긴 하지만 주말에 가끔 남편과 즐기는 정도이고 평소에는 시간이 있으면 가급적 저를 위해 쓰기보다 가족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해요. 직장생활로 인해서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소홀할 때가 많거든요. 남들처럼 비 오는 날이면 교문 앞에서 우산도 챙겨주고 싶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집에서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려주고 싶기도 하지만 늘 마음뿐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특기가 요리가 됐어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먹을거리며 간식 만들기가 취미이자 특기죠. 특별한 맛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애들이랑 함께 만들면서 평소 엄마로서 부족했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워나가려고 노력해요. 그럼 아이들도 직장 생활로 바쁜 엄마를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그리고 부디 나중에는 이런 엄마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도 더욱 충실해야겠죠. (웃음)”

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걱정 없이 사는 편이죠. 걱정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늘 잘 될 거라고 믿는 편이죠.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현재를 즐기려고 해요. 이런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웬만큼 어려운 일도 꿋꿋이 버티는 편이죠. 예전에 남편과 약 3년간 주말부부를 할 때에도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했었어요. 지금 돌이키면 힘들었던 것 같은데 막상 그땐 그게 힘든지도 몰랐어요. 그냥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또 너무 낙천적이다 보니 오히려 삶의 긴장이 없어요. 매사에 마냥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버릇해서인지 발전이 없는 것 같아요. 불만이 있으면 그로 인해 개선의지가 생기고 또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될 텐데… 항상 현재에 만족하며 살다 보니 늘 그 자리 그대로인 것만 같아요.

좀 더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겠어요. 1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봤을 때 지금 이대로라면 하루하루 사는 의미가 뭐겠어요? 적어도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려고 늘 노력해야겠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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