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도전하는 삶 '변신의 귀재'라 불리는

독일 작가 F.카프카가 쓴 ‘변신’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다. 소설은 평범한 독신 세일즈맨이 어느 날 아침 한 마리 기괴한 갈색 벌레로 변신하면서 시작한다. 놀라는 것도 잠시. 이후 지독스러울 만큼 불안한 생활을 지속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날이 갈수록 열등감과 식욕부진에 빠져든다. 결국 평범했던 한 인물은 하루아침에 죽고 만다.

소설만 보면 ‘변신’은 평범하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원흉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소설만큼은 아니더라도 현실 속 변신 시 단순히 넘기기는 어렵다. 특히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한 변신이 지닌 무게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다’, ‘인생 밑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시작한다’,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홀로 개척한다’와 같은 변신이 가져올 파장도 무궁무진하다. ‘죽느냐 사느냐’로 치부하며 ‘이 악물고 해보면 그만이지’라고 마음먹는 것도 웬만한 강단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이런 변신을 마치 습관처럼 한 사람도 있다. 게다가 소설처럼 세드엔딩이 아닌 해피엔딩을 향해 순항 중이다. 잘 가나던 공기업 부장을 그만두고 정치 도전, 박사 학위 취득, 치유요가 개척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인생의 주인공 김성원(50·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 씨를 만나러 그가 운영하는 요가원을 방문했다.

김성원 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이창언 기자

숨길 수 없는 도전정신

2006년 4월 그는 창원 중심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어깨에는 띠도 둘렀다. 까무잡잡한 얼굴 속에 하얀 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다니는 모습에 시민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예산이 없어서 선거차량 등을 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민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시민들에게 소음 등의 불편을 주는 것이 맞지 않다는 생각에서 자전거를 타고 유세를 합니다.’ 당시 창원 도의원 3선거구에서 출마한 ‘무소속 김용남(개명 하기 전 이름) 후보’가 밝힌 이유는 명료했다. ‘다리가 아프고 땀이 날지언정 작은 실천부터 하며 산다’는 소신 있는 모습에 반응도 좋았다. 유권자를 배려하는 정신이 마음에 들어 찍어주겠다는 시민도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그는 ‘유별난 레이스’를 끝내 완주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경남도는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이 강세잖아요. 그 판을 한번 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했고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 지방자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중도 사퇴했죠. 정확한 이유는 밝힐 수 없지만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외부적인 여건이 많이 작용했어요.”

사실 그는 정치나 출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창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농사를 천직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도전정신은 숨길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외식프랜차이즈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민물고기를 직접 가공하고 과일을 접목해 중탕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죠. 당시 창원 동읍에서 가물치 양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거든요. 유통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할 수 있다 보니 소비자 반응도, 수입도 좋았어요. 10년간 무려 130여 개 점을 열었을 정도니까요.”

김성원 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이창언 기자

하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1급수 어종만을 취급하는 횟집 프랜차이즈 에 도전했다. 역시 시작부터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남들이 전혀 몰랐던 시장을 개척하고, 넘보지 못했던 아이템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IMF가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다.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도전 정신만으로 시작했던 일이라 마음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죠. 여전히 젊었고 기회는 많았어요.”

결국 그는 다시 일어섰다. 창원시 16·17대 시장을 역임한 공민배 의원과의 인연으로 창원시 시설관리공단 립에 힘을 보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98년 10월부터 2004년 4월까지 창원시 시설관리공단 운영부장, 총무부장, 경리관을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새롭게 도전한 공직사회라는 환경에서 40대 초반에 이미 최고 위치까지 오른 것이다. 그야말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삶, 쉽게 도달할 수도 없는 여건.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했다.

“지역 정치 지형이 바뀐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무 일찍 올 만큼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주할 수 없었죠. 도태될 게 뻔했거든요.”

그렇게 잘 다니던 회사를 하루아침에 관뒀다. 그렇다고 당장 생계를 유지할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진해서 인생 가장 밑바닥으로 향했다.

김성원 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이창언 기자

다시 맞은 전환기

“회사를 퇴사하고 뒤를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건방져 있더라고요. 연봉도 꽤 높았고 알아주는 사람도 많았으니까요. 그걸 깨려면 철저하게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내던졌죠.”

그렇게 공기업 총무부장은 영업 사원으로 변신했다. 잠을 줄이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식당 종업원 일도 했다. 한 때 100여 개가 넘는 프랜차이즈를 거느렸었다는 과거 따윈 까마득하게 잊고 밤늦게까지 서빙하고 접시를 닦았다. 그는 이와 같은 생활을 2년 동안 지속했다. 처음에는 난리법석이었던 집에서도 서서히 그를 믿고 따라줬다.

그리고 다시 2006년. 짧은 정치 도전을 마친 그가 택한 길은 요가였다. 사람도 싫고, 세상도 싫었던 터라 조용히 지낼 방법을 찾던 중 발견한 것이다. 다행히 요가는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또 그는 시민생활체육관 관장을 역임할 당시 요가 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해 생활체육의 장으로 요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우선은 잘 하는 걸 살려보기로 했다.

“요가는 나이가 들수록 대접받는 유일한 운동이거든요. 어쩌면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였기에 그 길밖에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곧바로 요가원을 차렸죠.”

진안에코에듀센터 모습./이창언 기자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야심차게 차린 요가원 회원 수는 고작 20~30명. 3년 동안 적자를 지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요가를 새롭게 바라봤다. 단순히 요가를 건강을 좋게 하고 유연성을 높이는 데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고 인체 균형을 맞추는 데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치유요가’였다. 치유요가는 비틀어진 뼈와 관절을 바르게 맞추어, 불균형으로 발생하는 질병을 다스리는 것으로 몸의 구조를 바로잡아 본래의 기능과 순환을 회복시키는 자연치유법이다. 그는 여기에 근육을 강화하고, 심부 근육 발달을 도와 골격구조를 지지시켜주는데 효과적인 ‘필라테스’까지 도입했다. 치유요가 효과를 높이고자 요가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필라테스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수련 전에 각자 신체 상태를 정확히 체크하는 체형진단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동작도 개인별로 달리 가르쳤다. 신체가 다르고, 병이 다른 만큼 치유 방법도 응당 달라야 한다는 결론에서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전국에 이름난 요가원은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이론보다는 실기를 배우는 데 집중했고, 오로지 회원들 몸만 생각했다. 노력의 끝은 요가치유전공 자연치유학박사 국내 1호로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학위를 받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점차 소문을 탔어요. 치유요가를 경험한 사람들이 빠르지는 않지만 분명한 효과를 내기 시작했거든요. 이에 회원도 늘고, 적자도 면했죠. 또 2006년 개원 당시 상남동 있던 요가원을 용호동 롯데아파트 상가 쪽으로 확장·이전할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2년 전부터 현재 자리(창원시 용호동)로 와 정착했죠.”

현재 요가원은 총 200평 규모로 내부에 웰빙룸, 테라피룸, 샤워실과 아로마테라피 휴게실, 족욕실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전공별로 경력 5,6년 이상의 우수한 강사진이 있고, 필라테스·정통요가·치유요가·지도자 반도 운영 중이다. 그의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김성원 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이창언 기자

끝나지 않은 변신 그리고 도전

요가원을 차리고 한창 적자를 변치 못하고 있었던 2008년 돌연 그는 이름을 바꿨다. 무소속 정치인, 시민생활체육관 관장으로 익히 알려진 ‘김용남’이 아닌, 요가수련을 하며 진정한 자연인 ‘김성원’으로 살고픈 마음에서였다.

“정치적인 부분은 완전히 끝내고 싶었어요. 내 삶을 돌아보면서 다 바꾸길 원했고요.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치유요가를 하고 자연에 가까워지면서 삶은 더 풍요해졌거든요.”

자연스레 새로운 목표도 세웠었다. 바로 치유요가가 스포츠와 병원의 중간단계로 자리매김하는 것. 더불어 명상, 식이요법 등 다양한 자연치유요법을 모아 자연치유센터를 세우는 일을 간절히 꿈꿨다. 물론 실천도 뒤따랐다. 2011년에는 비영리법인인 ‘한국치유요가협회’를 설립해 치유요가와 자연치유에 관한 학술적 연구와 프로그램 개발, 치유요가와 자연치유에 관한 연구지원·자연치유단지 구축 등에 힘썼다. 또 자연치유센터 건립을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 지지를 얻고자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했던가. 지난 2012년 10월 환경부,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합심해 ‘환경성질환예방관리센터’ 중 하나를 진안군에 설립했다. 이름하여 진안에코에듀센터. 그리고 진안군은 그에게 초대 센터장 자리를 부탁했다. 환경성질환예방관리센터도, 그곳을 책임지는 센터장이라는 역할도 우리나라에서 모두 최초였다.

“그토록 바랐던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죠. 특히 자연이 아닌 것을 버리면 자연스러운 삶을 가꿀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환경성 질환을 치유하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고 예방·관리하는 법 등을 모두 다루었으니까요. 정신적인 부분까지 말이죠. 이는 제가 세웠던 치유요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어요.”

그는 또다시 변신했다. 요가원 원장, 한국치유요가협회 협회장이 아닌 진안에코에듀센터 센터장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진안에코에듀센터는 환경성 질환 중 가장 큰 피해를 내는 ‘아토피’를 다루고 있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아토피와의 전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현명한 방법과 심리적인 치유까지 감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 아토피 산업종사자들에게 필요한 전문교육과 실습도 병행하고 있다. 한편 환경교육지도사(아토피상담사)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정식 자격증도 딸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이밖에 ‘Eco오감체험놀이’를 통해 몸과 마음의 균형성장을 이루게 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갖가지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는 곳이죠. 자연 순리대로 살아가는 법을 알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환경성 질환을 예방·관리·치유할 수 있게 도와주죠. 두고 보세요. 이곳이 ‘힐링산업’을 꽃피울 시발점이자 메카가 될 겁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도대체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돈은 또 어떻게 버느냐고.’ 그럴 때마다 그는 웃으며 대답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먹고살 만합니다. 그리고 이런 게 자연스러움 아니겠습니까’라고.

그의 변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토피 돌보미 선생’과 관련한 사업을 환경부에 건의해 놓은 상태고, ‘아토피 바우처 사업’도 하반기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멘탈 테라피 시스템’을 더 발전시켜 힐링산업의 토대를 닦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힐링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자연이 아닌 것은 모두 버려야 자연이다’라는 생활신조처럼 언제든지 버리고, 다시 도전할 각오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변신을 거듭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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