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인]"원칙을 고집하기보다 잃지 않는 게 어렵다"

진해드림요양병원은 지난해 12월 12일 개원했다. 이장규(50) 병원장은 한의학을 전공했으며, 양·한방 협진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외과 전문의와 내과 전문의가 별도로 있고 3인 원장 체계다. 직원은 총 30명이며, 간호사들은 3교대로 일해 24시간 운영한다. 주로 노인성 만성질환과 퇴행성 질환을 진료하며,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병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만들어진 신동

천재라는 소리가 있던데 사실인지 물었다. 천재는 무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일곱 살 때 동네에서 신동으로 소문이 났단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손자가 한문을 읽었다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해 동네 사람들이 신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어린 맘에 할아버지에게 칭찬이 듣고 싶어 옆에 있는 한글을 읽어놓고 모르는 척했다.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는 그걸 모르셨다.

“할아버지랑 손을 잡고 길을 가고 있는데 그때 영화 포스터에 한문도 있었거든요. 자세히 보니 삼국지라는 제목이 한글로 조그맣게 보이는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자랑처럼 ‘할아버지 저 한자 삼국지지’라고 말했죠. 할아버지로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누구도 한문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한문을 다 읽는다며 할아버지가 온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죠. 그때부터 신동이라 소문이 난 거에요. 실제로는 신동이 아니고 사기였던 거죠.”

이장규 진해드림요양병원 병원장./박일호 기자

그는 스스로 신동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동네 사람들이 신동이라 믿어줘서 공부를 안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때로는 공부 안 하고 놀 때도 사람들이 머리가 좋으니 놀아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좋았다고 한다. 그는 이웃이 신동이라고 말해준 것을 자기를 믿어주는 것으로 회상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학생운동 그리고 선반공이 되다

이장규 병원장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진주에 살아 고향을 진주로 여긴다. 초·중·고를 진주에서 나와 1982년 서울대 화학과를 입학했다. 과학자가 꿈이었지만 그 시절을 비켜갈 수 없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때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85년에 제적됐어요. 그 뒤에 잠깐 복학 조치가 있어 졸업장은 땄습니다. 한 학기 남아서 따긴 땄는데 별 의미는 없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때 마산과 창원지역은 노동자들의 열기로 들끓었다.

“서울에 있다가 87년에 창원에 내려왔습니다. 그때 노동운동한다고 내려왔죠. 88년에 봉암동에 있는 중소공장 마찌꼬바에서 일했어요. 작은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년 이장규는 일부러 고향인 경남으로 노동운동을 하러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위장취업은 싫었다.

“위장 취업은 아니었고 큰 공장에 들어가려면 그래야 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작은 공장이라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 이름 빌리기 싫어서 그냥 작은 공장을 돌아다녔죠. 당시는 공장 단위가 아니고 지역 단위 모임 성격이 강했지요. 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였기 때문에 그때 마창 지역에 지역단위 노동조합이 아주 활발했거든요. 당시 노동운동중심지가 마창이었습니다.”

이장규 진해드림요양병원 병원장./박일호 기자

인기 만점 수학강사

먹고사는 문제가 급습했다. 불연속적으로 공장생활을 하던 그는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도 했다. 자기 인생이 파란만장했었다고 너털웃음을 보인다.

“91년(스물여덟)쯤 생활이 매우 어려웠거든요. 서울에 잠시 갔을 때는 24시 만화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을 했죠. 숙식해결을 하는 곳을 찾은 게 만화방이었으니까요.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때만 하더라도 집이랑 연락도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다. 1994년에 마산학원에서 재수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아이들 마음을 유심히 살폈던 그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강사일 수밖에 없었다.

“저 같은 경우는 애들이랑 굉장히 친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학원 강사면 그냥 다들 공부만 잘 가르쳐 주면 된다고 그러는데 아니거든요. 애들은 알아요. ‘저 선생님은 자기 할 일만 하는 선생님이다’ 느끼고 판단합니다.”

재수생인 아이들이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건물에 갇혀 공부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 학교처럼 운동장이 있는 것도 어떻게든 재미있게 가르치고 애들에게 장난도 많이 걸었다.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특히 재수생들이 다닌 학원이라 종합반이다 보니 학교와 비슷했죠. 1년을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애들이 알아요. 인기가 있었던 건 자신들을 많이 이해해준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수학 실력도 가르치는 능력도 영 나쁘지는 않았지만요.”

경제력이 생기니 결혼도 생각할 수 있었다. 1993년 고향 진주에 학원 강사를 구한다기에 갔다가 국어 강사를 지원한 아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1994년 열애 6개월 만에 결혼했다.

“똑똑하고 예뻤습니다. 학생운동을 했던 아내와 대화도 잘 통했고 무엇보다 비슷한 고민을 하던 시기에 만났으니 의지도 많이 됐지요. 그리고 집에서 각자 선을 보라고 난리였던 때라 선봐서 결혼하는 건 싫었거든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는 연애시절이라 말한다. 짧은 연애시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삶의 전환점, 민주노동당

1997년 ‘국민승리 21’이 창당했다. 학원 강사로 운동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그는 진보정당에 마음이 끌렸다. 후원을 해야겠다고 시작한 당원 생활이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정책위원장까지 맡아 하고 있었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는 한동안 운동이랑 좀 멀어졌었어요. 왜냐면 힘들기도 했고 생계문제도 있었고. 저한테 민주노동당이 인생을 바꾸게 한 계기인데. 당시에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돈을 꽤 벌고 있을 때니까 처음에는 그냥 우리나라에 진보정당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후원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그냥 돈만 벌 수 없지 않으냐는 생각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좋았지만 학원 일을 오래할 건 못 된다 싶었다. 서른여섯 한의사가 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다 였어요. 어릴 적에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화학과를 갔는데 대학가서는 학생운동 하면서 공부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더 절실했죠. 그러다 먹고살려고 학원 강사를 한 거였고. 99년에 한의대를 가려고 수능을 다시 봤는데. 예상외로 점수가 잘 나와서 재수 안 하고 부산에 있는 동의대 한의학과에 입학했죠.”

2000년도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도 졸업이 또 늦었다. 당 활동을 하느라 휴학을 몇 번이나 했다.

“민주노동당에서 2002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 제가 정책 일을 맡았거든요. 선거 공약 만들고 하는 거였는데. 처음에는 한의대 공부랑 정책 일이랑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 해보니 그렇게 안 되더군요. 왜냐면 정책을 맡은 사람이 여럿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약만 만들어 끝나는 게 아니었지요. 선거 기간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에서 보낸 질의서에 답변서 만들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장규 진해드림요양병원 병원장./박일호 기자

아침에 신문, 잠들기 전에 책

일상이 궁금했다. 아침에 눈 뜨면 신문을 보고, 잠들기 전에는 책을 본다는데 뭔가 밋밋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내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평가와 책 소개도 잊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지만 경남도민일보를 제일 먼저 봅니다. 물론 다른 신문도 같이 보죠. 1면에 지역주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서 좋더라고요. 보통들 뉴스 가치를 많이 따지는 편인데 그에 관계없이…. 기사 하나 하나 평가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편집이 마음에 듭니다.”

주로 책을 읽다 자는 편이라 불 켜놓고 자는 경우가 많아 아내에게 많이 혼나는 남편이다. 책 얘기를 하니 말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집중하면 말이 빨라진다.

“맥닐은 역사를 거시 기생과 미시 기생으로 구분해서 봅니다. 거시 기생은 전쟁을 통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기생한다는 관점으로 본 것이죠. 그리고 미시 기생은 세균이 우리 인간에게 기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세균에게 기생 당하는 거고, 인간 집단끼리는 전쟁을 통해서 기생하는 것이라 보는 거죠. ‘전염병의 세계사’는 미시 기생 관점으로, ‘전쟁의 세계사’는 거시 기생 관점으로 썼죠.”

한약보다 때로는 대화로 치료

10년 뒤, 예순이 되면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한의사와 진보정당 당원.

“단기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위안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물론 치료가 우선이지만 만성질환이나 퇴행성 질환 환자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라 가족처럼 대하는 게 오래가는 병원의 비결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장규 진해드림요양병원 병원장./박일호 기자

그는 일반 한의원이 아닌 요양병원을 차린 이유를 “환자와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한의원은 외래 진료가 대부분이지만 병원은 입원 치료가 가능하다.

“환자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물론 한의원도 정기적으로 환자가 직접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입원 환자를 치료하고, 계속 경과를 지켜보고 매일 회진을 돌며 환자를 살피는 일이 저에게 맞더군요.”

진해드림요양병원은 입원환자가 대부분이고 오전에는 내과전문의와 외과전문의가 회진을 돌고, 오후에는 한의사가 회진을 돌며 환자들을 치료한다.

환자들 중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많다. 한국 할머니들은 대부분 한이 많다. 미운 정까지 든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외롭고 몸이 쇠약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장규 병원장은 “마음의 병을 얻은 할머니 얘기를 한 시간 넘게 들어준 경험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환자를 치료한다는 게 꼭 비싼 한약을 처방하지 않아도 된다. 침구를 사용해 치료하고 환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속에 응어리를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원장이 보기에 70대 할머니 한 분이 요양병원을 찾아왔지만 기력이 떨어졌을 뿐 특별한 질환이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는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장규 병원장은 페이스북 친구가 3000여 명에 달한다.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원칙이나 기준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을 만날 때 특별히 가려서 만나는 건 아니고. 근데 제가 생각하는 기준은 되게 넓은데, 대신 그 기준을 벗어나면 냉정한 편이죠. 기준에 벗어나는 건 예를 들면 말을 쉽게 바꾸는 거죠. 생각이 달라진 건 인정합니다. 근데 생각이 달라졌으면 달라졌다고 해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에 한 말 다르고 뒤에 한 말 다른 경우를 싫어하는 편이죠.”

사람 이장규는 고집이 있어 보였지만 아니었다. 또한, 세상을 길게 보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원칙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원칙을 잃어버리는 건 싫습니다. 한꺼번에 열 발자국 나가는 것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천천히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발자국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가야 한다고 보는 편이죠.”

미리 써본 묘비명. 물론 묘비를 안 세울 수도 있다. 수목장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 남기고 싶은 묘비명을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 받고 싶어요. 제 개인이 어떤 사람이었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라 봅니다.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한테 ‘그래도 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던 게 좋은 기억이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묘비명은 미리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다’ 라고 만들어졌으면 좋을 것 같네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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