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노력으로 품질명장․신지식인 우뚝

김용희(53) 씨. 1961년 6월 22일 광주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절대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혼자 지고 가야만 했던 생활의 고단함과 슬픔은 강인한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내(김송이․23) 아버지 김용희 씨의 53년 인생을 들여다봤다.

김용희 씨는 현재 김정자(52) 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세계에서 손꼽는 품질명장으로 두산중공업 비파괴검사부에서 일하고 있다. 2005년에 품질명장으로 등극하였으며, 2010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후배양성을 위한 강의활동도 하고 있다.

꿈처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비파괴검사 부분에서 일인자가 되기까지 그는 좋지 않은 교육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소작농 첫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집안 일손을 도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소먹이를 위해 풀도 뜯어 나르고, 고추나 채소 따는데도 일손을 보탰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1977년 중학교 졸업 후, 인문계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전남공고 기계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당시 대부분 가정은 한 자녀만 집중적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장남인 그는 가정 형편상 동생을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공고에 입학하던 날은 부모님께서 아주 기뻐하셨어요. 그 당시 공고에 입학하기는 쉽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가 입학한 지 한 달여 만에 어머니가 수술 중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모교에서 강의하는 모습

“17살 사춘기 시절에 인생무상을 생각하게 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적인 순간이었어요. 저는 자존심 강했던 아이였기에 소리 없이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동생과 함께 베개가 젖어 축축해질 때까지 말없이 눈물 흘리고, 또 슬픔을 삼켰죠.”

특히 동생은 어머니 죽음에 대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동생이 들어오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 헤맸다. 동생을 마침내 찾은 곳은 어머니 무덤이었다.

“동생은 어머니 무덤을 붙잡고, 서럽게 울고 있었어요. 그때 너무 안쓰럽고 설움이 복받쳐서 어머니 무덤 옆에서 같이 울면서 하룻밤을 지냈던 적이 있었죠.”

아버지는 어린 나이 때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산전수전 다 겪은 강인한 분이었다. 또 무뚝뚝하고, 품위를 중요시하는 분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아들 교복 단추가 떨어진 모습을 보고는 엄마를 대신 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두 아들을 불러놓고 ‘새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 떠나보낸 지 1년 후, 그의 나이 18살 때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는 속으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어머니를 대신할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 말씀을 어기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대신 자격증을 따서 하루빨리 사회에 취업해 돈도 벌고 훌륭한 가정도 이끌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새로운 목표를 두게 된 계기가 됐죠.”

그때부터 기술자격증 취득에 모든 시간을 소비했다. 죽기 살기로 한 끝에 그는 ‘용접자격증’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날 어머니 무덤에 가서 “엄마, 나 자격증 땄어”라고 외치며 눈물을 쏟아냈다.

신입사원 역량개발 강의 장면

쉽지 않았던 꿈, 새로운 삶

품질명장이 된 김용희 씨

목표를 세워 노력한 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울산 현대중공업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 1980년 품질보증부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포기해야 했던 배움을 항상 갈망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은 일하기는 좋은 회사지만, 배움을 위해서는 교통편으로 이동하는 시간만 3시간 이상 필요로 했다. 고민하던 중 창원 한국중공업에 입사 원서를 제출해 다시 합격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에는 학원에 나가며 학력고사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원하는 점수를 얻지 못해 결국 대학 꿈을 접었다.

“학문을 할 것인가, 아니면 회사에 열중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어요.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일에 전념하자고 목표를 수정했죠. 그때부터는 일에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자격증을 따기 위해 또 다른 공부를 시작했다. 자격증이 없어서 전공 업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대기 발령에 머물렀어야만 했던 적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매일 오전 5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해야만 했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뒤인 1984년부터 자격증을 따기 시작해, 지금은 모두 15개 각종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비파괴검사 분야 일인자가 되어 있다. 2005년에는 대통령표창을 받으며 대한민국 품질명장에 등극하게 되었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포기 모르는 사나이의 해피엔딩

공부에 푹 빠져 자취하던 1985년에 지금의 아내 김정자 씨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언니․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었다. 휴일이면 집에서 함께 밥이나 국수를 먹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당시 아내가 부끄러워 나를 피하거나 하면 그녀의 언니가 나와 만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덕분에 휴일이면 탁구나 영화를 보며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죠.”

그러던 중 그는 회사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고, 아내 또한 이사를 해서 헤어져 지내게 되면서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없게 되었다.

회사 직원들과 함께한 김용희(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어느 날 모처럼 회사 동료와 회식을 하던 날 술이 들어가니 더욱더 그녀가 생각났고, 보슬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열정적인 프러포즈를 했다다. 사과 5개를 사서 아내 집을 찾았다. 사과를 전해주며 투박한 사투리로 “정자 씨, 사랑해요, 결혼해 주세요”라며 프러포즈를 했다.

그의 아내는 함안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매우 보수적인 집안이었다. 여자는 남자와 한 상에서 밥을 같이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유독 그녀를 예뻐했다. 학교도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그녀를 달라고 하니 장인어른께서 허락할 리 없죠. 저는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고, 그녀를 책임질 수 있는 떳떳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전라도 사람이기까지 했으니까요.”

당시 지역감정이 심했던 시절이라 그에 대한 집안 반대도 심했다. 그래도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순 없었다. 저돌적이고 포기를 모르는 전라도 청년은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이뤘다.

1985년 12월 22일, 눈 내리던 날 축복의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어린 시절 그 목표를 이루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가정을 꾸리고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집안일과 자식은 일방적으로 아내 몫이었다.

어디든지 아내와 함께 다니며 기쁨을 나눈다

또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빠듯한 생활에 보탬을 주고자 세차장에서 일도 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다행히 생명이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목뼈를 크게 다쳐 잘못하면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올 수 있는 지경이었다.

그녀가 병원에 있게 되면서 자식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하루는 딸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가 매일 같은 옷만 입고 오니 신경을 더 써주길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전화를 받게 될 줄은 몰랐죠. 당시에는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지요. 하지만 현재는 자식들에게 그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에요. 지금이라도 잘하면 되지요 뭐. 하하하.”

아내는 병원에서 6년 동안 치료를 받으며 다행히 몸을 추슬렀다.

“건강하던 아내가 괜히 저 때문에 크게 다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내에게 항상 짐만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죠. 하지만 저만 믿고 따라와 준 아내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워요.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뿐이죠.”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또 공부를 이어가 창원대학교 대학원 재료공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내는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 보니 경제 형편상 대학원을 원치 않았지만, 그의 완고한 뜻에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모습

“아내가 아가씨 때는 예쁘게 화장하고 다녔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지면서 꾸미지도 못하고, 옷도 딸 아이 것을 나눠 입었어요. 그렇게 아낀 돈을 모아 저를 대학원에 보내고 집을 장만할 정도로 모을 수 있게 되었죠. 아내는 출산 후 몸조리도 못했고, 사고까지 나 지금도 비 오면 무릎과 관절이 아프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지요.”

삶의 여유, 새로운 인생 목표

그는 이제 후학 양성을 위해 열심히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학생․학부모․지역주민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성공적인 자기 계발을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강의하고 있다. 모교 전남공업고등학교에서는 ‘후배들이여! 성공적인 자기계발 이렇게 하자!’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인재 육성을 위해 ‘대한민국 명장 만들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멘토-멘티 협약’에 참여하기도 했다.

초청강연에 참석한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 장래가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할 때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다.

“품질명장이 되기 위해, 현장의 총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말에 대해 ‘성공한 사람들의 발자취에는 어떠한 고난에도 무너지지 않는 꿈과 미래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는 점’에 초점을 둬서 전하지요. 부족함 많은 인생을 살았기에 나 자신을 알고, 그것을 뛰어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강연을 통해 인생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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