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진해]일제의 흔적 넘어 오롯이 제 것으로

제황산(帝皇山·90m)은 '임금이 탄생할 명당'이라 하여 애초에는 제왕산(帝王山)으로 불렸다. 1947년 일본식 이름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제황산으로 잘못 적용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9년 이곳 정상에는 높이 34.85m 되는 '러일전쟁기념탑'이 박혔다. 여기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기념탑 공사가 시작된 날 일본인 승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무례한 짓을 그만둬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일본 해군은 이를 전해 들었지만, 코웃음 치며 그대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환이 잇따라 닥쳤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남아있는 사고가 여럿 된다. 공사 현장 케이블카 사고로 일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다. 함께 있던 한국·중국인들은 멀쩡했다. 마산에서 들어오던 배가 전복돼 25명이 숨을 거뒀다. 진해로 향하던 열차는 터널에서 불에 휩싸였다. 영화 상영장에서도 화마가 덮쳐 107명이 사망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가 명당 지맥을 눌러 산신령이 노한 것으로 믿었다 한다.

1930년대 진해읍의 욱일승천기 모습을 한 중원로터리.

해방 후 기념탑은 헐렸다. 1967년 그 자리에 해군 군함 사령탑을 상징하는 진해탑이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이 지금도 탑 정문에 남아있다. 365계단을 오르는 것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2009년 모노레일이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줄을 서며 타기도 했지만, 지금은 애물단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진해탑이 있는 제황산 전경.

남원로터리에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가 있다. 1946년 진해 해안경비대 장병을 격려하며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라는 글을 남겼다. 이순신 한시 가운데 한 구절이다.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라는 의미로 나라에 대한 근심이 섞여 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끌어모아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겼다는 것이다. 북원로터리에는 1952년 전국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상 이승만 근저'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문인 이은상 글이 박혀 있다.

남원로터리에 있는 백범 김구 친필 시비.

중원로터리 인근에는 '시월 유신기념탑'이 있기도 하다. 1973년 옛 육군대학 앞 삼거리에 자리했다가 일부 이전 요구로 1976년 지금의 진해도서관 입구로 옮겼다.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욱일승천기 형상을 한 중원로터리가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진해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10만 그루 이상 들어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천대받았다. 주민이 땔감용으로 모조리 베어 썼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이곳 벚나무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벚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일교포가 벚나무를 대량 기증하면서 다시 자리 잡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벚꽃을 좋아해 이 당시 진해뿐만 아니라 서울 여의도에도 대량 심을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벚나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이승만 별장'에 100년 이상 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됐다 할 수 있는 벚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식 가옥 거리.

안민고개는 장복산맥 해발 330m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지나지 못하도록 해 백성을 편하게 하였다 해서 '안민(安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옛날에도 진해-창원 간 혼사가 많았다 한다. 산 하나만 넘으면 친정일지라도, 쉽게 갈 수 없는 폐쇄적인 시절이 있었다. 이 때문에 1년에 한 번 출가한 딸들이 고개에 올라와 친정 가족을 만나는 날이 있었다 하니 '만날 고개'이기도 했던 셈이다.

육지에서 17km 떨어진 곳에는 연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그 옛날에는 섬에 발붙이고 있는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고기를 찾아 늘 망망대해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섬 안에는 여자들뿐이었다. 이 와중에 섬 안에서 세상 떠나는 이가 있으면, 여자들끼리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지난 시간은 '연도여자상여놀이'라는 향토민속예술로 보존·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신항 공사로 80여 가구 모두 섬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진해~마산을 잇는 마진터널은 1957년 개통했다. 그 아래 장복터널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는 이용자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진해 쪽 입구에 홀로 있는 추모비는 더 쓸쓸히 느껴진다. 1979년 산사태 때 목숨 잃은 해군 8명 이름이 적혀있다.

1979년 산사태 때 목숨 잃은 해군들을 기리는 순직비. 마진터널 진해 쪽 입구에 있다.

웅천 사도마을에는 세스페데스 신부 입국기념비가 있다. 진해는 서양인이 최초로 우리나라 땅을 밟은 지역이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라는 스페인 신부가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웅천포를 통해 들어와 1년간 종교활동을 한 후 일본으로 갔다. 1993년 스페인 사람들이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 기념 조형물을 보내와 작은 공원이 만들어졌다.

명동 삼포마을에는 '삼포 노래비'가 있다. 1983년 가수 강은철이 부른 '삼포로 가는 길'은 이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 노랫말을 만든 이혜민 씨가 여행길에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정겨운 풍경에 빠져들어, 그 느낌을 가사로 담았다.

가요 '삼포로 가는 길' 배경인 명동 삼포마을에는 노래비가 있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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