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인재 반드시 돌아오는 경남'이어야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은 작은 생명을 이어주는 고귀한 생명수다. 인터뷰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에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듯 사회적 기반을 다져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그가 피워낸 꽃을 바라보는 것은 사뭇 반가운 일이다. 사회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중년의 여정에서 누군가는 조금 일찍 피어난 꽃을 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조금 늦지만 여름을 앞두고 피어난 꽃과 열매를 함께 기약할 수 있겠다.

새누리당 소속으로 국회 기회재정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김상규(52) 수석전문위원은 한 사람의 인생을 여행에 비유했다. 경남 김해출신인 그는 마산고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나가게 됐다. 지난해 2월 초에는 새누리당으로 왔다. “당이 어려울 때 나름대로 베팅을 했고, 결과가 좋아서 총선 대선을 이겼다”는 그는 “(공직에 있다가) 당정 교류차원에서 사표를 내고 왔고 신규채용 형식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상규 전문위원./조문식 기자

- 경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경남 김해 칠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경남 김해 진래로 마산에서 가깝습니다. 어린 시절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를 따라 경남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여러 번 옮겨 다니다 보니까 산으로 들로의 기억이 도시보다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진래초등학교를 다니다 6개월 만에 전학하기도 했고 마산에 자리를 잡은 후 월령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어 중앙중학교과 마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어릴 때 아버님이 교편을 잡아 여유 있는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취미라면 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태양극장에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어릴 때는 꿈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 이런 것들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볼 정도로 영화에 관심이 많았지요. 지금은 시간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볼 것들이 많은 것 같아서…지금은 책도 봐야하고 일도 부담이 많고 해서 영화를 볼 마음의 여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미팅이나 이런 것들도 해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동경만 했었지 행동으로 옮길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경남을 떠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마산고등학교 다닐 때 모자와 명찰을 달고 다니면 동네에서는 인정을 해주고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더 철이 든 것 같습니다. 생존경쟁을 더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서울 아이들은 앞서나갔지요. 미팅 이런 것에서도 앞서가고…. (웃음) 제가 시골 출신이니까…지금 생각해보면 돈이라든지 아는 사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없다 보니까…할 게 없으니까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법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크게 없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간 사람들은 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는 좀 무서웠다고 할까요? 신문방송 이런 것들이 뜨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남 따라가듯이 갔지요. ‘법은 밥학’이라고 그러지요. 밥 굶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친구들은 금융기관 같은 곳에 다 잘 돼있지요.

대학은 그런 상황이었고 아무래도 시골에서 왔으니까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격동기에 대학생활을 했지요. 12·12 및 5.17과 광주민주화항쟁…이런 것들이 있어서 공부보다는 그런 데 관심이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시골출신이니까. 놀기보다는 고시(행시)공부를 했지요. 아무래도 사시(사법시험, 당시 사법고시)는 공부 양이 많잖아요. 손쉬운 길을 가자 해서…. (웃음) 지금 와서 보니까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규 전문위원./조문식 기자

- 공부 외에 에피소드와 이후 사회 진출에 대해 말해주세요.

“한번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에 3일 구류를 살고 나왔지요. 사회적 격차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해 준 등록금 등에 대한 보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에 간 후 행시 3차에서 한 번 떨어진 것 같네요.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간 후 2차에서 합격하고 3차에서 한 번 떨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1, 2, 3차를 다 합격했어요. (웃음) 그래서 1983년도에 임용됐습니다.

첫 자리는 국세청이었지요. 발령을 못 받고 한 6개월 간 국세청 발전 연구단 같은 곳에 들어갔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게 더 도움이 된 것 같군요. 이후 남부산세무서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지나보면 사법부 일이라는 것은 예외적인 사건을 많이 다투지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서 사회 전체를 못 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전체를 봅니다. 그런 측면에는 시야가 넓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인생을 잘 하고(살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다양한 경험이 여행이라고 봅니다. 대학생활도 무미건조했지요. 미팅을 했지만 잡기에 능하지도 않고… (웃음) …그게 이제 공부를 하게 된 계기였고 그래서 공무원 세계에 들어가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 삶의 경험을 여행에 비유하셨는데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살아가면서 느낀 게 상사를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영래 전 국세청장도 있지요. 이후 본청으로 왔고 (당시 토지가격이 많이 올라서) 토지초과이득세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토지공개념 3법 중에 하나가 토지초과이득세지요. 그 업무를 좀 했다는 것이 관심이 있습니다. 초반에 부산에 내려가서 근무했고 그 뒤에 다시 (서울) 성북세무서 법인세 과장을 나간 적이 있지요. 법인세 과장을 어린 나이에 했어요. 소득세 과장과 법인세 과장을 다 했지요. 그 뒤에 재무부 세제실로 옮겼지요.

당시 모셨던 분들이 지금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김진표(민주통합당·경기 수원 정) 의원과 이용섭(민주통합당·광주 광산 을) 의원을 모시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지나고 보니까 혹독하게 해 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사람들이 제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게 발전의 원동력이었고 후배들 대할 때도 잘못된 것을 혹독하게 꾸짖고 필요할 때는 그 사람이 꾸짖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당시 이용섭 과장을 모시면서 사실은 그 당시 세입예산(당시 일반회계의 세입예산 43조 2500억 원)을 편성한 적이 있지요. 국세청 본청 등을 거친 후 재무부로 들어와서 정통관료의 생활을 시작했지요. 세입예산을 했다는 것은 전체를 봤다는 의미입니다.”

- 관료생활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셨나요?

“1995년부터(1994년 말) 부처가 통합(재정경제원)되면서 예산실로 옮기면서 여러 가지…대법원 예산도 해보고 과기부의 과학예산과 복지예산…인력과 조직도 해봤습니다. 이후 1999에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지요.2001년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버밍햄대학 MBA과정을 거쳤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전남 파견관으로 7개월 정도 근무했고 이듬해 기획예산처 법무담당관 등을 맡았습니다. 2004년 기금총괄과장 등에 이어 2007년도에 제가 국장 승진을 하면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갔지요. 정치의 격랑 속에 있는 단체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6·25전쟁이 엄청나게 비참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경찰과 군인의 잘못에 대해 가리는 일이 안타까웠습니다. 그에 관련된 사람의 아픔이 있다는 것들을 봤지요. 이는 보도연맹사건과 제주4·3사건 등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지요. 당시 회의에 참석해보면 인상적이었고 점점 관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된 계기가 됐지요. 세상이 넓고 복잡하지요. 지평이 넓어지는 계기였다고 봅니다.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인수위에서 일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와대로 갔는데 제 관련 부처가 아닌 교육과학수석실 과학비서관실에 있었지요.”

- 청와대에서 바라본 경남의 발전 가능성은 어떤가요?

“제가 R&D를 많이 했고 당시 과학기술행정체제개편에 관여하다 보니 그것을 인연으로 과학비서관실로 갔습니다. 2010년 8월까지 있었지요. 과거 같은 부서에서만 있었으면 효용이 올라가지 않는데 다른 조직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지평을 넓히는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웃음) 오히려 그 쪽 입장에서 재정 쪽을 바라볼 수 있고 어찌 보면 기획재정부가 취합을 하는 부서인데 전체를 컨트롤하는 부분이지요. 이해 못하는 부분에 대해 여기 와서 컨트롤(조절) 역량을 키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2010년 9월에 경제예산심의관(기획재정부)으로 복귀했습니다. 예산실에서 국토부, 농림부, 지금의 산자부 업무 관련 R&D 예산을 편성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름대로는 경남에서 온 분들에게 친절하게 한다고 했는데 받아들인 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한 것이 많은데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경남은 땅이 넓고 인구는 많은데 사람들의 응집력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속감이나 이런 부분에서 옛날 오래된 도시에 비해서는 취약한 부분이 있지요. 생각을 더한다면 옛날 동남권의 발전에 힘이 됐던 것은 ‘브레인 게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수한 인력을 흡수할 수 있었지요. 6·25(전쟁)를 거치면서 (경남지역으로 인력이 몰리면서) 우수 인력 흡수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정체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재가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지역이 되고 있지요. 경남을 방문한 외부 사람들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문화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외부 사람 흡수하는 역량 문화 갖추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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