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자 원고 하나 때문에 매일 괴롭고 행복해”

2000년 7월 5일 <경남도민일보> 8면 오른쪽 하단에 작은 상자 기사 하나가 자리를 정한다. ‘전의홍의 바튼소리’라는 문패를 걸고 나온 글 제목은 ‘녀름·여름(夏)·여름(實’). 세태에 대한 날 선 단상에 시조 한 자락을 곁들인 유별난 칼럼은 그렇게 시작된다. 지난해 <경남도민일보> 마지막 발행일은 2012년 12월 28일, 지령 3767호다. 같은 날 11면에 게재한 ‘바튼소리’는 3412번째 글이었다. 600자 ‘글 감옥’에서 매일 고통스럽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칼럼니스트 전의홍(73) 선생을 만났다.

전의홍 선생은 진해 풍호동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현관에 들어서자 입구 오른쪽에 작은 방이 있다. 방 한쪽 벽은 철제 앵글로 짠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다. 책꽂이에는 내용물을 가득 채운 노란 봉투가 줄맞춰 꽂혀있다. 다른 쪽 벽 절반을 차지한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그 옆에 붙인 책상 위에는 책들이, 아래에는 ‘바튼소리’ 원고를 모은 스크랩북이 순서대로 정리돼 있다. 한쪽 구석에는 좁은 벽에 기댄 작은 책꽂이가 자리를 정했다. 방 한쪽에 펴놓은 상 위에는 오려둔 신문과 책 그리고 원고지와 연필이 놓여 있다. 한 장에 600자를 적을 수 있는 맞춤 원고지 아래 구석에는 ‘全義弘 전용 원고지’라고 적혀 있다. ‘바튼소리’ 원고 한 편은 600자 원고지 한 장에 담긴다.

“늘 피가 마르고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요. 누군가 말처럼 이 일이 바깥을 향해서는 큰소리치는 것 같으면서도 마감 시간 앞에서는 또 늘 시달리고 작아지지요.”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소년을 다듬은 엄한 어머니

전의홍 선생은 충북 영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생일 때 이미 한자 2000자 정도를 읽고 썼을 정도로 재능이 두드러졌다. 어린 의홍은 그때부터 한자 소리와 뜻을 뒤틀어 갖고 노는 것을 즐겼다.

‘바튼소리’를 쓰는 감각은 그때부터 다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의홍 선생은 그런 재주보다 엄한 어머니께서 단속하고 살피던 마음가짐에 대한 빚이 더 큰 듯했다. 상당 시간 어머니 얘기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평범한 아낙네였어요. 당시 대부분 어머니들처럼 배움도 짧았고요. 그런데 외가가 서당을 했는데 귀동냥이 많아서 그런지 말 한 마디나 몸가짐이 남달랐습니다. 무슨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닌데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 있잖아요.”

어머니는 사리에 밝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 또한 명확했다. 본인이 아니다 싶으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도 당당하게 거부할 줄 알았다. 어머니는 당시 사람들이 막 대하던 머슴들에게도 꼬박꼬박 존칭을 쓰며 하대하지 않았다. 어머니 보기에 그들은 머슴이기 전에 사람이었고, 같은 사람끼리 다른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새겨주곤 했다.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사람은, 특히 사내는 새파란 가슴으로 살다가 새파랗게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직장에서든 사람들 사이에서든 절대 욕심 부리지 마라. 상(賞)도 사양하고 받지 마라.”

말 한 마디에 담긴 내용, 골라서 쓰는 단어 하나조차 예사롭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태도와 말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분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아들이 지닌 재주를 눈여겨보고 이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도 귀신같은 통찰이다.

“네 성정과 재주를 잘 알고 있다. 혹 훗날 신문이 네게 무슨 특별한 것을 좀 해 보라고 일을 맡길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기꺼이 새파란 ‘혼칼’을 빼 들어라.”

전의홍 선생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혼칼’이라는 게 ‘바튼소리’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가다듬은 좌우명을 소개했다.

‘수분지족(守分知足)’과 ‘묵거묵거(黙居黙去)’ 두 가지다. 하나는 ‘분수를 지키는 가운데 만족을 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자’는 뜻을 담았다.

“그런데 ‘묵거묵거’는 발음이 ‘묶어묶어’와 같지요. 속에 ‘욕심을 묶어묶어 절제하는 길로 가자’는 뜻을 속에 담았어요.”

 

유별난 교열 데스크

전의홍 선생은 ‘바튼소리’로 경남도민일보와 연을 맺기 전에 3개 신문사에서 일했다. 경남일보, 경남매일, 동남일보다. 경남일보와 경남매일에서는 교열기자를 했고 동남일보에서는 편집부국장까지 맡았다. 그는 일단 기자들이 쓴 기사에서 오·탈자를 찾아내는 일에만 만족하는 기자는 아니었다.

“옛날에는 내근기자가 외근기자에게 은근히 기죽어 지내는 게 있었어요. 그 꼴이 보기 싫었지요. 특히 그때는 되먹지 못한 기자들도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지요.”

언론인으로서 사명은커녕, 평범한 사람 기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기자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기 싫었다. 밖에서 봉투 좀 받았다고 편집국에서 돌리는 짓거리도 구역질이 났다. 전의홍 선생은 그때부터 아예 외근이라면 손사래를 쳤다. 때 타지 않고 제 모습 지키려면 그나마 신문사 안이 더 안전하다 싶었다. 게다가 교열기자는 취재기자 앞에서 기죽을 일도 없었다. 제 기사 하나 제대로 완성 못하는 기자가 교열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 일은 없었다. 여기에 전의홍 선생은 한 가지 무기를 더 갖춘다.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내근기자도 반드시 글을 써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남일보 시절에 고정 미니 칼럼 두 개를 쓰면서 일반 칼럼까지 하나 맡았지요. 일단 기사는 외근기자만 쓴다는 고정관념부터 깨고 싶었어요. 그리고 신문에 고정으로 뭘 하나 쓴다는 게 저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도 알았지요.”

전의홍 선생은 매일 20여 개 신문을 보면서 칼럼을 찾아 오려내고 공부했다. 그때는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해 기를 쓰고 칼럼을 준비했다. 후배들 중 일부는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왜 굳이 내근기자가 기사까지 써야하느냐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전의홍 선생에게 글은 자존심이었고 무기였다.

“당시 회사 경영진에게도 거침없이 싫은 소리도 많이 했어요. 몇 번이나 쫓아내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고정 연재물이라는 게 지닌 힘이 무서워요. 신문에서 딱 한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까 아무나 쉽게 못 건드리지요. 그게 큰 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의홍 선생은 그런 무기를 내근하는 기자들이 모두 하나 정도 갖추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스스로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의홍 선생은 6년 남짓 교열과 더불어 고정 칼럼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처럼 치열했던 언론사 생활은 신문사가 문을 닫으며 중단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까지 숨을 멈출 것이라고는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생각하지 않았다. 2000년 7월 5일 <경남도민일보>에 나온 ‘바튼소리’에는 제목과 함께 전의홍 선생 사진이 붙었다.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모든 일상의 중심 ‘바튼소리’

‘바튼소리’는 윤석년 경남도민일보 논설고문이 생각해낸 이름이다.

윤석년 논설고문은 당시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전의홍 선생은 2000년 7월 24일자 ‘바튼소리’에 그 뜻을 풀이해둔다. 글에는 ‘바튼’에 담긴 뜻으로 ‘뱉다’, ‘바특하다’가 나온다. 그리고 늘 빠지지 않는 시조 형식 덧붙임 글에 ‘삭막한 생활 기름치듯 / 해학으로 양념을 한 뒤 / 톡 쏘는 맛 풍자 겨자 / 곁들인 것이 <바튼소리>!’라고 설명했다.

“그때 제 별칭이 ‘전칼’이었어요. ‘전의홍 칼럼니스트’를 줄인 것이지요. 어차피 주위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기왕 칼인 바에야 촌철살인 ‘비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의홍 선생은 오전 5시 30분에 하루를 시작한다. 30분 동안 누운 자세에서 손을 비벼 눈을 문지르고 발바닥을 문지르며 하루 소진할 기를 충전한다. 그리고 현관에서 신문을 들고 와 상에서 자와 연필로 분류 작업을 한다. 8시쯤 아침 식사를 하면 그때부터 글을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한다. 그렇게 정리한 자료는 언제든 또 글 재료로 쓰인다.

벌써 13년 넘게 되풀이한 일상이다. 그렇게 완성한 ‘바튼소리’ 한 편은 팩스로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에 전송한다.

선생이 줄을 긋고 오리고 풀을 붙인 자료들은 정해진 기준대로 제자리를 찾는다. 글을 쓰는 좌상 아래에는 자료 분류표가 A3종이 두 장 크기로 적혀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료를 찾을 일이 있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 꺼내놓곤 했다.

“너무 아날로그 방식이지요? 그래도 아날로그 방식이 사람이 부지런하게 하는 게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느리지만, 또 저에게는 가장 빠른 방식이지요.”

전의홍 선생은 협심증, 척추협착증, 빈혈, 불면증, 목 디스크를 앓고 있다. 몸을 붙드는 병들은 종종 정신이 뻗어나가는 데도 걸림돌이 되곤 한다.

“난 ‘바튼소리’ 하려고 타고난 사람 같아요. 힘들어도 계속 써지고 계속 글 생각만 해요. 그렇기 때문에 병이 더디게 낫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병이 나도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또 ‘바튼소리’ 같아요.”

다른 사람 글을 읽다가 맞장구치는 글귀가 있으면 오려두거나 메모해야 한다. TV를 보더라도 시간 빼앗긴 만큼 글에 쓰일 것 하나라도 반드시 건져 본전을 맞춰야 한다. 그에게 600자 ‘바튼소리’ 한 편은 세상을 보는 창이고 세상이 담기는 바구니다.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전의홍 칼럼니스트 / 사진 박일호 기자

‘정론직필’에서 ‘정론’만 있어도 된다

평생 자신에게 엄했던 노(老) 언론인은 후배 기자에 대한 애정 또한 감추지 않았다. 기자가 기자답지 않았기에 언론이 언론일 수 없었던 시절을 겪었기에 현장에서 땀 흘리는 후배들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컸다.

“요즘 후배 기자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 흐뭇하지요. 가끔 기사 잘 봤다고 전화도 한 번씩 해요. 전에는 그런 게 영 낯설었는데 한 번 하고 나니까 그것도 좋더라고요. 내가 먼저 다가가야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러면서도 날선 조언을 덧붙였다.

“정론직필, 이 말이 얼마나 무섭도록 좋은 말입니까. 사실 뒤에 나오는 ‘직필’은 생략해도 돼요. 앞에 두 음절만 제대로 실천해도 뒤는 따라오는 것이지요. 정론에 머뭇거림이 없는 기자였으면 좋겠어요.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고요.”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내가 행복한 일. 전의홍 선생은 그런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 벅차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친북좌파’예요. 저만한 친북좌파가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원고지에 연필로 굵게 ‘親·book·坐·派’라고 썼다. ‘책과 친하고 늘 앉아서 일하는’ 정도로 풀면 되겠다.

 

존경 버무림 흉내 이야기입니다. 경남도민일보 기자 다섯이 모여 <경남도민일보>를 비롯해 다른 신문 네 부를 한꺼번에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한 명이 경남도민일보에도 있고 다른 신문에도 있는 것들을 모두 빼자고 제안합니다. 나머지 기자 넷이 재밌겠다며 냉큼 신문을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1면부터 한 장씩 넘기며 형식이나 내용이 비슷한 것들을 뺍니다.

제목이 다를 게 없는 기사를 하나 뺐고요. 날씨 기사도 뺐습니다. 사설도 당연히 뺐고요. TV 편성표가 나온 판도 그대로 들어냅니다. 광고도 뺐고요. 이 신문에도 저 신문에도 다 들어 있는 기사들도 모질게 오려냅니다. 독자투고도 없는 신문이 없네요. 기자 한 명이 “이러다가 남는 게 하나도 없겠다”며 신문을 모조리 걷어치우려는 찰라, 기자 한 명이 손짓으로 막습니다. 그리고 작은 상자 기사를 가리킵니다. ‘바튼소리’입니다.

육백 자 글감옥에 앉아
‘친북좌파’ 스스로 칭하고
분수를 지켜 만족하고
조용히 살다 가겠다는
전도검(全刀劍)
매일 매서운 죽비소리


- 전의홍 선생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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