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국회 보좌진 생활 이어 정부업무 참여

보건복지부 안소동 장관정책보좌관은 경남 창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과정을 모두 마친 창원 토박이다. 1월 9일 국회에서 만난 안 보좌관은 지난 1992년부터 13년간 김종하 전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다. 그는 “보좌진 생활을 시작한 첫 해인 1992년도 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어 지역구 관리를 겸해서 지역에 1년 정도 있었다”며 “1993년 1월부터 본격적인 서울생활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안 보좌관은 행정자치부 지방행정혁신 평가위원(2005년), 국가균형발전사업 평가위원(2006년)을 역임했고, 창원대학교 행정학과 등에 출강(2005~2007년)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에는 정부를 대표해 대북식량차관 남측 인도위원으로 북한(함흥, 흥남)을 방문해 대북업무를 수행했고, 이명박 대통령후보 직능특별보좌관역과 선진국민연대(미래사회국민포럼)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3년간 경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국가균형발전과 지역혁신 연구를 맡았고,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소속 지방분권촉진위원회 제1실무위원으로서 지방분권운동에 참여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지식경제부 차세대소재성형기술개발사업단 사무국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외로운 서울살이에서 학업의 길 선택

9일 국회에서 만난 보건복지부 안소동 장관정책보좌관은 경남 창원 토박이다. 그는 지난 1993년 1월부터 본격적인 서울 정치권 생활을 시작했다. / 사진 조문식 기자

안 보좌관은 첫 서울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해 “지역에서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서울생활 자체가 힘들었다”며 “한겨울에 서울에 오니까 춥고 길도 잘 몰랐다”고 답했다. 이어 “당시 대통령 선거와 겹쳐 결혼식도 미뤘다”며 “1993년 1월에 결혼식을 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신혼이고 하니까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갔다”고 웃으며 말했다. 연세대 부근인 신촌에 신혼집을 마련했다는 안 보좌관은 “그 당시 영하 10도…이렇게 내려갈 때 너무 추웠다”며 “집사람과는 연애결혼인데, 정치적인 인연으로 만났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혼에 대해 안 보좌관은 “당시 마산 회원동 안에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우리 집사람이 그때 레코드 가게를 했다. 지역구 인사를 다니면서 그 가게를 들어가게 됐다”며 “그때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집사람과의 인연도 정치가 맺어준 인연”이라고 회상했다.

서울에서의 첫 겨울과 허전함, 의원회관 생활에서의 소외감 등은 그에게 학업의 길을 선택하는 배경이 됐다. 안 보좌관은 “소외감이랄까 허전함을 많이 느꼈다.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해서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1994년~1997년)에서 행정학으로 석사 공부를 마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1998년~2004년)에서 행정학박사 과정을 마쳤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안 보좌관의 정치권 행보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안 보좌관의 정치인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 정치권 입문에 앞서 선거운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대학 다닐 때 학생회 간부 활동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조직 활동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9일 국회에서 만난 보건복지부 안소동 장관정책보좌관은 경남 창원 토박이다. 그는 지난 1993년 1월부터 본격적인 서울 정치권 생활을 시작했다. / 사진 조문식 기자

 졸업하고 한 2~3년 다른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대학 다닐 때의 막연한 정치랄까 조직, 이런 것에 대한 어떤 동경이 생각났다. 대학에 다닐 때인 지난 1988년도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우리 고향 선배인 김종하 후보(전 국회부의장)를 돕기 위해 학생신분으로 선거에 깊이 관여를 했다. 그 당시에 선거가 민정당, 통일민주당 후보와 무소속 김종하 후보…이렇게 3파전이 됐다. 당시 용동이란 동네가 있었다. 지금 도청 뒤에서부터 창원중앙역 그 쪽이었다. 내가 거기 출신이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지금의 사림동으로 가까웠다. 고향 선배였고 해서 선거를 도왔다. 그럼에도 낙선을 했다. 14대에 그 분이 민자당으로 공천을 받고 나왔다. 그 때는 인구가 30만 명이 넘어 분구가 됐다. 김종하 전 국회부의장이 당시 창원갑구, 황낙주 전 국회의장이 당시 창원을구로 당선됐다. 여기서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학생회 간부를 했기 때문에 마산·창원권의 총학생회 회장 출신들 약 10여 명을 캠프로 운영했다. 총학생회 간부를 했던 후배들이 많이 도와줬다. 선거가 끝이 나고 김종하 의원과 고생했던 사람들에 대한 식사자리가 있었다. 거기서 ‘후배 중에 한 사람도 의원 보좌관으로 추천하니까 써 달라’라고 말했다. 김 의원이 ‘그러면 생각이 있느냐?’라고 물어서 내가 ‘정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비서관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보좌관이 2명이지만, 그 당시는 보좌관이 4급 1명이었고, 비서관도 1명이었다. 내가 일어나서 인사를 하면서 정치를 한번 배우고 싶다 그 기회를 달라고 했다. 당시 김 의원이 웃으면서 ‘이 친구들이 모두 압력부대들이구만’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 13년 동안 정치권에 몸담으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다. 어떤 행보를 이어갔는가?

“제14대 김종하 의원 비서관 이후 제15대 말께 김 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이후 제16대에서도 김 의원의 보좌관으로 13년 동안 정치권에 몸을 담았다. 지난 2004년까지다. 당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대학원 학비를 조달하기 어려운 적도 있었다. 그래서 처가댁에서도 한 번씩 등록금 대주기도 하고 그랬다.(웃음) 보좌관 생활을 13년 정도 하다보니까 좀 고향에 대한 생각도 나고, 또 내가 직접 지역에 가서 뭔가 지역에 일을 해보고 싶은 그런 생각에 이후 가족들 데리고 지역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그때 지역에 있으면서 도의원으로 한 번 출마한 적도 있다. 그렇게 있다가 마침 김혁규 경남지사의 사퇴로 도지사 보궐선거가 있었다. 김태호 당시 거창군수가 출마했고, 김태호 후보를 도왔다. 그 이후 (재)경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옮겨가게 됐다."

- 정치권에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지난 2003년에 ‘대북식량차관 남측 인도대표 부단장’ 당시가 기억에 남는다. 부단장으로 갔을 때의 기억이…. 당시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했기 때문에 차관 형식으로 우리가 식량을 전했다. 당시 우리나라 대표로 갔는데 그 때 쌀 7000톤을 싣고 우리 고향 마산항에서 출항했다. 흥남으로 직접 갔다. 그때 출항을 해서 공해상으로 갔다. 36시간을 타고 흥남항에 도착했다. 그때 NLL을 넘어갈 때의 긴장감이랄까. 넘어가기 전까지는 해군이 우리를 경호했는데, 해군들과의 마지막 교신이 ‘저희들 임무는 이것으로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북한 대표단과의 러브샷(2003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십시오’였다. 당시 레이더상의 NLL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스러움과 긴장이 교차됐다. 그렇게 해서 북한의 흥남항에 도착했고, 북한의 대남요원들이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이어 흥남항 바다위에서 저쪽(북한) 사람들이 우리 배를 타야 했다. 그게 국가 간 협정이다. 그쪽 바다에 가면 그쪽 항해사가 배에 탑승해 운항하도록 돼 있다. 배에서 항해사들과 북한의 군인 등이 우리 배에 올랐다. 가까이에서 그 사람들을 보니 어떤 사람은 총도 차고 있었다. 북한의 사람들을 부딪쳤을 때 신비로움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 ‘대북식량차관 남측 인도대표 부단장’으로 북한에 가서 어떤 것들을 보고 느꼈나?

“그(북한) 사람들이 배를 몰았고 북한의 흥남항에 파킹이 됐다. 정식적으로 배 안에서 북한 대표단과 남한 대표단이 앉아서 쌀 인도·인수 서명식을 하게 됐다. 서명을 하기 전에 아침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침식사를 배에서 제공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거절을 하더라.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은 먹겠다’라고 했다. 숟가락을 집어 들고 쌀밥을 한 숟가락 먹는 순간에 순식간에 한 공기를 비웠다.

쌀 인도·인수 서명식(2003년)

 우리가 담배와 캔 맥주도 제공했다. 인도·인수서명식에 참여했던 요원들도, 당시 북한의 요인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캔 맥주 2캔 정도를 마셨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이라는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흥남항이 제2의 항구인데, 당시 시설을 보니까 창고가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주위 산은 민둥산이었고, 경비를 서는 군인들은 어린 나이에 체구가 작고…이런 모습들이었다. 한마디로 황량한 풍경이었다. 밤이 되니까 깜깜하고 가끔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

- 이제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다. 향후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있는가?

“다음 정부가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몇 가지 고민 중에 있다. 고향에 가서 일을 해보고 싶은 계획과 중앙정부에서 일을 하는 계획을 놓고 고민 중에 있다. 늦어도 2월에는 결정을 할 계획이다.”

북한 흥남항에서 촬영한 안소동 당시 대북식량차관 남측 인도대표 부단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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