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남해] 부족함 메우려 부지런…눈부신 절경을 만들다

'다랑이'는 비탈을 깎고 석축을 쌓아 만든다. 가천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영 산양, 함양 마천, 전남 완도, 경북 고령 같은 곳도 꽤 유명세를 탄다.

그럼에도 가천마을 다랑이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45도 기울어진 가파른 곳에 108계단·680개 논이 바다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이곳에 다랑이가 언제 형성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신라 문무왕(661∼681) 때 마을이 형성됐으며, 적어도 임진왜란(1592) 이전에는 집단 거주했을 것이라는 얘기는 전해진다.

이곳 마을 이름은 그 옛날 간천(間川)으로 불리다, 조선 중엽 때 가천(加川)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가천마을을 품고 있는 산 두 개가 있다. 설흘산(481m)과 응봉산(472m)으로 바다와 바로 맞닥뜨린다. 산 사이로는 물이 흐르며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당연히 물이겠다. 굳이 이 가파른 곳에 억척스러운 손길이 닿은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시계 없던 시절 다랑이에서 일하던 이들은 앞 바다에 정기적으로 지나는 여객선을 보며 중참시간·휴식시간을 가늠했다고 한다.

가천마을 다랑이. /박민국 기자

옛사람들이 어렵게 내민 손길은 오늘날 훌륭한 모습을 선사한다. 가천마을 다랑이는 한 발짝 물러나 봐도 좋고, 안으로 들어가 접해도 부족함 없다. 멀리서는 계단식 논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담을 수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지게진 할아버지, 짐을 머리에 인 여인네 같은 정겨운 장면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가천마을 스스로는 사뭇 다른 속내를 담고 있다.

도로에는 부동산중개업소, 아파트 투자 홍보 펼침막 같은 게 눈에 띈다. 사람들 발길 잦은 곳이니 돈 냄새 나지 않을 리 없겠다.

계단식 논에는 기계를 들이기 어려워 전통방식으로 힘겹게 농사지어야 했다. 강한 바닷바람까지 안아야 하는 환경이기에 땀 흘린 것에 비해 손에 쥐어지는 건 늘 부족했다. 바다와 접하고 있다지만, 배 댈 수 있는 해안도 아니다. 고작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손에 들고 나오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은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저 멀리 시장에서 생선을 사와야 했다. 그래서 가천마을은 늘 부족함에 시달렸다.

다랑이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 /박민국 기자

그랬던 이곳에 2002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된 것이다. 바깥사람들 발길이 들끓기 시작했다. 2년 사이 방문객이 20배가량 늘고, 60여 가구 소득도 5배 정도 높아졌다. 남면 해안관광도로와 연계한 관광지로 자리 잡으면서 주변에 펜션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곳 땅값도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올랐다.

주말이면 차 댈 곳 없어 아우성 넘치는 지금, 주변 땅값은 10년 전과 비교해 100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이제 펜션·가게가 들어설 만큼 들어선 것인지 일대에는 매물도 별로 없는 듯하다.

앞서 2005년에는 '명승 제15호'로 지정됐다. 다랑이뿐만 아니라 가천마을이 보존구역으로 돼 함부로 손댈 수도 없게 됐다.

그런데 마을 주민 대부분 70대 이상 노인이라 재래식 농사도 힘에 부친다. 그래서 노는 땅이 많다. 마을 주민은 민박·가게 같은 것에 눈 돌렸다. 비탈길 아래 가구 가운데 반에 가까운 26가구가 민박 이름을 내걸고 있다.

이렇듯 가천마을은 겉으로는 옛 모습을 이어가고 있지만, 속은 그만큼은 아닌 듯하다.

남해에는 별스러울 정도로 사투리가 발달해 있다. '사투리 사전'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1771년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유의양(柳義養·1717~미상)이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에 남긴 글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쓰는 말도 많이 달랐는데, 기러기는 글억이라하고, 옥수수는 강남수수라하고, 지팡이는 작지라 하니, 이런 방언이 처음 들을 때에는 귀에 설더니 오래 들으니 조금씩 익어갔다'고 되어있다.

오늘날 남해를 찾았을 때 '어서오시다(어서오세요)'라는 인사말을 어렵지 않게 듣고 볼 수 있다. '~세요' 대신 '~시다'를 붙인 것으로 '앉으시다' '가시다' 같이 쓰인다.

한편으로 아랫사람이 어른한테 '밥 먹었는가' '앉게' '잘 가게'와 같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남자 아닌 여자 어른에게만 사용한다니 갸웃하게 만든다. 외지 나간 남해 사람이 전화로 어머니에게 '밥 드셨는가'와 같은 말을 썼다가 주위 사람에게 핀잔듣기도 했다고 한다.

김만중 유배지인 노도. /박민국 기자

이러한 것은 궁중용어이다. 그 옛날 남해는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유배객이 많은 곳이었다. 비록 밀려난 이들이지만, 그들이 안았던 사대부·궁중문화가 이곳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배 타고 전라도 여수로 가 학용품을 사오셨다"고 풀어놓는다.

요컨대 남해 사투리는 섬·유배문화·전라도와 가까운 생활권,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경남 남해는 곧 대한민국 제주도 같은 곳"이라고 말하는 데, 그럴 법도 하겠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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