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차 베테랑 공무원… “도정 도움 된다면 뭐든지”

 전국 광역자치단체들은 서울사무소를 통해 국회 및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경남도의 경우 지난 1995년 김혁규 지사 당시 서울 여의도에 사무소 문을 열었고, 지난 2001년 용산으로 옮긴 이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명칭은 서울연락사무소에서 서울사무로소로 불리다가 현재는 서울본부를 사용하고 있다.

1일 만난 권현군(54) 경상남도 서울본부장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올 1월부터 서울본부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민선 자치시대를 맞아 서울과 경남의 친숙한 관계 유지를 바탕으로 도정 홍보 등을 통한 경남도의 경쟁력 강화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직에 입문한 그는 어느덧 35년차 베테랑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다. 첫 부임지는 고향에 있는 마천면이었고 ‘통일벼 심기운동’ 등을 전개했다.

국회에서 만난 권현군 경상남도 서울본부장 / 사진 조문식 기자

권 본부장은 “어떻게 보면 촌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장남이라고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공부만 시켜줘도 감사하지”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는데 당시 5급 을이라고 지금의 9급”이라고 기억했다. 이어 “100%통일벼(를) 심어서 시상 받은 기억도 있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했고) 군대 제대를 한 후 복직을 함양읍 사무실에 했는데, 퇴비정산운동을 해서 군에서 1등상을 받았다. 그 공로로 해서 군청으로 전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군 생활 이후 복귀한 공직

군대에서 운전병 생활을 한 그는 “그 당시만 해도 운전면허 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랑이랄까, 그런 것도 많았다”면서도 “사고에 대한 불안감, 영창 가면 계급도 강등되고 제대 후 복직에 힘든 것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역 이후 함양읍 사무실로 복귀해서는 재무계에서 지방세 징수 업무를 담당했다.

복귀한 공직생활의 에피소드도 있다. 그는 “당시 하위기관에서 가면 강등을 당했다. 퇴비정산 운동에 대한 상을 받아서 고향 수동면사무로 간 후 보름 만에 군청으로 전입을 하면서 계급 강등을 당했다”며 “과장 등 보직을 가진 사람 아래에서 강등이 이뤄진, 일반직원으로서의 마지막 강등 세대였다”고 강조했다. 권 본부장은 “당시에는 큰 기관으로 이동은 좋은 것이었다. 함양군청 경리계, 경리계는 돈을 쓰는 곳”이라며 요즘 존재하는 강등제도와의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강등까지 감수하면서 이동한 것이 어쩌면 복이었을까. 그 곳에서 권 본부장은 가정을 꾸릴 4살 연하의 직장동료를 만나 사내커플이 됐다.

‘앞으로, 앞으로’ 승진 행진 그리고 도전들

결혼을 한 후 재무과에서 내무과를 거쳤고, 승진을 해서 읍 사무소 7급으로 이동했다. 이어 다시 군청 문화공보실로 돌아왔고, 문화재 업무를 보다 지난 1991년도 4월에 도청으로 전입하게 됐다.

권 본부장은 도청으로의 이동 과정에 대해 “당시 공무원 교육을 가서 1등 하는, 이런 자격이 있었다”며 “중견행정실무자반교육에서 1등을 했다”고 밝혔다. 이후 양곡관련 업무를 보는 곳인 양정과에서 도정과 수매 등의 업무를 맡기도 했다. 당시에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양곡수요가 줄어 양정과 역시 사라지는 결과를 맞았다.

경상남도 서울본부 직원들 / 경상남도 서울본부

이후 6급으로 승진한 후에는 경상남도 문화예술회관 업무계장을 지냈다. 권 본부장은 당시의 업무에 대해 “김혁규 지사 시절이었다. 거기서 나름대로 추억에 남았던 것은 그 당시 국·공립 문화예술 부분은 순수예술 분야만 취급을 했는데 경영행정을 주창하면서 ‘예술회관도 경영행정을 해 봐라’라고해서 태진아 리사이틀 공연을 한 게 추억에 남는다”고 말을 이었다.

공직생활의 기억과 보람에 대해 권 본부장은 “개인적으로 공무원 교육원에 교수를 하고 싶었다”며 “공무원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말았지만, 학사자격이 있어야 된다 해서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들어가 수석졸업을 했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졸업 후 졸업장과 상장 등을 갖고 교육원에 교수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지난 1998년도부터는 공무원 교육원에서 교수 등으로 1년 7개월간 생활하기도 했다. 이후 경남도청 조직 내 공모전에 응해 2년간 시장개척팀에 있었고, 기획관실 기획계로 옮겼다. 이어 승진이 이뤄졌고, 합천군 야로면장으로 가면서 5급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당시에 대해 권 본부장은 “그 지역은 ‘북부권 쓰레기매립장 공사’가 있어서 5년 동안 데모 등 반대가 있었다”며 “가서 데모꾼들과 싸우다 일을 다했다”고 답했다. 또 “착공을 해서 2년 있는 동안 준공까지 다 가서 데모꾼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당시에는 쓰레기장 들어오면 사람 죽는다고 반대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도청 복귀 후 서울에 오다

도청으로 복귀해 혁신지원팀장을 지내다 1년간의 정기교육을 다녀오기도 한 권 본부장은 이어 격무부서라 불리는 항만정책팀장도 거쳤다. 그는 “당시 부산신항관할권을 갖고 싸우는 업무였다”며 “데모도 많고 의회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아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승진해서 서울로 오게 됐다”고 소개했다.

국회에서 만난 권현군 경상남도 서울본부장 / 사진 조문식 기자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된 서울 생활은 그에게 불편함과 함께 배움의 기회로도 작동하고 있다. 권 본부장은 “아침 같은 경우 직접 만들어먹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서 불편한 점도 많다”면서도 “돈·권력·인물이 많은 서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분들을 하나 둘 사귀는 것과 도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보람이 크다”고 평가했다.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김두관 전 지사 재임기간에는 집권당과의 불협화음이 존재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야당 도지사인 김두관 도지사 시절에는 집권당과 다르니까, 집권하고 있는 정부와 다르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중앙부처 등에서 협조받기 어려운 점은 있었다”며 “벽은 있었고,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벽에 부딪칠 경우 김두관 지사의 경우 직접 사람을 만나면 순수성과 열정을 상대방이 알아줬다”며 “직접 다니는 것밖에는, 만나고 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직접 뛰는 수밖에는 답이 없었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처럼 경상남도 서울본부는 △중앙행정기관, 공공단체 등과의 협조체제 구축으로 중앙부처와의 업무 연락·협의, 도정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시책자료 수집 활동 △도 단위 주요 행사 홍보, 기업체 투자 유치 안내와 도정·관광 홍보, 지역 특산물 판매 행사 지원 △중앙부처 공직자, 향우회 임원, 기업인 등 출향 인사에게 주기적으로 도정 소식지와 도정·관광 홍보물 발송 △재경 향우와 도민단체 지원·협조 등으로 고향에 대한 애향심 고취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날 권 본부장은 “경남도정에 도움이 된다면 경남주식회사의 술상무가 되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도정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도민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또 재경 향우들에게는 서울본부와 좀 긴밀하게 협조를 해서 도정에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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