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구간 남원 인월에서 함양 동강까지

지리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다. 경남·전남·전북 등 3개 도에 걸쳐 있는 48만 3022㎢의 면적으로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1967년 지정)다. 지리산(智異山)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영험함이 있는 산이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제주도 한라산 제외) 천왕봉(1915m)에 올라서면 그 웅장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다. 동서남북으로 뻗은 줄기마다 봉우리가 이어진다.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어머님의 품 속 같은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지리산 이야기를 이번 호에도 이어간다.

봄 쫓아 한 걸음 또 한 걸음
3구간 남원 인월~함양 금계(19.3㎞)

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19.3㎞의 이 구간은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지리산 주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길이다. 제방, 마을, 산과 계곡을 지나며 서로 다른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어 전체 둘레길 가운데 으뜸 길로 꼽히는 코스다.

   

인월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5분 남짓이면 구인월교를 건너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시작점이 나온다. 남원 운봉고원에서 발원한 물은 여러 소하천과 합류해 이곳 람천으로 스며든다. 이 물줄기는 남강과 낙동강을 거쳐 멀리 남해로 흘러든다. 구인월교에서 시작되는 1.5㎞의 제방길은 들판에서 산 속으로 이어지는 데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황량한 모습이다. 봄을 재촉하는 바람 따라 군무(群舞)를 펼치는 갈대만 분주할 뿐 이른 아침 들녘은 고요한 정적만 흐른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 요새지였다는 중군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소리없이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와 가끔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래도 오가는 길손을 위해 길 안내가 새겨진 팻말과 이 마을을 알리는 담벼락 벽화가 있어 낯설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 마을 특산물인 잣과 호두를 알리는 벽화가 정겹다. 이 벽화를 창원 범숙학교 학생이 그렸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을을 벗어나 다랭이 논을 지나 다시 시멘트 길을 따라가자 황매암으로 향하는 갈림길이다. 잠시 땀을 훔칠 무렵 아담한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 맹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흔적이 남아있는 석천(石泉)에서 목을 축이고 수성대 쉼터로 발길을 돌렸다.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수성대 쉼터에는 모 방송사의 TV 프로그램인 <1박 2일> 멤버가 다녀갔다는 현수막만 있을 뿐 아직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 탓인지 간이매점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다.
숲이 이어지는 호젓한 산허리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내리막이 시작되는 배너미재가 나온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마을과 그곳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고사리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자 장항마을의 수호신인 소나무 당산이 위풍당당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도 당산제를 지낼 정도로 영험한 소나무로 수령 400년에 높이 18m, 둘레 28m의 풍모가 예사롭지 않아 마을에서는 신성하게 여긴다.

람천을 가로지르는 장항교를 건너 60번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도로 건너편 둘레길 초입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작은 카페가 눈길을 끈다.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여유도 둘레길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친절한 카페 주인은 어디까지 가는지, 가다 보면 어떤 풍광이 좋은지를 상세히 일러주신다. 살뜰한 인정에 커피 맛이 더 새롭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자주 만나게 된다. 걷는 사람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에게는 생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길이다. 누구에게는 불편하지만 누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그런 것이 바로 지리산 둘레길 포장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오롯이 지리산을 느끼고 싶은 전국의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길을 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서북능선의 조망을 뒤로 숲 속으로 들어서면 서진암 갈림길까지 오르막이 계속된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나있는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여유롭다. 나무 벤치에서 잠시 쉬는 동안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 아이의 재잘거림이 마치 새봄을 알리는 새소리처럼 정겹게 들렸다.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 주인을 잃은 밭 흔적이 눈에 띄었다. 끼니만 해결해도 행복했을 시절 아랫마을에 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경작된 소중한 농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손맛이 그리워지네!

   

멀리 삼봉산과 백운산을 안은 등구재, 아름다운 다랭이 논이 한눈에 펼쳐지는 중황마을 언덕배기에 다다랐다. 점심을 먹으려고 이곳의 명소인 ‘중황마을 쉼터’로 들어섰다. 1박 2일 촬영팀이 다녀간 곳이라는 현수막에 발걸음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주인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푸근한 인상만큼이나 푸짐했다. 할머니가 직접 기른 채소에 산나물 반찬이 입맛을 당겼다. 여기에 주인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가져온 막걸리는 금상첨화 그 자체였다. 이렇게 먹은 밥값이 1인당 5000원이다. 미안한 마음에 막걸리 몇 병 더 마시려고 했으나 점심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행여 다시 이 길을 찾는다면 꼭 들러서 인사를 하고 싶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빌어본다.

든든하게 챙겨 먹은 점심 덕분에 발걸음이 한결 가뿐했다. 개울과 알루미늄 캔으로 만든 바람개비가 인상적인 쉼터를 지날 때까지 전북과 경남을 잇는 도 경계인 등구재까지 한달음에 치고 오를 기세였다. 그러나 다랑이 논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몇 번 쉬고 나서 마침내 거북 등을 닮았다고 해서 등구재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개를 넘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과 중봉, 제석봉 등 동부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절반 넘게 걸어왔다는 안도감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갈림길 쉼터에는 주민이 직접 채취한 산나물을 봉지에 담아 무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누가 그냥 가져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을 믿고 물건을 내놓은 순박한 인심이 인상적이었다.

창원생태마을로 가는 내리막길은 민원 때문에 출입이 금지돼 좌측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리산 주 능선을 감상하면서 거대한 당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창원마을 윗 당산에 도착했다. 건너편으로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웅장하다. 다랑이 논과 장작 담, 마을 골목,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는 풍경을 뒤로하고 하늘길을 거쳐 금대산 자락의 숲길을 따라 꽤 지루한 길을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 물쯤 금계마을 바로 위 민박집에서 긴 여정을 마감했다.

지리산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4구간 함양 금계~동강(11.5㎞)

지리산 둘레길의 또 다른 매력은 민박집이다. 3구간을 마무리하고 일행이 찾은 민박집은 이름부터 남다르다. 금계마을에 있는 ‘사랑코트’라는 민박집인 데 언뜻 무슨 뜻일까 궁금하다. ‘사랑코트(Sarangkot)’는 네팔에 있는 히말라야 전망대가 있는 전망대가 있는 언덕 이름이다. 말이 언덕이지 이곳의 해발은 1592m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안나푸르나 연봉(連峰)이 장관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다. 이곳 전망대에서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마차푸츠레(6993m), 안나푸르나 2봉(7397m)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전율이 생긴다. 집주인 김매경 여사님은 왜 민박집 이름을 사랑코트로 지었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 집 앞마당에 서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앞마당에서 서면 천왕봉, 중봉, 제석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보다 더 좋은 전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리산 주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경기도 안양에 살다가 귀촌한 이집 주인 내외는 지리산을 앞마당으로 둔 셈이다. 토속음식은 아니지만 정성껏 마련한 정갈한 밥상이 길 떠나는 일행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다. 주인 내외분의 아들은 탁구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 4구간은 금계마을에서 동강마을까지 두 개의 코스로 탐방이 가능하다. 먼저 1코스는 견불사를 거치는 15.3㎞이고, 2코스는 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11.5㎞다. 일행은 2코스를 따라 4구간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먼저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의탄교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 의중마을로 오르는 돌계단을 따라 방향을 잡았다. 의중마을 입구 대나무 숲 앞에 홀로 선 미인송 한 그루가 일행을 반겼다. 의중마을로 들어서자 수령 800년의 느티나무가 마을 수호신처럼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마천면에서 휴천면으로 흐르는 엄천강 줄기를 내려다보는 데 건너편 언덕에서 마애불을 조성하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이 마애불 불사는 동양 최대 규모로 제작된다는 이야기를 주민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산목에서 직진하면 서암정사, 벽송사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으로 돌아 마을로 들어서면 엄천강 따라 동강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쉬운 길이다.

엄천강은 아무 말 없이 흐르네

의중마을에서 나와 길은 잠시 숲 속으로 이어지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엄천강을 따라 포장도로가 계속된다. 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어느덧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용유담에 도착했다.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용유담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다리 아래까지 접근하는 것은 안전상의 문제가 있어 다리 위에서 주변을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주변에는 ‘지리산댐 건설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지리산댐을 건설하게 되면 용유담은 물속에 잠기게 된다. 천혜의 자연경관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모전마을을 지나 길은 다시 지루하게 이어졌다.

지리산 둘레길은 시간에 쫓기지 않아 여유로운 길이다. 그냥 편하게 걷다 보면 마을을 만나고 사람을 만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숙여 ‘반갑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건네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상 탈출에 이보다 저 좋은 공간이 따로 있을까 싶다. 송문교를 지나 운서마을과 구시락재까지는 엄천강과 지리산 자락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구간 마지막인 동강마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걸음마저 여유를 부리며 눈과 가슴에 이 아름다운 풍광을 더 많이 담으라고 보챈다. 구시락재를 넘어서자 다랑이 논과 엄천강이, 아름다운 동강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5~6구간 때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함양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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