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로 환자 대한 적 한 번도 없어요”

평일 저녁 7시 30분. 바깥은 이미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소담한의원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 진료시간은 이미 끝났지만, 환자들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8시 가까이 되자 진료실에서 분홍색 가운을 입은 여성이 나왔다. 아주 왜소한 체구다. 이제 한 시름 놓았다는 듯 ‘휴~’하며 긴 숨을 내쉰다. 하지만 얼굴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자리한 소담한의원 박정하(50) 원장이다.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대면하기 전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통화 했을 때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던 터였다. 하지만 실제 대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박 원장은 전화 통화 당시에 대해 “회의 중 전화가 와서 좀 곤란한 상황이었어요”라며 그럴만한 이유를 밝혔다.

문학에 빠졌던 소녀 ‘한의사’ 된 까닭

박정하 원장 고향은 마산이다. 부산·진주 등을 옮겨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마산제일여고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마광수 교수를 좋아해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진학을 꿈꾸기도 했다.

박정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어릴 적에는 교사·작가, 이런 쪽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특히 글 쓰는데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회에 나가면 항상 상을 받았습니다. 책도 굉장히 많이 읽었죠. 다독하는 스타일이라 하루에 서너 권 씩 읽고 그랬죠. 이성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니 사춘기 같은 것도 모르고 그냥 책 읽고, 글 쓰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죠. 예전 일기장은 아직도 보관하고 있답니다.”

사람 외모로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책을 끼고 있는 박 원장 옛 모습이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학업 성적도 아주 빼어났다.

“아버지·어머니가 열심히 사셨지만, 월급으로 생활하는 게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어요. 어머니가 항상 ‘반찬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제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건 공부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억지로 공부한 것이 아니에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오히려 부모님께서 ‘공부 좀 그만하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랬던 그가 고등학교 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한의학이었다.

“한의학이란 도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어느 순간 하게 되었어요. 그 답을 얻으려고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학생회장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물론 답장을 받았죠. 음양오행에 대해, 그리고 절대적인 것 아닌 상대적인 가치,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었어요. 깨우침 같은 게 왔어요. 해볼 만한 학문이라는 확신이 완전히 섰죠.”

결국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 진학했다. 편지를 주고받았던 학생회장 선배도 직접 대면하며 더 깊은 얘기를 나눴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에 푹 빠져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6년을 보냈다.

박정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1980년대 마·창·진 최초 여 한의원장

1989년 2월에 대학 졸업을 했다. 그리고 고향 마산으로 돌아와 그해 5월 개인 한의원을 개원했다. 마산·창원·진해 최초 여 한의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제가 하는 학문에 대한 믿음이 있었죠. 배운 대로 하면 아픈 이들이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빨리 그 경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보고 싶고, 돈은 없으니 어떡해요. 마산 회산다리 아래 사시는 부모님 집에 한의원을 차렸죠. 부모님께 돈도 1000만 원 빌렸죠.”

젊은 여한의사다 보니 찾는 이들이 ‘아가씨’ ‘언니’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왜 간호사가 진료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박 원장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리고 친근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환자를 대했다.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이 찾아왔다. 전신 마비 증상이었다. 약 네 첩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두 첩만 먹고서도 몸이 깨끗이 회복됐다. 박 원장 스스로도 놀랐다. 한의학에 대한 경이감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박정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이러한 환자들을 더 많이 상대할 수 있도록 절에 가서 기도했다.

‘제 몸이 피곤해지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열정이 환자들에게도 전해졌다. 개원 초 주위 우려는 기우였다. 문 열기 무섭게 사람들 발길이 이어졌다. 부모님께 빌린 돈은 한 달 만에 다 갚았다.

그렇게 시작된 소담한의원은 지금까지 25년 세월을 잇고 있다. ‘소담’은 ‘소박한 연못’이라는 뜻이다. 동양화를 즐기던 그가 낙관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호다.

부모님 집을 한의원으로 계속 사용하다 지난해 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요즘은 하루 150명 정도가 발걸음 한다.

“제가 오히려 환자분 통해 에너지 얻죠”

박 원장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만져보라고 했다. 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단단했다.

“매일 침 놓느라 이렇게 됐죠. 팔에도 근육이 많아요. 모르는 사람들은 골프를 해서 그런 줄 알죠. 침·진맥은 파워가 아니라 섬세함과 유연함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한의사들이 유리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박 원장은 사실 마음먹으면 술도 곧잘 한다. 하지만 환자들한테 미안해 먹지 않을 뿐이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헬스도 꾸준히 하고, 스스로 보약도 지어 먹는다. 그럼에도 매일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 체력 소모가 보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박 원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몸속 에너지는 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우물 같은 거죠. 고인 물을 퍼내면 더 맑은 물이 계속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환자분들에게 에너지를 쏟아내면 낼수록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거죠. 환자분들을 어정쩡하게 대한 날이면 오히려 제 몸이 더 불편해요. 한의사들은 스스로 중인이라고 합니다. 침을 놓거나 맥을 짚을 때 항상 허리를 낮추잖아요. 행위 자체가 그렇듯, 항상 겸손한 자세여야 한다는 거죠. 저 역시 의자가 있지만, 등을 기댄 채 환자를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곳 한의원을 찾는 이 가운데는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이도 많다고 한다. 경영노하우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부질없는 질문이었음을 금방 알게 됐다.

“저는 지금까지 환자를 돈벌이로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처음 개원했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거죠. 변치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저를 찾는 환자분들은 저보고 ‘쌀집 아줌마’ 같데요. 남자 환자분들은 여한의사한테 말하기 좀 곤란한 것도 있잖아요? 그러면 제가 먼저 시원스레 말해버려요. 그때부터는 아주 편해하시죠. 저의 가장 큰 장점은 친화력이죠. 대통령을 만나도 저는 똑같이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의사 가운데는 말이 적은 분도 있죠. 그런데 저로서는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죠. 환자분들과의 교감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박정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박 원장은 창원시한의사회 부회장(마산한의사회장)직도 2년째 맡고 있다. 선배들이 길을 잘 닦아 놓았기에 후배들 진료 환경이 좋아졌다는 감사함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선배들한테 받은 것을 다시 베풀겠다는 생각에 이러한 직을 흔쾌히 맡았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소외계층 방문 진료 같은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서울을 오가야 한다. 대학 후배들을 위한 강의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젠 어릴 적 그 좋아하던 문학과도 멀어졌다. 명쾌한 논리로 설명되어야 하는 한의학과 정반대인 문학은 서로 너무 먼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대화 도중 박 원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시어머니였다. 남편에 관한 아주 기쁜 이야기를 나눴다. 경찰 고위직에 있는 남편이 승진한 것이었다. 일에 푹 빠져 있는 박 원장에게도 가정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27살 때 결혼이라는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제가 있었어요. 내 일을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잘난 남자라면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흔히 말하는 마담뚜에게 미혼남 리스트를 뽑아달라고 했어요. 그 가운데 1순위가 남편이었어요. 사시·행시를 모두 패스했으니 얼마나 잘난 사람이겠어요? 1월 2일 처음 만나 2월 18일 바로 결혼식을 올렸죠.”

남편은 군 복무 후 특채로 경찰직에 몸담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다. 결혼 생활 반은 떨어져 지내고 있다. 자녀는 둘인데, 엄마로서 정을 쏟아내는 데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박 원장도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 또한 ‘일에 파묻혀 지내는 엄마를 둔 자기네 복’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주위에서는 저를 보고 참 불쌍하다고 해요. 제 딸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해요. 일 말고 다른 것에 시간 쏟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저대로 이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어떤 형태로든 베풀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저로 인해 주변이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박정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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