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열정,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84-1. 부림시장 바로 옆 골목에 있는 건물 입구에 ‘별+초학교’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이 건물 3층이 ‘사단법인 창원가온누리센터’, 통칭 ‘보리학교’라고 불리는 곳이다. 별초학교는 보리학교 옛날 이름이다. 3층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작은 사무 공간이 따로 있고, 나머지 공간에 책상과 칠판이 놓여 있다. 벽 곳곳은 책꽂이가 차지했다. 더 안쪽으로는 신을 벗고 앉아서 수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방과 교실은 커튼처럼 열고 닫을 수 있는 칸막이로 경계를 뒀다. 보리학교는 지난 2010년 8월 3일 문을 열었다. 그 시작은 학교가 가둘 수 없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두려고만 하는 학교가 문제 아닐까 하는 반성이었다. 이연주(41) 보리학교 이사장은 아이들에게 그저 편히 쉬고 기댈 수 있는 공간을 내주고 싶었다. 아이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인내하며 응원해줄 수 있는 스승과 이어주고 싶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를 떠올렸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요?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교실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름 뒤에 학교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붙지만, 인상은 그저 선한 이웃 아주머니다. 편하게 보리학교와 인연부터 물었다.

“함께 이사를 맡은 김용택 선생님이 제 고등학교 은사에요.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선생님이 국사를 가르쳤지요.”

김용택(67) 선생은 현재 경남도민일보 독자권익위원이다. <피플파워>에 이미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chamstory.tistory.com)’ 블로그 운영자로 소개됐다. 20여 년 전 평범한 여고생 이연주는 김용택 선생 덕에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전에 수업했던 선생님과 가르치는 방법이 달랐어요. 고등학생들 국사 수준이라는 게 뻔하잖아요.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 아니면 그것도 모르는 정도. 그런데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잘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가르치려고 애썼지요.”

가르치는 내용보다 더 신선했던 것은 방법이었다. 김용택 선생은 아이들이 모르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 힘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수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는 제안, 이에 대한 조사, 빠진 내용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던 선생들과는 분명히 달랐고, 학생 이연주에게는 즐거운 충격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을 그때 다시 알게 됐지요. 우리가 먼저 조사한 내용을 발표하고, 빠진 내용을 선생님이 보충해주셨어요. 당시 선생님은 책 읽는 모임도 운영하셨지요. 7~8명 정도 참여했는데 방송실에서 모여 토론하곤 했어요.”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하지만, 그 신선한 수업을 학생들은 오래 듣지 못한다. 김용택 선생과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한 기간은 기껏 한 학기 정도.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일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김용택 선생은 재단 비리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던 학교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래도 그 짧은 시간, 이연주 학생은 김용택 선생을 평생 기댈 수 있는 스승으로 삼는다.

“제가 말이 두서가 없지요.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할게요.”

보리학교는 이연주 이사장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연주 이사장은 김용택 선생이 없었다면 그런 자신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 아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이연주 이사장은 삼형제를 키우는 어머니다. 그는 결혼 이야기를 하자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제가 결혼이 빨랐어요. 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지요.”

이연주 이사장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유소 사장은 일하겠다고 찾아온 당찬 학생에게 월급은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한 만큼 달라 했다. 주유소에서 일하겠다고 온 사람들을 한두 명 만난 게 아니었던 사장은 그 대답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사장은 주유기를 만지면서 끼는 기름 묻은 장갑 한 상자를 가리키며 여학생에게 세탁을 맡겼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추웠는데도 맨손으로 모두 빨았어요. 군말 않고요. 그런 모습이 남다르게 보였나 봐요.”

긴 연애담은 들을 수 없었다. 사장은 당찬 여학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 봤고,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결국 결혼을 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사실 더 힘들었던 것은 학교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적응을 잘 못했거든요. 상업고등학교에서 필수인 주산·부기·타자 이런 것들이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그렇게 힘들 때 김용택 선생을 만났다. 그리고 그 수업을 통해서는 사고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환경에 휘둘리며 살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학생은 어느덧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 그리고 삶이 바뀐다는 것은 어떤 시기와 사람이 맞아떨어지면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3년 동안 취업을 위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공백을 극복하기가 어려웠어요. 또래 친구들과 차이도 많이 났고. 어떤 면에서 결혼을 오히려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연주 이사장은 결혼 이후 더 자기가 주도하는 삶을 꾸릴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신부 메이크업, 그림 그리기, 도자기 굽기 그리고 장사도 했다. 끝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엄마로서는 오히려 아쉬운 시간들이 많다.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우리 아이들과 같이 성장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아무 것도 모르던 엄마를 철들게 해줬다는 생각을 하지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제 생각대로 아이들이 자라지 않을 때 섭섭하기도 했고요. 지나고 나니 더 잘할 수 있었겠다 싶은 후회도 들고요.”

이연주 이사장은 자신이 힘들 때, 그리고 아이들이 힘들어 할 때 종종 김용택 선생을 떠올렸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줬을까. 그런 고민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고등학교 시절 그 짧은 기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던 스승이 교직을 은퇴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선생님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용마고등학교 계실 때 소식도 들었고요, 은퇴 직전 합포고등학교에 계실 때는 제가 찾아가서 뵙기도 했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선생님은 잘 기억 못하시더라고요.”

이연주 이사장은 스승이 좀 더 교육자 길을 걷기를 바랐다. 선생님에게 남은 힘이 있다면, 선생님 가르침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면, 정년이라는 나이와 학교라는 공간이 제약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선생님만 뜻을 함께 한다면 힘을 보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뜻을 조심스럽게 은사에게 전한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릅니다. 내가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내 삶을 바꿨지요. 그런 혜택을 저만 받고 끝나서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더 할 수 있는데….”

김용택 선생은 제자가 건넨 제안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2010년 보리학교 전신인 별초학교가 문을 연다. 학교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목적은 학교가 되는 데 있지 않았다. 그 점은 스승과 제자가 뜻이 같았다. 학교가, 그 틀이 버거운 아이들에게 일단 문을 열어두기로 했다.

“아이들이 힘들고 방향을 정하지 못할 때 그 순간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게 선생님 역할이라고 생각했지요. 저에게 선생님이 그랬듯이 말이지요.”

이연주 이사장은 교육을 다시 생각했다. 교육이 꼭 학교가 정한 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자신이 학교에서보다 학교를 떠나서 배운 게 훨씬 많았다. 뭘 잘못하면 큰일 날 것 같던 일도 겪고 다시 시작하면 모두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는 오히려 더 큰 배움을 막는 체계 아닌가. 아이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인가를 받아 학교 형식으로 가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찾아보니 또 그런 학교들이 많더라고요. 우리보다 앞서 가고 프로그램도 훌륭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런 틀에 갇힐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민할수록 인가를 받아 반드시 학교 형식이 돼야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학교 틀이 맞지 않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틀을 강요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김용택 선생과 이연주 이사장은 인가를 받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단 한 명이 보리학교를 찾아와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은 그렇게 모아졌다.

“큰애가 고등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과정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유별나지도 않은 아이가 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까. 계속 고민하니 나중에는 아이보다 학교 체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이연주 이사장은 학교가 아이들을 묶어두려는 틀 때문에 그 틀에 갇히지 않는 아이들이 상처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틀 때문에 겪는 아픔에 대해 무뎌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틀은 대안학교나 다른 형태로 만들어 인가를 받은 학교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보리학교가 지금까지 학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사실 학교라는 이름도 쓰지 않는 게 어떨까 생각해요. 보리학교가 휴게소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와서 쉬고, 책 보고,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도 되고요. 틀에서 벗어나고 싶고, 아직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곳이 보리학교였으면 좋겠어요.”

실제 보리학교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틀에 들어가지 못하고, 규정되지 못하고, 위치가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공부는? 진학은? 취업은? 보리학교에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곳에 있는 교사나 학생은 그저 함께 할 뿐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이연주 보리학교 이사장 /김구연 기자
보리학교 수업 시간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오후 1시가 지났지만 들어오는 학생은 없었다. 오후 2시 30분이 지날 무렵 학생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향한 질책, 문책은 없었다. 교사도 아이들도 책상에 둘러 앉아 그냥 편하게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보리학교도 할 일이 많아요. 우선 아쉽지만 일단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해야지요. 그러려면 일정한 수익원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사회적기업도 준비하고 있어요. 바른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그런 쪽으로 사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바른 먹을거리일까. 이연주 이사장은 또 한 사람 소중한 멘토로 김영숙 원장을 꼽았다. 김영숙 선생은 20년 넘게 대체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제가 건강에 이상이 있어 치료를 받다가 체질에 맞는 식이요법으로 사찰요리를 배우다 보니 가정에서 식생활이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자연이 가장 좋은 스승이에요.”

김영숙 선생은 이연주 이사장에게 건강과 함께 교육에 대한 영감도 불어넣은 셈이다. 이연주 이사장은 보리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자연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길 바랐다.

보리학교 이사는 이연주 이사장과 김용택 이사를 포함해 모두 12명이다. 이연주 이사장은 김용택 선생 덕에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른 것 묻지 않고 힘을 보태는 그들 덕에 보리학교가 날 수 있었고,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내가 하는 일을 유별나게 보지 않고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빼놓지 않았다. 3년째 보리학교와 엮이면서 자신도 역시 변하고 있었다.

“저도 전에는 백화점 다니면서 명품 사는 게 좋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그런 것 하나 사지 않으면 아이들이 여러 명 웃을 수 있어요. 돈을 값어치 있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고픈 적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지 막막하던 시절도 있었다. 작은 실패도 있었고 남부러워할 만한 성취도 있었다. 이연주 이사장은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그 시간 동안 참아줄 수 있는가, 틀에 가두지 않고 아이들을 바라봐 줄 수 있는가는 어른들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이곳에 오는 친구들은 밖에서 적용하는 기준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뭐라도 강요하지 않는 공간이 되고 싶지요. 그런 공간만 있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자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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