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하동군] 강이 품지 못한 삶도 보듬었던 나무들

하동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이곳 사람들 아닐지라도 한번 찾은 이들에게 그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섬진강이 자아내는 은은함 덕일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복잡한 이 마음을 소리 없이 위로하고,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모를 은빛 모래는 지친 이 몸을 포근히 감싼다.

정작 섬진강은 핏빛 다툼에 편할 날이 많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섬진강(蟾津江)' 이름 유래부터 그렇다. 두치강·모래가람·다사강으로 불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두꺼비 전설이 담기게 된다. 1385년 왜적이 침략하자 수십만 마리 두꺼비떼가 나타나 울어 대며 쫓아냈다 한다. 여기서 '두꺼비 섬' '나루 진'자를 땄다 한다.

뱃길이 중요 교통수단이던 시절, 이곳은 군침 도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한시대 백제가, 이후 통일신라가, 또 지나서는 후백제가 이 땅을 거머쥐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뱃길 타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 하루가 멀다 하고 호시탐탐 노렸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항쟁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의병이 들고 일어났다. 1950년대를 전후해서는 이데올로기 아픔에 핏물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섬진강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는 않았다. '하동 포구 팔십리'를 따라 생활 터전을 이어갔다.

1970년대까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교통수단은 '줄 배'였다. 광양 진월면 쪽에서는 하동으로 통학하는 이가 많았는데, '줄 배'가 발이었다. 하동 광양·구례를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둘 들어서며 그 풍경도 사라졌다. 하동 광평리~광양 다압면을 잇는 섬진교는 1935년 만들어졌다. 6·25전쟁 때 인민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됐다가 1980년대 중반 다시 연결됐다. 1992년에는 하동 금남면~광양 진월면을 잇는 섬진강교, 1995년 하동 금성면~광양제철소를 연결하는 섬진대교가 들어섰다.

2003년에는 하동 탑리~구례 간전면을 잇는 남도대교가 개통해 '영·호남 화합 상징'으로 부각했는데, 좀 뜬금 없기는 하다. 남도대교 바로 앞 화개장터가 '화합의 장소'로 한창 드러날 때였다는 점을 떠올릴 만하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시선이었다. 하동과 광양·구례는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이 불필요했다. 다리 하나 놓을 때 이름 놓고 지역 간 다툼이 많다지만, 남도대교는 그럴 일도 없었다. 광양에도 재첩이 많이 나지만 '하동 재첩'으로 이름났다고 해서, 반대로 하동도 만만찮은 매실이 '광양' 쪽에서 두드러진다고 해서 섭섭해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감탄한 하동 화개차밭./박민국 기자

시선을 옮겨보면 하동은 '나무'로도 빠지지 않는 고장이다. 십리벚꽃길 같이 단지 눈을 호사롭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동 벚나무는 오늘날 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팔만대장경 경판에는 나무 10여 종류가 사용됐다. 특히 산벚나무는 너무 무르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아 경판으로 더없이 좋았다 한다. 하동 지리산 쪽 벚나무는 이에 적합해 벌목 후 섬진강을 따라 남해 판각 장소로 옮겨졌다 한다.

1950년대에는 부산판자촌 짓는데 사용하기 위해 하동 지리산·광양 백운산에서 벌목한 것들이 섬진강을 타고 수시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하동은 차(茶) 시배지다. 신라 828년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간 대렴공이 '차 씨'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을 지정했고, 화개동천에 심으면서 싹 텄다. 화개차를 맛본 추사 김정희 선생은 "중국 최고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다.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주변은 지방기념물 61호 '우리나라 차 시배지'로 지정되었다. 화개면 정금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000년 차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거대 고목을 생각했다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차 나무는 원래 그리 크지 않아 높이 4m 20㎝·둘레 57㎝에 불과하다.

하동읍 광평리에 있는 소나무숲 '송림'은 1745년 조성돼 백성들 강바람·모래 피해를 덜게 했다. 악양면 '취간림'은 악양천 물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지금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힌 고 정서운 할머니 뜻을 기린 '평화의 탑'이 있어 의미를 더한다.

하동읍 광평리에 있는 '송림'은 1745년에 조성돼 섬진강 바람과 모래 피해를 막아주는 구실을 했다. /박민국 기자

악양면에는 눈길 사로잡는 소나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들판 한가운데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는 '부부송', 11그루 소나무가 하나처럼 보이는 '십일천송', 큰 바위를 마치 뚫고 나온 듯한 '문암송(천연기념물 491호)'이다.

옛 시절 섬진강 주변은 대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제방공사가 이러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대신 비옥한 땅을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 섬진강 빛과 흡사한 은빛비닐하우스가 강 주변을 차지하고 있다.

쌍계사와 함께 하동을 대표하는 사찰로 칠불사(七佛寺)를 꼽을 수 있다. 가락국 태조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수도한 후 성불하였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103년으로 전해진다. 이는 서기 48년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김해 장유사(長遊寺)와 함께 '불교 남방유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의미 부여되고 있다.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왕자들 보러 섬진강 뱃길로 들어와 오늘날 십리벚꽃길을 지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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