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父子), 21년생 도라지로 ‘인간 사랑’을 말하다

진주 장생도라지 이영춘 대표를 ‘강소농’, 즉 ‘작지만 강한 농업인’이라고 소개하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이 대표는 ‘농민’이라기보다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중소기업 경제단체 ‘이노비즈협회 경남지회’ 지회장이기도 한 이영춘 대표는 지난해 중소기업기술혁신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고, 장생도라지가 2012 대한민국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족 생각? 안했지. 허허”

/ 사진 김구연 기자

한평생 도라지에 미쳐 산 이성호(83) 장생도라지 연구원장. 이영춘(57) 대표 등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4남 1녀의 자식들은 그만큼 단단하고 강해졌지만, 집을 나가 산에서 몇 년을 살 정도로 도라지 생각뿐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어린 시절 없을 수 없었다.

평균 수명이 3년인 도라지를 특허받은 재배법으로 21년이나 키워 제품을 만들어내는 진주 장생도라지 이성호 원장과 이영춘 대표 부자.

“내 인생을 포기하더라도 좋은 도라지를 키워내면 인류가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하는 이성호 원장 앞에서 아들 이영춘 대표는 별다른 말을 잇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대표 자신도 지금은 도라지에 미쳐 있으니까.

이성호 원장과 도라지의 질긴 인연은 그의 나이 14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때 한동네 살던 54살 먹은 사람이랑 같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어. 그런데 이 사람이 결핵이 있어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살던 사람이야.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 이 사람이 도라지를 한 뿌리 캐서는 씹어 먹었거든. 나한테도 조금 떼서 주는데 입에 넣어보니 맛도 없고 해서 에이 하며 팽개쳐 버렸지.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은 듯이 뻗어서 사흘 반을 자는 거야. 달포쯤 지나서 동네 어른들이 ‘그 사람이 먹은 게 불로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도 예사로 들었지.”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이 원장이 군을 제대하고 돌아와서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닐 때였다.

“아, 그 사람 집에 갔는데 아내라며 못 보던 여자가 같이 살고 있는 거야. 결핵 때문에 혼자 엉망으로 살던 사람이 말이야. 또 나이 50만 넘어도 머리가 하얗게 세는데 그 사람은 머리도 까맣고 건강하게 일도 잘하고. 신기하더라고. 그날 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도라지 생각만 했어. 인류를 위해 도라지를 한번 잘 키워보자고.”

스물여섯 젊은 혈기. 하지만, 쉽지 않았다. 3년쯤 자라면 도라지 뿌리가 썩어 버렸다. 심으면 썩고 심으면 썩고.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도라지 또라이’라며 손가락질하던 동네 어른들이 하루는 나를 불러 야단을 쳤어. 이웃들에게 빚도 많고 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다시는 도라지를 심지 못하게 하자고 회의까지 한 모양이었어.
결국, 동네에서 못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지. 그때 이미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었어. 가족 생각? 안 했지. 허허허. 가족을 생각하면 갈 길을 못 가. 저녁에 아무도 모르게 옷 보따리를 살짝 싸서 새벽 3시에 혼자 도망을 갔어.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로. 그리고 도라지로 성공할 때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맹세했지.”

그렇게 4~5년이 흘렀다. 마치 야생 짐승처럼 산에서 살며 도라지를 키웠다.

“어느 날 길 한쪽에 도라지 3포기가 있는 것을 봤는데, 썩은 뿌리를 다 자르니까 뇌두만 남더라고. 그냥 버릴 판이었지. 그렇지만, 버리면 햇빛에 그대로 말라버릴 거 아니야. 그게 안타까워 땅에 묻어놓고 갔지. 그리곤 잊었어. 3년이 지나 산길을 가다가 도라지 3포기가 있는 것을 보고서야 예전 일이 기억났어.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 3포기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파보니까 뿌리가 새로 나와서 크고 있더라고. 아, 도라지는 옮겨 심어야 하는구나 느꼈지.”

이때부터였다. 20년 이상 사는 ‘장생 도라지’의 재배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 사진 김구연 기자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원망

이성호 원장이 ‘장생 도라지’를 만들었다면, 이영춘 대표는 앞서가는 기업 마인드와 마케팅 기법 도입으로 오늘날의 ‘장생 도라지’를 있게 했다. 이 대표의 첫 마디는 “고집 센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다”였다.

“어릴 때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컸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 할 상황이었죠. 하지만, 고등학교는 나와야 살아가겠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돈을 벌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기능인을 우대하던 시절, 실업계 고교에 진학한 이 대표는 자격증을 3개나 따고 졸업했다. 그 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10년, 삼성테크윈에서 11년을 근무하게 된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생계에 무관심했습니다. 자식들이 알아서 커야 했죠. 그뿐 아니라 자식들이 버는 돈을 족족 아버지가 도라지에 투자하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한마디로 갈취였죠. 빚이 계속 늘었습니다. 삼성중공업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삼성테크윈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때부터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아버지 이 원장은 우여곡절 끝에 도라지 사업을 계속 넓히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연구 끝에 20년은 넘어야 도라지가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러다 1989년 한 지역 신문에 소개됐는데, 그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생도라지 판매로 하루 1000만 원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1987년 이 원장은 2억 8000만 원의 빚이 있었다. 개인으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진주 시내에 2층 양옥집 20채를 살 수 있는 돈. 약 3년간 도라지가 대박을 치자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이제 도라지를 그만 하시라고 자식들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니 볼일 봐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돈이 생기는 대로 지리산에 도라지를 심었습니다.”

그러던 부친이 1995년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평생 도라지를 심고 키우는 것만 해온 이 원장이었다. 아들은 또 말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1996년 14억 3000만 원을 들여서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설사가 부도나서 도망가기도 하고…. 결국 20억 원이 넘게 들었습니다.”

1997년 말이 되니 빚이 다시 28억 원이 돼 있었다. IMF 외환 위기 직전이었다. 1997년 10월 추석 가족회의가 열렸다. 장남이 회사로 들어오기로 했다.

“아내가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8억 원 빚을 끌어안게 됐으니까 당연히 반대를 하죠. 6개월간 말도 안 했습니다.”

/ 사진 김구연 기자

빚더미 공장에서 이룬 성공신화

아버지가 키운 도라지에 이 대표는 전문적인 마케팅을 접목했다.

회사를 맡은 이 대표는 먼저 부채와 사업 분석부터 했다.

“당시 은행 빚이 17억 원, 사채가 11억 원이나 됐습니다. 월 매출을 고스란히 은행 이자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악성부채를 하나하나 저금리의 국가 정책자금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금융권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다들 웃었다.

1997년 매출 2400만 원의 회사. 하지만, 이 대표는 1998년 초 회사를 맡아 그해 매출 10억 1200만 원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빚이 늘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듬해 20억 원, 그 이듬해 3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대표가 재무구조 조정과 함께 시도한 것이 임직원들의 의식 개혁이었다.

“와서 보니까 직원들이 기본이 안 돼 있었습니다. 출퇴근 시간조차도 엉망이었죠. 출근해서 20~30분 동안 정신교육을 했습니다.”

처음 반응은 싸늘했다. ‘대기업에서 하던 것을 조그마한 회사에 적용해서 어쩌자는 거냐’는 냉소가 가득했다. 이 대표는 개의 않고 스스로 솔선수범을 보였다.

“당시에는 내가 대표가 아니라 관리이사 직함이었습니다. 직원은 달랑 8명인데 구내식당 입구에는 벗어놓은 신발이 뒤죽박죽이었죠. 신발정리, 화장실 청소, 정리정돈 등을 6개월 하고 1년을 하니 서서히 따라오더군요. 1분이라도 지각을 하려면 월급은 그대로 주겠으니 그날은 출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직원들의 태도가 바뀌어 갔습니다.”

다음으로, 이 대표가 추진한 것은 ‘표준화’이다.

항공기 생산 공정 관리 방식을 도입했다. 설계자의 의도대로 안전하고 정확하게 공정이 수행되고 전 제품의 생산 이력이 문서로 기록되는 품질실명제를 운영했다.

“전화 응대 매뉴얼부터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업무 매뉴얼, 작업 표준서 등 매뉴얼이 있으면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기본이죠. 그리고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월급 많고 비전이 있으니까 대부분 직원이 장기 근속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다들 양지 바른 곳을 찾아 도망가는 게 당연합니다.”

/ 사진 김구연 기자

지역 발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장생도라지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도라지 진액과 분말, 환, 화장품, 술 등이 있다. 매출은 80억 원, 이 중 수출이 20억 원 규모이다. 베트남 수출 시장도 조만간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4년 전 첨단 시설을 갖춘 2공장을 짓고,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18년 전 아버지가 지은 1공장은 올해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다.

장생 도라지는 53만 ㎡(16만 평), 약 200 농가에서 위탁계약 재배하며, 면적은 해마다 늘고 있다. 물론 식재·이식·수확 등은 장생도라지 지도팀에서 전담하고 있으며, 농가에서는 기술지도에 따라 도라지 관리를 한다.

또 농산물을 이용한 제품개발 기술을 특허 출원해 다년생도라지 재배방법 등 국내 특허 26건, 국제 특허 10건, 국내 상표 13건, 국제 상표 4건의 산업재산권을 확보하고 있다.

“그 지역에 어떤 기업이 있느냐에 따라 지역 발전이 좌우됩니다. 옛날 진주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대동공업사처럼 진주의 발전을 이끄는 기업으로 만들겠습니다. 지역 사회에 살면서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힘이 들어도 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원장은 1999년, 아들 이 대표는 2006년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경남벤처농업협회장을 5년 이상 역임한 이 대표는 현재 이노비즈협회 경남지회장을 맡아 중소기업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다.

◇추천이유

△김의수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지원기획과장

   
  김의수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지원기획과장  

장생도라지 이영춘 대표는 평균 수명이 3년인 도라지를 20년 이상 죽지 않고 자라게 하는 재배법(특허 제045791호)으로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 220여 위탁재배 농가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 수출 누계 1200만 달러를 초과 달성해 외화 획득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출거래선 바이어 1200명 이상을 초청해 장생도라지 방문 연수를 하고 지역 농업을 관광에 접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등 우리농업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재배농가, 유통망, 임직원 등 연간 350명 이상의 고용 효과를 창출하는 농업의 대표적인 CE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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