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기후 덕에 이모작 가능,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사람들 억척스러움 한몫

마늘이 남해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이곳 사람들은 "사람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였을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한다.

남해는 1970년대 중반까지 재래종을 키웠다. 하지만 생산성이 크게 없었다. 스스로 먹을 양념용이었지, 내다 팔 정도는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농촌진흥청이 나서 중국 상해에서 새로운 종을 들여왔다. 오늘날 남해에서 재배하는 난지형 남도마늘이다. 시험기가 끝난 1983년에 남해군에도 널리 보급됐다. 중국 상해와 기후가 비슷하고, 토질도 맞았다. 기존 재래종은 밭에서만 할 수 있었지만, 남도마늘은 논에서도 가능했다. 소득 작물로 본격적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남해 사람들은 억척스럽다.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다. '가천 다랑이'가 잘 말해준다. 45도 기울어진 가파른 곳에 108계단·680개 논밭이 자리하고 있다. 너른 들판을 가질 수 없었던 섬사람들이 빚은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이다. 그 억척스러움은 마늘과 연결된다. 얼마 되지 않는 땅에서 벼농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은 넉넉한 땅은 내놓지 않았지만, 온화한 기후는 선사했다. 이모작이 가능했다. 벼 수확한 겨울 땅에 보리·밀 같은 것을 심었다. 1980년대 들어 남도마늘이 들어오자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소득이 되겠다 싶었다. 보리·밀 대신 마늘 씨를 뿌렸다. 그렇게 사람·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 오늘날 남해 마늘이다.

마늘농사는 잔손 갈 일이 많다. 그래서 여인네들 일 몫도 많았다. 하루 내내 마늘과 씨름하다 해질 무렵 흙 묻힌 채 돌아와 저녁밥상을 차렸다. 살림살이 아닌 마늘 농사일로 옆집 며느리와 비교당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파종·수확 철에는 가족 모두 달라붙어야 했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고사리손도 훌륭한 보탬이 됐다. 남해 여인들은 어릴 적부터 이 고된 경험을 했다. '마늘 농사 싫어 외지로 시집가려 했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설령 바깥으로 시집간다 하더라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은 마늘종 뽑을 즈음이다. 어른들께 인사만 드리고 올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팔을 걷어붙였다. 20일 후 수확 철이 되면 또 한 번 일손 보태러 오기도 했다.

남해 마늘은 지난 2007년 지리적표시제에 등록했다. 지리적 환경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다. 군에서는 '해풍을 먹고 자란 마늘'을 강조한다. 바닷바람에 실린 나트륨이 양분 이동을 돕고, 맛·때깔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해풍이 공기를 맑게 해주는 덕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래도 육지보다는 해안가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파도에 반사된 햇빛이 마늘에 골고루 전해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흑마늘'이 입에 자주 오른다. 흑마늘은 적정 습도·높은 온도에서 1~2주간 숙성한 것이다. 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열을 받은 당·아미노산이 검은색 물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유 냄새는 사라지고,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생마늘 성분 그대로를 더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흑마늘은 2000년대 중반 일본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이를 본 재주 좋은 남해 사람들이 전국 최초로 상품화한 것이다. 흑마늘은 간식 삼아 먹을 수 있는 기호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를 진액으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흑마늘을 잘 아는 이들은 "진액으로 먹으면 그 성분이 10%가량밖에 남지 않는다"고 귀띔한다.

5월 중순부터 6월 초가 되면 남해는 마늘 수확으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이때가 되면 이곳 여인네들은 손놀릴 틈이 없다. 늦어도 6월 중순까지는 끝내야 벼농사를 시작할 수 있다. /남해군

마늘 역사를 들춰보면 '힘을 솟게 하는 음식'으로 연결된다.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피라미드에 마늘 흔적이 존재한다. 동원된 노예들에게 나눠 준 마늘양이 벽면에 기록돼 있다. 일꾼들은 마늘을 먹고서 40도 넘는 더위와 고된 작업을 근근이 견뎌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마라톤 선수들이 마늘을 먹으며 뛰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늘을 나눠줘 군사들 힘을 끌어올렸다고도 한다. '약용'에 대한 기록도 오래전으로 거슬러 간다. 기원전 1150년, 심장병·두통·상처 등에 활용한 처방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험함'을 담고 있다. 단군 신화에서 곰을 사람으로 바꾸는 신통한 능력을 마늘에 부여했다. 예로부터 마늘은 잡귀 쫓는 데 사용했다. 독한 맛과 강한 냄새가 이러한 의미를 담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악귀 쫓는 것에 대한 믿음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유럽 신화에는 마늘로 마녀·흡혈귀를 물리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마늘을 날로 먹으면 분노가 커지고,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여 금기시하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은 재배 마늘은 기원전 150년경 중국 한나라 때부터라 전해진다. 이후 인도 대륙, 지중해를 거쳐 16세기경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졌다. 재배마늘이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을 근거로 통일신라가 당나라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추측한다. 이때는 일부 귀족이 약용으로 사용한 정도였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도 빻아서 몸에 바르기도 했다지만, 이 또한 널리 이용한 것은 아니다. 서민들도 쉽게 접한 것은 결국 밥상 위에 오르는 용도가 되면서부터다. 그 시기는 양념김치가 널리 퍼진 약 100여 년 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마늘도 천대받았다. 일제 눈에 단군신화가 얽힌 마늘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마늘 먹은 이에게는 냄새를 이유로 멸시했다고 한다.

마늘은 백합과 식물로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다. 그 종류는 크게 난지형과 한지형으로 나뉜다. 말 그대로 난지형은 남해·제주·전남 해남과 같이 따듯한 곳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마늘종이 긴 편이다. 한지형은 경북 의성·충남 서산과 같이 내륙 중부지방에 적응된 종으로 뿌리 내림이나 싹트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늦다.

이름에 대한 배경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몽골어 '만끼르(manggir)'에서 'gg'가 떨어져 '마닐(manir)' '마늘'로 됐다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음식 고서인 <명물가락>에서는 '맛이 매우 맵다 하여 맹랄이라 하다 마랄·마늘로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마늘 효능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옛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동의보감>은 마늘에 대해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하고 종양을 없애며 복통·냉통·급체를 다스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늘과 수명 연관성은 흥미롭다. 국내 한 대학은 '마늘 주산지와 장수지역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00명당 75세 이상 노인 비율을 따져보니 5위 남해를 비롯해 장수지역 상위권에 오른 곳 대부분은 마늘 주산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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