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교육자에서 사회 활동가로 ‘불꽃같은 노년’

깔끔한 검은 양복 차림에 바바리코트를 걸친 노년의 신사.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강건함과 단아한 기운이 배어 나온다.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은 그간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잔잔하게 퍼져가는 물결 같은 말과 태도는 여유로움과 품격이 느껴진다. 아들 뻘 같은 기자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함도 잊지 않았다.

늦깎이 교사에서 교장으로

내년이면 일흔다섯 돌을 맞는 김종도 선생. 40년 넘게 교육자로 살아 온 그는 이제 막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다. 1막은 교육자, 2막은 사회봉사와 헌신, 그리고 3막은 그의 모든 삶을 활자로 엮여진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정리하는 것이다.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교육자로서 농고 출신이라는 학력 벽에 부딪혔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는 인고의 삶으로 한계를 극복한 것이 1막이었다면, 인생 2막은 “사회를 위한 뭘 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명제를 머리로 떠올리고 심장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긴 불같은 황혼의 삶이었다. 마치 그동안 억눌려 왔던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방된 듯 거침없는 날개 짓, 그것이 그의 2막이었다.

경남수필문학회 회원, 남해군지 연구집필 위원, 남해문학회 고문, 남해향토사연구소 소장, 남해신문 이사, 남해시대 논설위원, 경남도교육청 정책자문 위원 겸 홍보 전문위원, 경상남도 방언 보존연구회 부회장, 남해화전주부대학장, 남해향교…. 교장으로 교단을 떠난 후 그에게 붙여진 각계각층의 직함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그는 이제 15년 가까이 의무처럼 주어졌던 것들을 다음 세대를 위해 내려놓으려고 한다. 미래를 준비하려는 듯….

그동안 애써 모아왔던 글과 기행문, 퇴직 후 활동 등을 정리한 수필집과 자서전을 발간하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는 인생 3막이다.

- 선생님! 두툼한 서류봉투가 뭐죠?

“이거 말입니까? 말보다는 글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동안의 활동과 약력을 적어 왔지예.”

- 일본에서 태어나셨군요?

“네 일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공습 때문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아버지만 남고 어머니하고 삼촌하고 동생하고 나왔지예. 일본 큐슈 히라까와 초등학교 다니다가 나왔는데, 한국온 지 1주일 정도 됐을 때 해방됐을 겁니다 아마. 초등학교 학적부 떼어보니까 히라까와 초등학교에서 ‘전학왔음’이라고 써 놨더라구예. 거기서 1년을 다녔어요.”

- 부모님은 징용 때문에 일본에 가셨나요?

“징용은 아닌 모양이라예. 아버지가 일본의 큰 유리회사에 다니셨는데, 징용으로 갔으면 탄광이나 그런데 가셔야 했지만, 큰 회사에 다닐 걸 보면 아닌 거 같고…. 유리공장인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 기억이 날지 않습니다. 그 회사에서 노조위원장인가 그런 걸 맡은 것 같습니다.”

-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시는 거군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 마당에 방공호가 있었고, 공습이 있으면 방공호로 뛰어든 그런 기억이 있고, 선생님이 자주 왔던 기억도 있고, 확실히는 몰라도, 그때는 행복했습니더.”

- 남해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향이 남해니까 왔지예. 2차 대전 말기에 공습 때문에 일본에서 나왔는데, 아버지는 나오면서 공습 받고 나오다보니까 맨손으로 나왔지예.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논이 조금 있었는데, 나락 한가마니를 못할 때가 있었지예, 그것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아버지는 소금을 지고 전라도로 가서 팔고, 어머니는 동생들 키워야 했고, 너무 가난했습니다.”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 43년간 교사로 재직하셨는데, 교사가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남해농고)고등학교 졸업하고 육사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습니다. 다른 건 거의 백점을 맞았는데, 영어가 60점이 안되어서…. 좀 있으니까 아는 사람이 초등학교 교사 모집이 있다고 얘기해 줘서 시험을 봤는데 됐지예.”

도전, 또 도전했던 교사시절

- 교사생활 시작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농고 나와서 순 생짜배기로 교사가 됐는데, 다른 사람은 3년 사범학교 나와서 교사가 됐지만, 난 고등학교 나와서 교사가 됐으니 실력 차가 엄청 났지요. 음악, 미술도 배워야하고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은 기라. 수학도 안 되지, 영어도 안 되지 정말 형편 없었지예. 거기다가 직위는 맨날 졸병 교사고 월급도 차이가 났지. 그래서 한국방송통신대학을 다니게 됐습니다. 술 먹고도 공부할 정도로 정말 지독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한국방송통신대학 1회 졸업생입니더. 경상대교육대학원을 다닌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방송통신대학교는 48살 때 졸업했고, 대학원은 56살 때 졸업했지예. 참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 교사 관련 자격증도 많다고 들었는데….

“초등학교 준교사, 초등학교 1.2급 정교사, 교감, 사서교사, 중등 2급 정교사 뭐 교사로서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을 다 받았지.”

- 교직에 몸담으면서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신지?

“제자 중에 이병진이라는 학생이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배를 끊고 수학여행을 보내 준적이 있죠. 중학생 때부터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는데, 제가 오지 마라고 했어요.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말을 조코로 해야 하는데, 니 오지마라 하니까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자꾸 그러니까 선생님이 나를 안 좋아하는 갑다 라고 오해를 한 것 같아십니다. 육군 소령으로 제대해서 지금은 르노 자동차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 교사로 있다가 군대 입대하셨나요?

“그렇지예. 방첩대라는 곳에 있었는데, 거기 사회 구조가 철두철미합니다. 지금이나 학교에 있었을 때 중요한 서류는 그냥 버리지 않고 불로 태웁니다. 재까지 없애는 버릇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예. 그만큼 육군 보안규정 아직까지 그래도 따르고 있습니다. 방첩대 있으면서 거짓말도 공갈도 놔야하고, 사회구조가 남한테 저서는 안 되고 거기 들어가서 사람을 배렸지예. 착실한 게 제 트레이드 마크인데…. 군 생활이 몸에 배다보니 제대하고 나오니까 학교에 적응이 안 되지, 매일 교장하고 트러블 생기지, 아무튼 교사로 복지하지 않았으면 대사기꾼이 됐을 겁니다.(웃음)”

- 교사로 재직하면서 수필가로 등단을 하셨네요?

“창원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 누가 추천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글쓰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퇴직하고 난 뒤에 수필집도 내도 자선전도 내고 남해군에 흩어져 있는 사투리를 싹 모아서 ‘남해사투리사전’을 만들기도 했지예. 우리 세대가 지나가면 남해사투리가 없어진다 말이지. 그래서 좀 모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모으다보니 욕심이 생겨서 책을 내게 됐습니다.”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교장 퇴직 후 사회 활동으로 제2 인생 시작

- 남해 사투리사전 때문에 방송국에도 출연하셨다면서요?

“ ‘kbs2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가지고 별 4개를 받았지.
남해 사투리로 ‘오서오시다’ 말이 희한하다고 해서 스펀지에 나왔제….”

- 그러면 2008년도에 남해군문화대상을 받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요?

“남해군문화원에서 추천해서 됐는데, 아마 남해사투리사전을 만든 게 결정적인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해서 만들었거든. 그 이후에 남해군지 연구 집필 위원을 맡았고, 남해향토사연구소장, 남해문화연구소 소장, 남해신문사 이사, 남해시대 신문 논설위원, 경남도교육청 정책 자문위원, 남해향교 장의, 여러 군데서 요청이 와서 다 해줬지요.”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 지금도 글쓰기 계속하고 계십니까?

“내년 4월에 수필집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지요. 40년 산 것보다 퇴직하고 나서 12년 동안 더 많이 일을 해서 제2 자서전도 낼라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료는 다 모아놨지예.”

- 남해신문 이사로도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는 끝났습니다. 저하고 학교에 같이 근무했던 박춘식 사장의 부인 권유로 뭣도 모르고 시작했지…. 한 3년 정도 했을 겁니다.”

- 남해신문과 남해시대 신문에서 글도 써셨죠?

“한 10년 가까이 써 왔습니다. 남해시대는 논설위원이니깐 평론이나 칼럼 같은 걸 썼고, 남해신문은 수필이나 기행문을 기고했지, 지금은 안 하고 있습니다.”

- 요즘 지역신문의 경영 상태가 무척 힘든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지역신문이 살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남해시대 이사도 한 4,5년 했는데, 두 신문의 경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두 회사 힘듭니다. 통합만이 살 길입니다. 한 번은 합할 수 없냐고 두 신문사 대표에게 살짝 물었는데 안 되더라고…. 그러고 제가 지역신문 만드는 게 전공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교사 때 다닌 학교 마다 학교 신문을 만들었지요. 58년도 처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었을 겁니다. 남해 삼남초등학교 때 ‘구름방’이라는 학교신문을 만들었고, 그 뒤에 충청도인가 경북인가 이오덕 선생이 신문을 만든 것으로 기억합니다. ‘구름방’에 이어서 ‘대곡산성’, ‘한려수도’, ‘남해어린이’, ‘고현어린이’…. 학교를 옮길 때 마다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김종도 부회장./허귀용 기자

10년 가까이 주례로 모은 돈 전액 장학금 기탁

- 예식장 주례도 오랫동안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주례비로 모은 돈 전부를 장학금으로 기탁하셨다고 하던데….

“남해군에 예식장이 생기면서 주례 요청이 들어 왔지. 처음에 5만 원을 받았는데, 아마 1년에 20번 넘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 100만 원 정도 모은 돈을 향토장학금으로 줬어요. 난 퇴직금 받고 살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한 9백만 원 정도 줬습니다. 제가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 아닙니까! 내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지예. 근데 근래에는 못했어요. 몸이 안 좋아서…. 이제는 괜찮아졌지만 1000만 원 정도만 채우려고 합니다.”

- 어디가 편찮으셨는데요?

“수술을 했지예. 신장을 하나 덜어내고 방광도 수술했습니다. 지금은 완치됐습니다. 술 때문도 있지만 담배를 많이 피워서…. 담배는 여전히 피우고 있지만 술은 지금 끊었지예. 한 일 년 만 끊을라고 생각합니다.”

- 지역문화나 역사에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뭐 할게 있습니까!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할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남해군지나 향토사 발간에 적극 나섰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경남수필문학회에서도 활동했는데, 너무 멀어서 포기했습니다. 남해군에서 남해문학회 고문을 맡았었고, 남해국어연구회라고 교사 때 만든 써클이 있는데, 35,6년 됐습니다, 거기에 고문으로 있습니다.”

- 이제는 편하게 쉬실 법도 한데….

“어떤 것이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가만히 누워있는 게 편한 건지, 지금 살고 잇는 이 이상 편한 게 없어요. 남하고 얘기하고 술 한 잔 먹고, 하토 백 원짜리 한번 치고, 그게 제일 편한 거죠. 가만히 집에 있는 건 저에게 편하게 아닙니다.”

- 앞으로도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하실 예정이십니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모든 걸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 내놨습니다. 문화연구 소장도 젊은 애들한테 하라고 내놓고... 최근에 경남대에서 생긴 경남부산울산 방언연구회 부회장하고 가락남해군 종친회 회장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필집과 자서전 발간에만 신경 쓰려고 합니다.”

- 지금까지 활동하시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돈을 많이 못 번 게(웃음)…. 아쉬운 거 없습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내일 죽어도….”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노년의 신사는 인터뷰 내내 겸손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그간 살아온 경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일정한 톤의 목소리는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흔히들 지역에서는 존경할만한 어른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인터뷰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는 있겠지만, 큰 욕심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사회에 헌신해 왔던 김종도 옹의 자세는 분명 ‘존경’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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