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얻은 카메라 한 대, 운명을 결정 짓다

지난 3월 29일 MBC경남 7층 미디어센터에서는 선영철 국장의 퇴임식이 열렸다. 1980년 카메라 감독으로 입사한 지 34년 만이다. 그는 카메라 감독으로서는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한국방송대상 촬영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 있는 카메라 감독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다람쥐의 사투

기자는 요행히 그의 퇴임사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의 퇴임사는 독특했다. 앞부분에 잠시 소회를 적어놓고는 바로 “저의 퇴임사를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살아있을 지 죽었을지 모를 이 다람쥐 한 마리로부터 풀어볼까 합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한 마리의 다람쥐와 그 취재 경위에 대해 2쪽에 걸쳐 비교적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수상 소감문도 아니고 퇴임사에 이 얘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선영철 전 경남MBC국장./김구연 기자

“다람쥐의 사투라고 이름 붙인 이 영상은 2000년에 다람쥐가 천적인 뱀을 죽이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물론 자연에는 이변이 많아서 지리산을 자주 오른 등산객 중 비슷한 것을 목격한 분도 있을 겁니다. 당시 저는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다큐를 촬영하다가 며칠 만에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목이 말라 ‘두지 터’라는 마을 입구에 카메라 배낭을 벗어놓고 30미터 떨어진 우물에 물을 마시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뱀 한 마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고 그 앞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걸 발견한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카메라 배낭을 가지러 뛰고 있었습니다. 미친 듯이 뛰어서 카메라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다람쥐와 뱀이 서로 마주 보며 돌고 있었습니다. 다람쥐는 몸의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자기보다 열 배나 긴 뱀과 일전을 벌였습니다. 보통 다람쥐는 뱀과 마주치면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당하고 마는 그야말로 천적관계입니다. 다람쥐의 죽음을 무릅쓴 공격에 뱀이 질려서 도망을 가려고 하는데, 다람쥐가 뱀의 몸통을 누릅니다. 그리고 뱀의 중간부터 꼬리까지 마치 재봉틀이 지나가듯이 몸통을 강한 이빨로 훑어버립니다. 뱀은 이미 움직이지 않는 몸통을 이끌고 황급히 숲 속으로 도망가려 하나 이제 다람쥐가 정면을 딱 막아섭니다. 뱀의 머리를 부여잡고 또 빠르게 ‘미싱질’을 하다 뱀의 무기인 앞 이빨 2개를 뽑아 버립니다. 그렇게 다람쥐는 뱀을 죽입니다. 이후 다람쥐는 무슨 원한이나 맺힌 듯 2번이나 죽은 뱀 몸을 미싱질 했습니다.”

듣고보니 상당히 놀라운 장면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34년간 찍은 수많은 영상 가운데 굳이 이 영상을 ‘대표 영상’으로 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가 이걸 얼마나 가까이서 찍었냐면 불과 2~3미터 거리에서 찍었습니다.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겁니다. 동물마다 경계 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산에서 다람쥐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눈을 마주치거나 조금이라도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다 싶으면 바로 도망갑니다. 야생에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다람쥐 코앞에서 촬영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당시 제가 거의 무아지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장면에 한없이 집중했고, 완벽하게 촬영을 했습니다. 이걸 찍고 나니 오랫동안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비로소 이제 카메라맨이 됐다. 스스로 자부심을 품게 된 영상입니다.”

선영철 전 경남MBC국장./김구연 기자

일전에 취재해 보니 카메라 감독은 힘든 점이 많은 것 같았다. 후회가 들지는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34년간 엄청나게 행복한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일과 내가 집중했던 일을 평생 할 수 있었으니 이만큼 가치 있는 일이 어딨습니까? 정말 돈을 받지 않고서도 하라면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저는 지금도 무슨 국장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카메라맨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람쥐의 사투가 제 평생 죽어서도 기억될 만한 최고의 장면입니다.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지리산에서의 삶

그와 가장 인연이 깊은 곳을 꼽으라면 지리산이다. 그는 ‘생명의 산 지리산의 꽃’으로 최고의 영예인 한국방송대상 촬영상(2000년)과 방송위원회 선정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지리산의 약초’로 방송위원회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 상을 탔다. 따지고 보면 앞서 말한 다람쥐의 사투도 지리산에서 찍은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지리산에 푹 빠지게 됐을까?

“처음엔 지리산에 대한 좋은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중계차를 해체해서 지리산에 올라갔는데, 부품 하나를 안 들고 감 겁니다. 그때가 새벽이었는데 다시 내려가서 부품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저는 촬영을 하므로 산을 오르는 사람의 앞에서도 찍고 뒤에서도 찍고 훨씬 더 바삐 다녀야 한다.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온다고 했던 산이 지리산입니다. 그러다 ‘지리산의 약초’하면서 지리산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의 약초 하다 보니 약초도 한 포기의 풀이고, 풀 속에서 나는 꽃들이 신비해서 ‘생명의 산 지리산의 꽃’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천왕봉 나릿물이’라는 다큐도 촬영하다 보니 지리산만 10년간 드나들게 됐습니다.”

선영철 전 경남MBC국장./김구연 기자

“도대체 지리산의 매력이 뭡니까?”

“글쎄요. 저는 매력이라기 보다는 촬영을 하다 보니 온갖 신비한 곳을 많이 가게 됐습니다. 일반 등산객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등산로를 벗어나 들어가보면 산속에 이렇게 넓은 계곡이 있나 싶은 곳도 있고, 원시림 같은 곳도 있고 신비로운 곳이 사방에 있습니다. 또한 지리산은 3개 도에 걸쳐 있을 만큼 굉장히 넓은 산입니다. 제가 10년간 여러 곳을 돌다녔고,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곳도 많이 갔지만, 과연 지리산의 1%나 봤을라나? 갈 때마다 신비로운 곳입니다.”

그는 말이 나온 김에 지리산에서 만난 기인들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악력으로 잣을 깨는 사람, 눈을 그대로 뜬 채 해를 직시하는 60대 노인도 봤고, 어느 40대 아주머니는 경기도에 사시는데 신기가 굉장히 강해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에 든다는 분이셨습니다. 지리산에서 49일 단식을 해서 기를 보충해야 하는데, 47일간 하니 도저히 힘이 들어 못 넘기게 된 거지요. 그래서 우리 촬영팀에 도와달라고 했고, 위성 전화로 대구 소방헬기를 불러 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심마니도 만나고 지리산 독사조합이라고 뱀꾼들 조합도 있습니다. 암튼 지리산에 가면 아무도 안 찾아올 공간에서 의외의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국장님이 생각하시기에 지리산 최고의 풍광은 어딘가요?”

지리산 작은집(산장)에서 바라본 지리산 풍광.

“글쎄요. 지리산 10경을 선정해 봤습니다. 유명한 천왕봉 일출도 있고, 반야봉 낙조, 불일 폭포, 섬진강 낙조 등 여러 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반야봉 낙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3일 동안 비를 맞으면서 낙조를 기다렸는데, 솔직히 화려하면 얼마나 화려하겠냐 싶었습니다. 낙조를 촬영하는데 2시간 동안 운전기사와 촬영보조는 한마디도 안 하고 그대로 가만히 낙조를 보고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거죠.”

그의 지리산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리산에 작은 집도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정말 어디 외국에 20일 정도 출장 나가면, 집 보다 더 생각이 나는 곳이 지리산입니다. 뭔가 따뜻한 아늑한 기를 저에게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풍광 좋은 곳에 작은 집(산장)터를 구매하고, 지금 집을 꾸미고 있습니다. 큰 창문을 통해서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고, 누워서도 지리산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 합니다. 제가 지리산에서만 평생 살 수는 없지만, 이젠 지리산을 완전히 떠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인생을 바꾼 카메라 한 대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카메라 감독으로서의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가 카메라 감독이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제 매형(박용 전 대구대학교 총장)이 육종학자인데, 함께 종묘회사를 차려서 큰 사업을 벌여보자고 했습니다. 저도 사업에 대한 포부를 품었기 때문에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인부도 한 10여 명 부렸습니다. 1978년에 매형이 일본에 다녀오시면서 아사히펜탁스 카메라와 렌즈를 사 들고 오셨습니다. 매형은 원래 이걸 학술용으로 쓰려고 사온 건데, 기계엔 취미가 없어 저한테 준 것입니다.”

선영철 전 경남MBC국장./김구연 기자

카메라 한 대가 그냥 굴러 들어왔다. 당시로서는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저야 엄청 신이 났죠. 당시 카메라 한 대가 얼마나 귀하냐면 값으로 치면 직장인 월급 몇 개월을 털어 넣어야 하는 정도고,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을 시기입니다. 또 매형께서 매크로렌즈(접사기능 렌즈)와 망원렌즈도 함께 사 들고 오셨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만드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카메라와 렌즈가 생겨서 즐겁긴 한데,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당시 나온 카메라 책 3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3권을 숫제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럼 방송국에는 어떻게 들어가신 겁니까?”

“카메라를 얻은 지 2년이 지난 1980년에 텔레비전을 보니 마산MBC에서 공개 채용 공고를 냈습니다. 카메라 촬영직을 1명 뽑는다고 했습니다. 시험이라도 한 번 쳐보자 하는 심정으로 필기시험을 쳤습니다. 제가 보기엔 시험장에 150명 정도 있었는데, 시험시간 2시간을 채운 사람은 저를 포함해 2명밖에 없는 겁니다. 다른 분들은 시험지를 빨리 내고 다 나가던데, 저는 정말 쓸 게 너무 많았습니다. 시험지를 빽빽하게 채워서 냈습니다. 저는 책을 통째로 다 외웠기 때문에 아예 표 같은 거를 시험지에 그려서 냈습니다. 시험지 답안이 아니라 책 복사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보고 최종적으로 1980년 2월 18일에 입사했습니다.”

선영철 전 경남MBC국장./김구연 기자

카메라 한 대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셈이다. 이후 그는 경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사람이 젊을 때는 작은 것에도 인생이 크게 변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줘야 하고, 젊은이들은 식견을 갖춘 어른을 찾아가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나중에 커 보면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주변에 힘들어하는 젊은 친구들이 보이면 좋은 말을 해 주려 합니다. 조금만 신경을 써서 따뜻하게 해 주면 바로 반응이 옵니다. 앞으로 저도 기회가 된다면 젊은이들에게 멘토로 활동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표사진’ 찍어주고 싶어

말이 나온 김에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지금 저는 경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단 학생들 수업에 집중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예전부터 생각해 뒀던 것이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아 뭐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선 국장은 이제 막 퇴임했으며,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을 가지고 얘기하기가 민망하다고 했다. 그래도 일단 그의 구상을 들어보기로 했다.

“고민을 좀 했습니다. 내가 가진 재주를 사회에 기부하면서, 나도 즐겁고 남도 행복한 것이 뭐가 있을까? 요즘 시골 마을 같은 데 찾아가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이 제법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저것도 좋지만 다른 접근법은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사람의 대표사진을 찍어주자는 겁니다.”

선영철 전 국장 대표사진.

대표사진이라.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삶을 압축해서 드러낼 수 있는 사진입니다. 영정사진은 뽀샤시 하게 처리해서 70대 노인을 40~50대 중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속에 어르신의 역사나 삶의 흔적이 안 묻어나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이 분이 어떤 분인지 후손들이 느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삶이나 특징을 잡아내지 못하는 거죠.”

영정사진의 한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됐다. 그런데 대표사진을 어떻게 찍겠다는 것인가?

“저의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분들을 모아서 팀을 꾸립니다. 그리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는 겁니다. 거기서 주민들과 얘기하고 어울리면서 며칠을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는 겁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하는 모습도 찍고, 대화하는 모습도 찍으면서 정말 세상에 단 한 장 뿐인, 그 사람을 잘 나타내는 사진을 찍는 겁니다. 빤한 구도에서 대량 생산하듯이 찍는 게 아닌 사진 하나 하나가 스토리를 담은 것을 찍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90을 넘긴 어르신의 꾸밈없는 진한 삶의 흔적이 느껴졌다.

선영철 전 국장 어머니 대표사진.

“대표사진은 꼭 어르신만 찍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임 기자 취재하는 모습을 제가 여러 컷 찍어서 그 가운데 임 기자의 개성이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사진이 있으면 그게 바로 임 기자의 대표사진이 될 수 있는 거죠. 이게 사회에 대한 제가 할 수 있는 질 높은 봉사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그와의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끝으로 지역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지 물어봤다.

“저는 지역방송이 본질을 계속 살려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 사람들이 아무리 취재해도 드러내지 못하는 경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살려나가야지 서울에 제작비 많은 유행하는 프로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MBC경남에 오랫동안 쌓인 많은 자료가 있고, 앞으로 찾아야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투리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며, 시간이 가면서 바뀝니다. 개발로 사라져 가는 지역의 옛 모습도 찍어 놔야 합니다. 그래서 방송국이 지역의 살아있는 도서관이 돼야 합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이런 것들이 쌓이면 충분히 지역 방송의 가치가 살아날 겁니다.”

이제 60을 바라보는 선 국장에게서 40대에서나 느낄 수 있는 활력과 자신감이 인터뷰 내내 흘렀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아직 맑고 총기가 서려 있었다. 앞으로 그는 많은 일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따라서 그를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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