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 별미 '소금 절인 잎'으로 사계절 인기, 이산 저산 망개나무 천지인 의령

의령 망개떡에는 몇 가지 유래가 있다. '가야시대 이바지 음식' '임진왜란 의병 음식'이었다는 게 우선 입에 오른다. 하지만 근거는 없다. 망개떡에 이 지역 역사를 녹여보려는 의령 사람들 노력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정확히는 일제강점기에 지금과 유사한 형태가 등장한 것이 그 시작점이라 보면 되겠다.

의령 관문에서는 '곽재우 동상'이 바깥사람들을 맞이한다. 이를 시작으로 의병 숨결은 이 지역 곳곳을 채운다. 마찬가지로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인 망개떡에도 의병 이야기가 배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각 고을 장정들이 가세하면서 애초 10여 명이던 의병은 2000명으로 불어났다 한다. 싸움을 하는 데서 무기만큼 중요한 것은 병사들 음식이겠다. 의병들은 주로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고 한다. 이를 전해주는 것은 아낙들 몫이었다. 산골짜기 여기저기 헤쳐가며 전달해야 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더운 날이면 넉넉할 리 없는 밥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망개잎이었다고 한다. 망개잎은 방부제 역할을 하는데, 그 당시 여인들은 그 사실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인들은 산 깊숙한 곳에서 큰 망개잎을 구해다 주먹밥을 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곽재우 장군 부인이 밥 아닌 떡을 망개잎에 싸서 의병들 입을 달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그냥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 이곳 사람들도 '설화'라는 전제를 단다. 그냥 넉넉한 상상력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는 눈치다.

좀 더 시간을 앞당겨 '가야 이바지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 역시 구전이지만, 흥미롭기는 하다. 백제 어느 귀족이 사냥에 나섰다가 길을 잃어 가야 땅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말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맬 즈음 산삼 캐는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남자 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훗날 백제로 돌아온 귀족은 그 여인에게 혼인을 청했고, 그 딸은 잎에 싼 망개떡을 혼인 음식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 '백산 안희제' 선생은 의령 부림면 출신이다. 안희제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바깥을 떠돌다 이따금 집에 들렀다고 한다. 다시 떠날 때는 항상 떡을 한 보따리씩 들고 갔다고 한다. 그 종류가 30가지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망개떡도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잎으로 감싼 것들이었다. 그때는 망개잎뿐만 아니라 뽕잎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안희제 선생은 여러 떡 가운데 특히 망개떡을 좋아했다고 한다. 맛은 둘째치고, 하얗고 고운 그 모양새가 '백의민족'을 떠올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선생 일가에서는 이 떡을 즐겨 빚었다고 한다. 지금 부림면에서 망개떡을 내놓고 있는 안희제 선생 손녀가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이때까지는 살림 넉넉한 일부 계층만 즐기던 음식이었다. 그러다 여러 사람이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1957년부터다. 집에서 해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판매가 시작된 것이다. 넉넉했던 일본 생활을 뒤로하고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온 어느 여인 손에 의해서다. 이 여인은 먹고살기 위해 이런저런 떡을 만들어 팔았는데, 망개떡도 빠지지 않았다. 망개잎은 위생에 좋고, 떡이 눌어붙지도 않을뿐더러 보기에도 훌륭했다. 이 떡은 금세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번 맛본 이들은 여인이 떡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시 찾을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이 여인은 1970년대 중반 작은 방앗간을 마련했는데, 아들·손자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망개떡은 의령 아닌 곳에서도 빚어졌다. 망개떡 장수가 골목을 누비던 기억은 많은 이가 안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망개잎은 여름 한철 사용할 수밖에 없다. 1년 365일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이다. 만드는 이, 파는 이가 망개떡으로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기간은 1년 가운데 고작 몇 달 정도다. 그 기간 아닌 때는 또 다른 생업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손 놓는 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의령에서는 망개잎을 소금에 절여 보관하는 방식으로 1년 내내 만들었다. 그 덕에 이제 '망개떡' 앞에 '의령'이 붙지 않으면 섭섭할 노릇이 됐다.

'의령 망개떡'이 전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길어야 10년 전 정도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지인들은 옛 기억으로만 떠올리던 이 귀한 떡을 의령 땅에서 접할 수 있으니 반가울 만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조금씩 입으로 퍼지면서 의령 특산물로 자리 잡게 됐다.

   

'의령 망개떡'은 이 지역에 망개나무가 많았기에 가능했다. 망개나무는 경상도 지역에서 쓰는 말이다. 표준어는 청미래덩굴이다. 함양·산청과 전라도 지역에서는 '맹감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백합과 덩굴성 낙엽관목인 망개나무는 자생환경이 까다롭다.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 일본·중국 등 전 세계 일부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다. 의령 땅은 기온이 적당히 서늘하고, 남강·낙동강이 흐르는 덕에 망개나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땅히 편안한 땅'이라는 이 고장명을 떠올릴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300년 된 '보은 속리산 망개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고 있다.

그 옛날 사람들은 떡을 오랜 기간 먹기 위해 술을 섞어 발효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방부제 역할을 하는 망개잎은 그런 번거로움을 덜게 했다. 한때는 망개잎뿐만 아니라 감잎·뽕잎도 종종 이용했다고 한다.

방부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살균 효과가 있다는 의미겠다. 동의보감에는 '청미래덩굴은 오랜 양매창(성병)을 치료하며 독을 풀고, 풍을 없애고, 심히 허약한 증상을 보한다'고 되어 있다.

망개잎은 보기에도 곱다. 하트 모양, 혹은 사과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잎'이라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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