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을 꿈꾼다"

창원시한의사회 제2대 회장으로 이병직(50) 원장이 선출됐다. 이병직 원장은 지난 1월 30 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이병직 회장은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며 “창원시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더욱 잘 소통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창원시한의 사회 회장 임기는 3년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이병직 한의원’에서 이병직 회장을 만났다.

서글서글한 눈매 끝에는 장난기도 엿보였다. 관심사에 대해서는 한없이 얘기하다가도 모르 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모른다고 해버린다. 그렇다고 말을 무작정 늘여서 하지도 않는 다. 얘기를 이어갈 때 한 단락은 짧은 편이다. 다만 그 단락과 단락을 계속 이어가는 과정 에서나 화제를 바꾸는 시점에서 망설이는 일은 별로 없었다. 말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 만 쓰는 단어는 남성적인 게 많았다. 전반적으로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그 자 신감은 비교적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한의사’라는 직업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제가 이른 바 ‘황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지요. 아버지가 명문대를 졸업해 약사를 하셨습니다. 당시 약사는 지금 웬만큼 잘나가는 의사보다 더 괜찮았지요.”

이병직 회장은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서 태어났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소년은 주변에 아쉬 울 게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4·5·6학년 학생들이 직선제로 뽑던 초등학교 어린이 회장도 했다.

“치맛바람이 반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내가 능력이 없으면 치맛바람이고 뭐고 아무 필 요가 없는 거지요. 선거 유세를 했던 기억도 나는데 제법 그럴듯하게 잘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평범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특별하게 돋보일 것도 없었고 그 렇다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그런 아이였다.

“사고를 친 것도 없지만 특별하게 내 역량을 보일 수 있었던 계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저 부모님 말 잘 듣고 평범하게 지내는 아이였지요. 중·고등학교 때는 덩치도 작고 많이 아 프기도 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한의사가 되고...

“전적으로 아버님 영향이지요.”

‘한의사가 된 것은...’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답이 먼저 나왔다. 약사이면서 지역 상공 회의소회장을 지낼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모범적인 사람이 었다. 엄격하면서 너그러운 전형적인 아버지였는데, 자식이 잘못했을 때 나무라기보다는 기 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아이가 둘인데 아이를 키울수록 아버님만한 분이 없었 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잘못을 하면 바로 야단치지 않고 기다리셨지요. 당연히 뭐라 할 상황에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제가 오히려 이상한 거예요. 스스로 잘못을 돌아볼 수 있게 됐지요.”

이병직 회장은 휴지를 꺼내 살짝 눈가를 찍었다. 매사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자신감 넘치는 쉰 살 한의사도 아버지 얘기에는 잠깐이나마 감정이 흔들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이병직 회장은 1991년 대구한의대, 1993년 대구한의대 보건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2004 년 대전대한의과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결혼은 본과 4학년 때 했어요.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에 다니던 아내가 대학원 준비하면서 한자 공부를 하러 마산에 있는 서당에 다녔고 나도 주역 공부를 한다고 같은 서당을 다녔지 요. 1월에 만나서 8월에 결혼했으니... 그냥 처음부터 이 사람이라고 싶었지요.”

당시 공부에 지쳤던 이병직 회장은 아내 덕에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한의사 공부를 마치고 1992년 마산합포구 산호동에서 처음 개업할 때는 오히려 형편이 어 려웠다. 잘나가던 집안이었지만 사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한 의원을 내주면서 아들에게 통장 하나를 맡겼다. 집을 담보로 낸 대출통장이었다. 벌어서 갚 지 못하면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병직 원장 이 부모덕을 또 봤다고 여겼다.

“뭐 부모덕을 봤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자존심도 있고 그냥 그렇다고 다녔지요. 그래놓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병직 회장은 막 일이 잘 풀리기도 전에 큰 사고를 당한다.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죽을 위기를 넘기고 얻은 삶

1993년 이병직 회장은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를 당한다. 초기 진단이 6개월이 나왔을 정도 였다.

“100일 만에 퇴원했어요. 도저히 계속 누워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퇴원해서 휠체어 타고 환자를 봤습니다. 그 와중에 후유증으로 골수염이 생기지요. 6개월 남짓 매일 아침·저녁 항생제를 맞으면서 환자를 보는 거예요.”

사정을 모르는 환자 중에는 이병직 회장이 소아마비 환자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매일 몸 과 마음은 고달팠고 그럼에도 진료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냥 오기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병직 회장은 한 가지 깨우침을 얻는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항상 매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 같은 게 생겼어요.”

사람이 모든 것을 다하고 살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어야겠 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회생활을 하면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호불호가 갈리 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요.”

회복하는 시간은 더뎠다. 5~6년 남짓 재활 치료를 진행했다. 그때부터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진료를 하고 치료를 받고 이를 되풀이하면서 시간이 흐른다. 이 회장은 이 시기를 ‘아 무 생각 없이 넘긴 시기’로 기억했다. 그런데 이병직 회장에게 느닷없이 새로운 계기가 생 긴다.

“2000년 7월 대한한방의료봉사단(KOMSTA)에서 브라질 해외 의료봉사 활동은 한다더라고 요. 그때는 어느 정도 몸도 회복됐고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어 신청을 했 지요.”

처음에는 모르는 세상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으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의료봉사 명분을 뒤덮은 셈이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그런 어설펐던 마음은 한 순간에 깨졌다. 시혜처럼 생각했던 봉사는 내가 뭔가를 더 얻어오는 과정이 됐다.

“나를 비우러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외 의료봉사는 물론 국내 의료봉사도 많이 다니게 됐지요. 제가 훨씬 더 많이 배우고 많은 힘을 얻곤 합니다. 이전에는 나를 더 생각 했다면 지금은 남을 더 생각하는 게 정말 나를 위하고 우리 이웃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 지요.”

현재 이병직 회장은 대한한방의료봉사단 부단장, 열린의사회 영남지부 부회장을 겸하면서 의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삶의 양념, 와인과 테니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이병직 한의원’에는 한의원과 전혀 상관없는 유별난 물 건이 있다. 병원 가운데 진료실 앞 공간에 들여놓은 와인셀러다. 와인셀러 주변은 와인 관 련 책이 즐비하다. 와인 한 병을 꺼내들었을 때 눈빛과 표정은 그저 흐뭇했다. 이병직 회장 은 의료봉사를 통해 와인과 인연을 맺었다.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의료봉사는 그 나라 고위관리 초청을 받아요. 그냥 가서 치료를 하면 불법이지요. 그쪽 국 가에 단기 진료허가증을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그쪽 고위 관리들이 고마운 마음에서 우 리를 위해 만찬회를 열기도 하지요. 그 자리에서 와인을 접했습니다.”

이병직 회장에게 와인은 처음부터 맞는 술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한 잔씩 받기는 했으나 식사를 할 때는 주로 한국에서 가져간 술을 마셨다. 그게 그쪽 사람들에게 큰 결례였다는 것은 몇 차례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알았다. 먹는 취향 좀 다르다고 결례? 이병직 회장은 와 인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마산대 국제소믈리에과에 입학한다. 관심은 더욱 깊어져 이병직 회장은 서울 와인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소믈리에 자격 증도 받았다.

“입에 맞는 와인이 제일 좋지요. 그리고 와인은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술입니다.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와인마다 담긴 이야기를 알면 좋아요. 산지·품질·연도· 회사 등 알면 알수록 더 맛있는 술이지요. 보관도 잘해야 하고요. 그리고 좋은 와인일수록 와인을 잘 아는 사람과 함께 마셔야 합니다. 저는 언제라도 좋은 와인을 함께 마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

와인과 더불어 이병직 회장 삶을 넉넉하게 만든 취미는 테니스다. 지금은 조금 뜸하지만 한 참 때는 일주일에 2회 정도는 무조건 운동을 나갔다. 특히 테니스는 큰 사고를 당했던 이병 직 회장이 건강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교통사고 이후 지팡이를 오랫동안 짚고 다녔는데, 치과의사회 테니스 모임에 나가는 지인이 참여를 권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굳이 저를 시합에 넣어주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재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 지요.”

창원시한의사회 회장으로서

“한의사들이 매우 어려워요. 병원 경영도 그렇고, 잘못된 정보 때문에 한약에 대한 부담감도 있는 것 같고. 또 자격 없이 비슷한 시술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런 문제는 한의원 몇 곳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함께 힘을 모으고 한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중심이 필요했고 한의사회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창원·마산·진해 통합 이후 창원 시한의사회로 거듭난 조직을 올해부터 이병직 회장이 이끌게 됐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병직 창원시한의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이병직 회장은 한의학 우수성을 체계적으로 알리는 사업에 중심을 두고 있다. 한방이 내세우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방·면역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더불어 회원들 사이 유대를 강화하고 소외 계층에 대한 지원을 더욱 확대하는 사업을 활발하게 펼칠 계 획이다. 이 때문에 당분간 이병직 회장 동선은 한의사회 중심으로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정작 이 회장이 밝힌 소망은 소박하다.

“의사로서 보람이라는 게 저를 통해 불편했던 환자가 편해지는 것 이상 없어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인연이 소중한 것이고요. 소망이라는 게 다른 거 없어요. 애들 다 키우면 아내와 함께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쁨과 아픔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홀가분하게 살아갈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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