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이 행복하라

그냥 걷고 싶었다. 제주올레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2000km. 꼬박 넉 달이 걸렸다. 길 위에서 나는 목적 없이도 생을 지탱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희망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2012년 4월 3일 제주올레 8코스 / 이서후

여기 두 달이 넘게
제주도를 걷는 사내가 있다
두 번이나 발톱이 전부 빠졌다는 그는
때론 하얀 바닷길을
때론 어둔 숲길을
머리가 멍해지도록
걷고 또 걷는다고 했다.
나는 그의 여행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자학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운가 보군요.
내가 비아냥거리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가 스치듯 말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어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게
참 쉽지가 않군요.
그가 담배를 피러 나가자
나는 눈물이 날 거 같아
서둘러 샤워기를 틀었다.

 

2012년 4월 3일 제주올레 9코스 / 이서후

여행길에서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장소이기보다 어떤 느낌이다.
신선한 아침 맑은 풍경 속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한낮 햇살 아래 눈부시게 흔들리는 무덤가 꽃 무더기.
저물 무렵 우연히 고개를 들다 마주친 조용한 달빛.
밋밋하고 초라해 별 볼 일 없는 곳이라도
그곳이 멋있거나 아름다워 보이는 절묘한 시간이 있다.
그 순간, 그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굉장한 행운이다.

2012년 4월 3일 제주올레 10코스 / 이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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