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맛을 배우기 위해 전국 식당을 헤매다

울퉁불퉁한 생김, 팔자로 걷는 걸음걸이, 박박머리, 저돌적 인상, 그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웃음….

“으하하하….”

알고 보면 지독하게 내성적인, 그는 구도자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요리사다. 대구로 대학 간 딸이 보고 싶어 실수로 “쌍욕을 했다”는, 그래서 밤을 새워 “꺼이 꺼이….” 홀로 울고 말았다는….

산청군 신안면 원지마을 요리사 송광우(44)는 어렵게 자랐다.

그를 짧게 요약해 소개하면 17세에 가출했고 음식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10년 가까이 떠돈, “마약 갈비”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 딸 환희의 아버지, 아내 김영미의 남편이자 요리사다.

송광우 사장 /사진 허동정 기자

“어려서, 개처럼 살았던 때도 있었다. 나는 서럽게 자랐다”라고 말하는 그다.

3살 이전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그에겐 14살 많은 누나가 엄마였고 아버지였다. 부모님은 논 몇 마지기를 남겼다.

저수지 책가방 던지고 가출… 요리사가 되다

언덕을 넘기 전에 저수지가 있고 너머에 그의 집이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그는 인근 고등학교 토목과에 입학했다.

17세, 예민했던 나이,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그는 전교 꼴찌를 했다.
다음날 아침, 언덕을 넘어 학교 가는 길, 저수지 둑에 앉아 아무것도 잡힐 것 같지 않은 까마득한 미래를 생각해 봤다. 공부로는 가망이 없다는 생각, 주머니엔 5000원이 있었고 책가방엔 7만 원을 주고 산 제도기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개 같은….” 그는 열없고 과장되게 웃었다. 그런 뒤 저수지를 향해 책가방을 던져버렸다.

부산행 버스를 탔다. 결혼한 누나가 부산에 있었지만 가출을 알리지는 않았다. 차비 빼고 밥 한 끼 먹고 나니 돈이 없는 신세, 부산 시내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몰랐다.

먹다 남은 짜장면 찌꺼기를 핥아먹으며 살았고 하다못해 아이들의 돈을 뺏으며 소년 강도(?)가 됐다. 쫓겨나기도 했지만 자는 거야 육교 밑에서 자고 건물 옥상에서 자고 지하상가에서 잤다. 먹는 건 달랐다. 뺏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독기 품고 산 한 달, 울지 않기 위해 웃으며 독을 품었던 날들이었다.

송광우 사장 /사진 허동정 기자

“탕탕탕탕탕-” 누나 집 문을 두드릴 때 그는 산청서 온 상거지였다. 소식을 듣고 산청에서 온 형이 “가자”고 끌었지만 갈 수 없었다. 부산에서 그는 “안 간다”고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보다 못한 매형이 근처 중국집 배달 사원으로 취직시켰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새 삶을 시작했다. 1층은 중국집, 2층은 복싱 체육관, 주방장은 밤만 되면 2층 체육관에서 같은 배달원끼리 권투를 시켰다. 나이 많은 형들을 때려눕힌 순간, 그는 왕따가 됐다. 밤마다 울지도 못하고,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하지만, 지독히 외로움을 타는, 그는 집 나온 10대일 뿐이었다.

탕수육과 짜장면 몇 그릇을 자전거에 싣고 가다 엎어버린 사고는 한 달쯤 지나서였다. 음식값과 그릇 값 6만 5000원 물어주고 그 길로 중국집을 떠났다. 2만 5000원이 월급이던 중국집 생활은 박살 나버린 탕수육 그릇과 함께 끝났다.

고기에 두드러기, 고기 씹으며 병원으로

주메뉴가 돼지갈비인, 매형의 먼 친척집인 한식당에서 음식을 배우는 조건으로 취직했다. 인생 지향점이 바뀌고 있었다.

‘주방장이 되면….’

이 말이 운명처럼 꽂혔고 그날 밤, “고등학교 3년 대신, 3년간 나는 요리를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17세에 그는, 요리를 해 팔기 위한 갈비를 공부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는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먹는 즉시 온몸에 붉은 점이 마구 돋는, 두드러기가 생겼고 먹자마자 토했다. 두드러기에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나중엔 고기를 씹으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주사 한 방으로 나았지만 “스무 번 백 번이고 병원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20회쯤 병원을 찾고 나니 두드러기가 사라졌다. 구토도 함께 사라졌다. 이때 이후 고기맛을 알게 됐다.

칼을 만졌고 다듬기를 배웠다. 밥하는 것과 뜨물을 넣고 숭늉을 끓이는 방법, 나물을 데치는 속도와 시간 등등, 잔잔한 것을 찬찬히 배워갔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3년을 배운 그는 일부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으로 식당을 나왔다.

“3년 만에 식당을 졸업한 거지….”

아는 사람을 통해 주방장으로 취직한 그때 나이 스무 살. 하지만, 장사가 되던 한식집이 갑자기 손님이 줄고 있었다.

‘맛이 없어 손님이 오지 못하는 거다….’ 그는 ‘교만했다’란 생각을 생각, 당장 손님이 줄고, 요리를 하는 시간이 줄어들 때 그는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맛없게 만들어 남의 식당 망하게 했다는 소릴 듣긴 싫었다.

1년 새 20여개 식당 전전하며 음식 배워

‘연구…. 연구….’ 캄캄한 밤에 그는, 전용 주방용 칼을 수건에 싸며 ‘연구….’란 말을 그리 곱씹었다 했다.

송광우 사장 /사진 허동정 기자

친한 식재료 납품업자를 찾은 그는 어떤 식당이든 소개해 달라고 했다. 하도 식당이 많은지라 크든 작든 재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다시 주방장이 됐고 다시 갈빗집에 첫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월급을 받은 그날, 그는 바로 사직했다. 그 식당에선 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식당 재료상을 찾았고 재취직을 부탁했다.

“다른 식당을….”

이렇게 다시 한 달을 일한 그는, 미련없이 또 사직했다. 그렇게 또 취직하고 또 사직하고 또 취직을 부탁했다.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소문이 났지만 식당 주인들은 그를 잡지 못했다.

소리 소문 없이 그는 부산의 한식당을 하나 둘, 차근차근 섭렵하고 있었다. 굳이 한 달을 채운 이유는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산 동래에 있다가 다음 달 서면에 있었고 광복동에 있었다. 조방앞 식당 주방에서 일했고 떠났고 취직했고 다시 떠났다….

저벅, 저벅, 저벅…. 배울 수 있다면 작고 큰 식당을 가리지 않고 그는 걸었다. 20대 초반을 생각하면 그는 “이 식당 저 식당을 옮겨다니는 모습만 생각난다”고 했다.

한 식당에서 짧게는 하루, 대부분 1개월, 많게는 6개월 정도 있었다. 1개월 이상 있었던 곳은 사정이 있거나 더 배워야 할 업소였다.

일하고 떠나고 또 일하고 떠난 식당 숫자만 첫해 20개 업소가 넘었다.

냉면 배우다 손목뼈 탈골까지… 맛의 비밀은 재료

“배울 게 없는 식당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음식에 미쳐있었다.”

냉면집 3곳은 6개월 이상 있었다.

“한국전쟁 때 이북 사람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만든 음식이 평양. 함흥냉면이다. 이남에서 평양 함흥냉면은 부산이 원조다. 나는 그곳 원산면옥과, 사리원, 함흥냉면 3군데를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배웠다. 한 곳에서만 6개월 정도 있었다. 이 3군 데서는 이북 사람에게 직접 전수를 받은 곳도 있었다.”

냉면 반죽을 하며 손목뼈가 탈골되기도 했다.

부산에서만 초기 3년을 합쳐 6년 정도를 있었다. 이후 대구로 갔고, 서울로 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 유명 냉면집에서도 3개월 정도 있었다. 대전으로 왔고 대전 유성에서 6개월을 일했다. 다시 부산으로 왔다.

   

맛은 있는데 손님이 몰라주는 집이 있었고 소문은 났지만 터무니없어 실망하기도 했다. 운이 좋은 집이 있었고 목이 좋은 집이 있었다. 주방이 깨끗한 집, 서비스가 좋은 집이 있었다.

수년을 떠돌며 배운 가장 큰 맛의 비밀은 재료에 있다고 판단했다.

‘재료가 싱싱해야 하고 제철이어야 한다는 것.’

“맛의 기본은 싱싱한 재료가 첫째다. 다음은 기술과 정성이다. 정성에는 식당 홀의 서비스가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맛이었다.

“맛이란 강력한 주관이 개입한다. 내가 내놓은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자주 찾는 사람이 많으면 소문나는 식당이다. 이런 음식점은 통상 30년은 먹고산다고 한다. 한 번 먹고 안 오는 사람도 있다. 기대는 했는데 못 미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것, 분위기도 음식 맛을 좌우한다. 모두를 사로잡는 음식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었다. 마약 같은….”

전라도 아줌마에게 손님 접대를 배우다

스무 중반쯤, 제법 큰 규모의 음식점 주방장 제안이 왔다. 전남 광양 성림별관이란 식당은 규모부터 압도했다. 규모만 800평 정도, 종업원이 3~40명 되는 주방장 제안이었다. 전라도 음식은 배워보지 못했다는 생각, 미련 없이 사직했고 다시 칼을 쌌다.

목포가 고향인 60대 주방 찬모(반찬 만드는 사람)는 전라도식 김치와 젓갈, 양념을 기막히게 만들어냈다. 냉면을 배울 때와 같은 들끓는 감정을 이때 다시 느꼈다.

“반찬 수보다 손님이 먹을 만한 밑반찬을 내는 게 좋다”는 말은, 음식의 기준을 손님 눈높이로 높인다는 말, 다 배움이었다.

이때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독립, 광주와 순천에서 개업할 때 휴일마다 찾아가 갈비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곳 향토 음식을 찾아서 먹었고 어깨너머로, 또는 부탁해서 배우기도 했다.

광양에서 2년은 인생이 바뀌는 시기였다.

결혼을 했고 딸을 얻었다.

3000만원이 모였을 때 그는 책가방을 던져버리고 떠났던 고향, 꼴찌가 싫어 주저앉았던 저수지 앞에 우두커니 섰다. 둑에 서서 그는 개업을 결심했다.

고향, 산청군 신안면 원지마을 농협 앞에서 8평 테이블 4개를 놓은, 밥집, ‘원산면옥’이란 상호로 가게를 열었다. 밥과 냉면만 하는 음식점, 규모가 작아 갈빗집 개업은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였지만 막막했던 게 사실이었다.

   

더 힘든 것은 장사 때문이 아닌, 외동딸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유치원을 가기 싫어 떨어지지 않는데….” 인생 전체를 두고 그때 그 장면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 했다. 3살에 잃은 부모 때문에, 부모와 떨어지기 싫은 딸의 울음은 사무쳤다.

1년만에 옆으로 확장 이전했다. 전세 3000만 원 짜리를 자꾸 올리더니 주인은 2년 만에 5500만 원으로 올려버렸다.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땅을 샀고 모은 돈과 대출금으로 현 식당 자리에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73평짜리로 확장 개업했다. 다 털었고 대출까지 한 상황…. 그는 딸 아이를 보고 행여 망할까,

두려워했다. 벌써 십 수년 전이다.

“줄을 섰고 앉지를 못해 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주방장을 한 명 더 고용할 정도였다.”

장사는 생각보다 수월케 됐다.

원가로 잡숴보라, 맛있으면 다른 것도 잡숴라

“냉면은 고구마 전분을 이용해 직접 면을 뽑는다. 소고기 양지를 고우고 갖은 해물로 육수를 낸다. 동치미 국물을 곁들여 맛을 완성한다. 이것이 덩어리로 얼린 냉면 엑기스인데 이걸 만들어 얼리고 이걸 조금씩 떼어서 여름에 장사한다. 이게 기술이다.”

자신의 성을 딴 ‘송장군 갈비탕’이란 것도 만들었다. 산청이 약초로 유명하니 당귀 황기 등 갖은 약초를 넣어 한약 향이 나게 끓였다.

이미 맛으로 소문난 식당은 때를 가리지 않고 늘 붐빈다. /사진 허동정 기자

“7000원을 받는 송장군 갈비탕은 거의 원가다. 갈비탕은 돈을 남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충분히 먹고 맛있으면 전문 품목인 갈비도 드셔보라는 뜻으로 드리는 서비스 음식이다.”

이렇게 꾸준히 몇 년을 하다 보니 마음 구석에 남은, 꼴찌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졌다. 1등이 되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연구, 연구….” 이때부터 그는 하지 않아도 될 갈비를 다시 연구했다. 이후 주방장을 따로 고용했다.

하루 중, 새벽 3~4시간 정도 음식을 장만하고 영업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는 것으로 그는 일을 끝냈다. 이후 일절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식당에 가면 청결이니, 친절이니 하도 떽떽거리니 아내가 아예 가게에 오질 못하게 한다”고 했다.

오전 10시쯤, 아내가 가게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면 그는, 집에서 절인 갈비를 끄집어내 굽고 볶았다. 또다시 절이며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생살의 삼겹살이 화장 안한 생얼굴이라면 갈비는 연인에게 가장 잘 보이고픈 화장한 미녀다. 이왕 화장을 하는 거면 가장 예쁘게 화장하고 싶다. 가장 맛있는 갈비, 내 갈비를 가장 많은 사람이 좋아하게 하고 싶다.”

맛을 내기 위해 과일을 갈아 넣고, 과일 중에서도 사과나 배를 넣고 비율을 달리하고, 숙성을 하거나 바로 배합을 따로 하기도 하고, 십전대보탕을 넣거나 빼고, 엿을 넣고 벌꿀을 넣고, 비율을 달리하고, 쌀뜨물을 넣기도 하고, 파를 많이 넣고 적게 넣고, 다시 숙성 시간을 맞추고….

현재까지 10여 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한 것 같지만 최고의 맛은 깊은 도처럼 높고 거룩해 보였다.

처음엔,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에게 줘버렸다. 맛있다고 하는 아내와 딸의 말에 만족하지 않았다. 늘 부족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음식을 버렸다. 나중엔 개에게 주기도 미안해 직접 먹었다. 자신에게 벌을 준다는 뜻으로 만든 음식을 모두 먹었다. 먹다 울분에 토하고 많이 먹어 또 토하면서 자신을 벌줬다. 괴로워 뒷산을 향해 뛰어오르는 날도 많았다.

갈비…. 갈비…. 갈비….’ 꿈속에서도 매일 고기를 먹었다.

수년 전부터 “분점을 내어달라”는 요구가 끊이질 않았다. 그는 단박에 잘랐다.

지난해 갈비를 먹은 지인이 1000평가량 대도시 한 복판에 자신의 식당을 갈빗집으로 바꿔 영업해 달라고 수차에 걸쳐 부탁했다. 호주에 갈빗집을 개업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독일에서 개업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솔깃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실험 갈비 탓에 술을 마실 때가 많았다. 살은 쪘다.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고 희열을 느낄 때도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금도 최고의 갈비맛을 보기 위한 여행을 계속한다.

“내가 생각한 맛이 있다. 그건 아무리 말로 표현해도 할 수 없다. 내가 기어이 만들어 선보여야 아는 맛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맛일 것이다. 그걸 찾는다면 나도 도가 터질지 모른다….”

‘갈비와 도(道)가 통하다’

“쓱쓱 쓱 쓱쓱….”

칼을 든 그는 봉칼갈이(일명 야스리)를 치며 칼을 갈았다. 이때가 새벽 4시, 집에서 한 1km쯤 떨어진 가게로 간 그는 자리를 잡고 돼지 살덩이를 만졌다.

돼지고기 생고기살을 각 떴고 납작하게 칼질해 서너 번 넓적하게 폈다. 그리고 양념이 배기 좋게, 리모컨 크기의 넓적 살에 수백 회 칼질을 했다. 일정한 크기로 흠집 난 고기는 너덜너덜해졌다. 많은 갈빗집이 기계로 찍어버리는 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상품이었다.

말도 표정도 없이 그는 그렇게 고기를 손질했다.

꼬박 3시간을 포를 뜬 다음, 열댓 종류의 과일과 각종 재료를 넣어 만든 절임액에 고기를 담갔다. 그리고 애호박 절임과 깍두기, 꼬막을 삶아 밑반찬을 만들거나 점검했다.

우람한, 울퉁불퉁한, 그렇게 폭발적으로 웃던 그가, 새벽에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은….

가부좌 틀고 앉아, 삼매에 빠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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