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우승’ 정신으로 따뜻한 사회 만드는 나눔 실천

그는 의사다.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일찍이 지역사회에 인술을 펴온 존경 받는 의료인이다. 한편으로 그는 다정한 이웃이고 친구다. 30년 넘게 나눔을 실천해 온 기부천사다. 또한, 그는 대장이다. 도전을 겁내지 않고 전진하여 국외 등반 완주만 15회에 이르는 등산대장이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의사

무학산에 올라 함안 쪽을 쳐다보면 낙남정맥 기슭 아래로 제법 큰 시가지가 보인다. 개천 세 개가 마을을 둘러싸고 흘렀다 하여, 일찍이 삼계라 불리는 고장이다. 현재 명칭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노선호(72) 지부장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4대가 함께 살았던 대가족. 20살, 10살 터울 형만 둘인 늦둥이. 남을 가르치는 게 유독 좋았던 그는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자랐다. 하지만, 6·25로 다니던 시골 학교가 없어지자 난생처음 마산으로 나왔고, 새로운 길을 부여받았다.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당시 큰 형님께서는 마산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어요. 형님댁에 머물 때 의사가 되기를 권유받았죠. 본인이 선생이다 보니 벌이가 좋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계셨을 거예요. 늦둥이 동생이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기를 바라셨던 거죠.”

후에 부산으로 전학 갔다가, 6년 만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형님 뜻을 받들어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막상 의대를 왔지만 전과를 심각하게 고민했죠. 조금만 더 버텨보라는 교수님의 권유가 없었더라면 교사가 됐을지도 모르죠. 지금이야 이 일이 천직 같지만….”

졸업과 동시에 군에 지원했다. 인턴 월급으로는 어림없는 집안 형편도 고려해야 했고, 미국에 가서 의사생활을 시작할 심산에서였다.

“그 당시, 미국에 가려면 군 전역은 필수였죠. 미국 의사 국가고시도 준비했는데, 영어시험까지는 이미 합격도 했었어요. 군에서 정형의 자격도 획득하고…. 준비는 잘 됐지요.”

하지만, 전역과 동시에 마산으로 돌아왔다. 집안 형편상 도저히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종합병원을 전전하다, 마산 불종로에 정형외과를 차리고 20년 넘게 운영해왔다. 그리고 1998년부터 지금까지, 책상 위 명패에는 ‘대한산업보건협회 창원보건센터 지부장 노선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창원산업보건센터의 하루

“주로 방문 진료를 하죠. 최근에는 공장 근로자만을 대상으로 하던 업무가 일반 시민에게도 확대됐어요. 다 함께 건강해질 수 있다니, 좋은 일이죠.”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현재 창원산업보건센터에서는 치과의사 1명, 일반 전문의 9명을 포함, 총 80여 명이 일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작업환경 검사를 하고, 근로자 건강검진을 한다. 또한, 보건관리대행 업무로 건강 상담을 해주고, 센터를 직접 찾아오는 시민에게는 일반진료도 봐준다. 한편, 건강검진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익히 아는 일반 검진 외, 특수건강검진을 별도로 하고 있다.

“특수건강검진은 쉽게 말하자면, 직업병을 진단하는 거죠. 소음공해, 먼지, 냄새 등 작업환경, 업무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방안을 모색해줘요.”

다중이용시설이 느는 추세에 따라 창원산업보건센터 업무도 점차 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문제가 된 불산 가스나, 석면 등 유해물질을 검출하고 농도를 측정하는 일도 그들 몫이 되었다.

현재 노선호 지부장은 건강 상담을 전문적으로 맡고 있다. 건강검진만 10년 넘게 해 오다, 근래에 와 자진해 맡은 업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본 근로자들의 건강상태는 어떨까.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이유는 첫째 근로자 자신이 건강에 대한 지식이 많이 좋아진 까닭이고, 둘째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보호구가 많이 발달하였기 때문이죠. 귀마개, 마스크, 장갑이라든지…. 예전보다 가볍고 질적으로 우수하다 보니 근로자들 건강유지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또 자동화 시스템이 잘 정착되어, 위험요소도 많이 줄었죠. 기계도 가볍고 편리해져, 이제는 남녀 구분없이 안전하게 잘 다루죠.”

현재 그와 직원들은 하루 2~3개 업체를 돌며 건강과 관련한 모든 일을 봐주고 있다. 계약된 업체가 많은 까닭에 연초부터 빡빡한 일정이다. 그는 이러한 일정을 1년 내도록 지속할 것이라 말하면서도 결코 불만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데, 바쁜 게 대수겠습니까.”

30년 기부천사, 산에 오르다

노선호 지부장이 가진 인생철학은 ‘공동우승’ 정신이다.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공동우승은 사람을 향한 정신입니다. 따뜻한 사회를 만들고 모두가 행복해지자는 메시지인 거죠.”

그 정신은 나눔으로 이어졌다. 30대 후반, 로타리클럽에 정식 가입하며 나누고자 하는 씨앗을 품었고, 마산중앙로타리클럽을 창립하고 제3대 회장(1982~1983)에 취임하며 열매를 맺었다. 한편, 나누고자 하는 매개로 로타리클럽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로타리를 선택하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자선단체가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선의를 담은 단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깐, 물질적 봉사 위주가 아닌 직업을 통한 봉사, 재능 기부가 가장 우선시되는 곳이죠.”

회장을 역임할 당시에는 이 기본 정신을 더욱 다졌다. 그는 재임 당시, 장학회를 만들어 결손가정에 베풀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모범사원 표창장도 수여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시설 거주자들을 찾아뵙고, 재능 기부와 손수 준비한 정성까지 골고루 나누었다. 이렇게 축적되던 나눔은 2010년 12월, ‘적십자 자원봉사 2000시간 달성’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한, ‘따사모(따뜻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고 매달 연탄배달봉사, 생필품 전달, 의료지원과 같은 나눔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2010년에는 국제 로타리클럽에서도 클럽 내 최고 권위상인 ‘초아의 봉사상’을 수여, 인도주의적 삶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제가 상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 저는 봉사라는 말보다 나눔이라는 말을 사용해요. 봉사라면 왠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그런 느낌이거든요. 하지만, 진정한 나눔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것 일부라도 서로 나누는 것이죠. 상을 준 이유도 앞으로 더 열심히 나누라는 의미 같아요.”

30년 넘게, 지역 곳곳을 오가며 끊임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왔다. 도대체, 이런 왕성한 체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공동우승’ 정신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사실, 노선호 지부장은 베테랑 산악인이다. 1986년, 지역 유명 산악회인 ‘늘벗산악회’를 조직하고, 20년 넘게 등산대장을 맡아 왔다.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산악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할 때, 반드시 실천하고자 했던 세 가지 신념이 있어요. 하나는 ‘다 함께 정상을 올라가자’라는 공동우승이고, 또 하나는 ‘자연을 훼손하지 말자’였지요. 마지막은 ‘산을 통해 자신을 정리하고, 삶을 돌이켜보자’였어요.”

‘가나다…’ 산 이름 순서로 무작정 올랐던 산과는 벌써 30년 지기 친구다. 그동안, 처음 품었던 신념을 바탕으로 산악회 발전을 도모했고, 축적된 산행기록으로 매년 산악연보를 발간하는 성과도 일궈냈다. 한편,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회원들과 모든 산악인이 한 번쯤 꿈꾸는 백두대간 종주를 달성하며 ‘공동우승’ 정신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마을 뒷산부터 백두대간까지. 산사랑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았다.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와 같은 국외 유명 산에도 15차례나 올랐다.

“해발 5895m.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는 킬리만자로 우후루 피크에 섰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내 모든 세포를 깨우는 듯했어요. 함께 했던 대원 모두가 산과 하나가 되었죠.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렀죠.”

처음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 유명한 산에 주로 올랐던 그지만, 이제는 인적이 드물거나, 산길이 없더라도 숲이 울창한 곳을 더 선호한다. 그렇다면, 국내산 중에서 그가 가장 추천하는 산은 어딜까.

“설악산도 좋지만…. 때론 푸근한 어머니, 때론 묵직한 아버지 같은 지리산을 추천해요. 그 안에는 세상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느낌이거든요. 화려함도 지나치지 않아 싫증도 잘 안 나요. 사람으로 치면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정이 가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뜻밖의 병, 다시 일상으로

거침없이 정상을 향하며, 늘 건강할 줄 알았던 몸도 모든 것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2011년 5월 21일, 일상적이었던 건강검진은 몸속에 ‘식도암’이 자람을 알게 해주었다.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평소 늘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딱히 두렵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기대고 있더라고요. 나 역시 인간이고, 삶을 갈망하는 만큼 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죠.”

진단 후, 주말 내도록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평소와 같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부딪쳐보기로 한다. 이후, 지인들에게 자문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가다, 마침내 식도암수술 제일 권위자를 찾아냈다. 다시 백방으로 진료예약에 힘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약까지 완료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하고 나서부터는 편안해 지더라고요. 죽고 사는 걸 떠나서 일단은 기댈 곳이 생겼으니까요.”

정밀검사를 거친 후, 정확히 알게 된 소식은 식도암 3기. 5년 생존율 28%에 해당하는 병이었다. 직업상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병. 그렇다고 다시 절망할 순 없었다. 비록 미약한 수치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후, 마음을 비우고 차근차근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수술 전날 아들과 목욕탕에 갔어요. 오랜만에, 때나 좀 밀어보라 했죠. 혹시나 잘못돼 염습이라도 해야 한다면, 그전에 미리 닦아놓는 것도 좋으니까….”

그리고 같은 해 6월 29일, 드디어 대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다.

“눈 떠 보니까 살아 있더라고요. 온몸이 회복기구와 연결돼 있어서 여전히 괴로운 상태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시 새 삶을 얻었다, 새롭게 살자’라는 생각보다 그냥 일상으로 되돌아온 거였어요. 그리고 느꼈죠. ‘언젠가 회복이 되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라고. 무엇보다 그동안 날 걱정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을 되찾아야 했어요. 늘 곁에 있어준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은 꼭 해야 했거든요.”

이후, 그 좋아하던 술도 끊은 체 착실히 회복 기간을 가졌고, 이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간 행적은 ‘100일간의 일기’로 묶어 되새기고 있다.

노선호 지부장 / 사진 임종금 기자

쉽지 않은 수술이었고, 더 힘들었던 회복 기간이었다. 건강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마지막으로, 노선호 지부장이 뽑는 인생 최고의 순간은 언제일까.

“유년시절이요. 부모님, 할머님 계시고 대가족이 오순도순 살 때. 먹을거리, 입을 거리가 충분하진 않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며,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그 시절. 복슬강아지처럼 살았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그리고 또 한순간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룬 그때를 뽑아요. 축복이었죠. 작은 몸과 적은 말수를 가진 여자였지만 묵묵히 내 모든 걸 믿어주고 지원해줬어요. 운명의 신이 마지막까지 함께 하도록 밀어줬으면 좋겠는데…. 최종 운명 교향곡이 울릴 때, 믿어봐야죠.”

가진 것에 비해 소박한 회고였고, 희망이었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짧게 부탁했다.

“오늘 찍은 사진, 잘 나왔으면 좀 보내줘요. 예전 사진보니 나도 많이 늙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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