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시장1] 소설 토지 하동읍내시장 - 그곳에서는 경계가 없었다

시장은 현재 대형마트라는 높은 파도에 맞닥뜨린 가랑잎 배 같다. 시장을 가리키는 말도 재래시장이니 전통시장이니해서 어정쩡하다. 마치 아케이드 설치하고 새 간판 달고 재정비하는 모양새 같다. 지난 2010년 정부는 중소기업청의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다소 낙후된 느낌의 용어인 ‘재래’를 ‘전통’으로 변경하여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재래시장’, ‘전통시장’이라는 용어들을 벗었다 뒤집어썼다 해봐도 시장은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장은 옛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의 공간이 아니다. 여전히 생활과 삶과 애환의 공간이다. 현재형이란 뜻이다. <피플파워>에서는 경남의 18개 시군 지역에서 ‘오래된 역사’처럼 자리잡고 있는 시장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이어지는 생활을 찾고, 그 시장을 지켜온 사람들을 만나고자 한다.

경상남도 하동군은 한반도에서 봄이 가장 먼저 오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3월 초 매화꽃이 필 때부터 4월 벚꽃 피고, 5월 배꽃 피면서 녹차 잎 따는 시기까지 봄맞이 관광객으로 발 디딜 곳이 없는 곳이란 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리적으로는 북동쪽으로 지리산이 있고 그 지리산을 옆구리에 끼고 섬진강 물길이 남해 바다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 물길을 따라 화개, 범포, 해량, 광평 등 여러 시장들이 형성됐다. 이곳 시장은 산, 바다, 강, 들판에서 나는 모든 산물들의 집하장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 화개장과 하동읍내시장이다. 화개장은 이미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고, 하동읍내시장은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근처의 대형마트들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하동군의 모든 산물을 한눈에 둘러보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남해 해산물과 섬진강에서 나는 물고기 등을 쉽게 구경할 수 있고, 화개나 악양 깊은 골짜기에서 캐서 찌고 말리고 공들인 산나물이나 약재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 하동읍내시장이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40년, 50년 시장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2대나 3대째 이어온 가게들이 많았다.

‘지역갈등이 뭐꼬? 사는 게 먼저지’

/사진 권영란

“귀한 아들 딸도 나누어 가지는데 서로 쌈박질 할 일이 어딨남? 다리가 없던 60년대,70년대에도 하동장에 오면 장 보러 온 사돈끼리 마주치는 건 예사였제잉. 물건 싸게 흥정하려고 쫓아갔다가 얼굴보니 사돈네라 암말도 못하고 값 그대로 다 쳐주기도 하고, 딸자식 잘 봐달라고 값도 안 받고 고스란히 다 주기도 하고 그런 일이야 많았제.”

지난 8월 7일 하동읍내시장 주차장에서 만난 백발 노신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는 풍운아처럼 살아와서 이름은 못 밝히겠다고 말했다. 광양 망월에서 하동군에 볼 일 보러 가다가 살 게 있어 하동장에 왔다 했다.

이곳에서는 근현대사 속의 ‘영호남의 단절’이니 하는 말이 그저 무색할 뿐이다. 이들에겐 서로가 그저 장터에서 만나는 이웃마을 사람이고, 장꾼들이었을 뿐. 2003년 화개면 입구에 섬진강을 가로질러 ‘남도대교’가 생기면서 영호남화합의 다리라는 등 언론에서는 상징성을 자꾸 부여했지만,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대대로 생활을 일구어 온 하동군과 광양 쪽 사람들에겐 생뚱맞기만 할 뿐이다.

하동읍내시장은 장날이면 다리 건너 전라도 광양 다압 쪽 사람들도 물건을 사고 팔러 왔다. 섬진강과 가까운 광양시의 진월, 다압, 진상, 옥곡 사람들은 예전부터 강 저쪽 다압나루에서 배로 섬진강을 건너 이쪽 하동읍내시장에 왔다. 하동읍 근처의 광평나루, 해량포구는 늘 경상도, 전라도 사람할 것 없이 흥성거렸고, 그들이 가져온 물자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장날 새벽이면 아낙들은 강바닥에서 캔 재첩을 함지에 이고, 장정들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하동장터에 와서 팔았다.

이곳은 조선 말 진주시장·김천시장과 함께 영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하동군사(河東郡史)>에 따르면, 하동읍내시장은 1703년에 두치진(현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에 세워졌다. 광평리는 지금 하동 송림숲 옆에 있는 마을이다. 섬진강을 따라 남해안 바다까지 이어지는 수로의 발달로 시장의 형성이 섬진강 물길을 따라 쭉 이어져 왔다. 지금은 사라진 해량진시장이나 범포나루시장이 그 예이다. 하지만 육로가 발달되면서 섬진강변 시장들은 하나 둘 없어지거나 통합돼, 지금 남아있는 건 하동읍내시장과 화개장이다.

기록에 따르면 하동읍 읍내리 249번지 현 시장 위치에서 자리잡은 것은 1951년이다. 이때까지는 난전 형태였으며,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었다. 그러다가 여름이면 섬진강의 범람으로 해마다 피해가 반복되자 이를 줄이기 위해 1976년 하동시장을 공설 시장으로 등록하고 지금의 현대식 시장으로 규모를 갖추어나가게 되었다.

섬진교가 개통된 이후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왔다. 하지만 섬진교는 6.25전쟁 당시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폭파됐었다. 지금의 섬진교는 1986년에 다시 준공한 것이다.

섬진강 물길따라 사라진 시장들
하동읍내시장은 ‘아직 살아있다!’

/자료사진 하동군

“1960, 70년대 후반까지 만해도 정말 좋았다. 열차를 타고, 관광버스를 타고 하동장에 왔는데 이제는 안 오지.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인데다가 장날이면 가까이 있는 광양쪽 사람들도 오고, 또 송림과 섬진강 백사장이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 근데 읍내 가운데를 지르던 도로를 외곽으로 내고 나니 전부 휙 돌아가 악양으로, 화개로 가버리지. 달아나버린다. 읍내로 들어올 일이 없다. 시장 찾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다.”

하동읍내시장 번영회 최봉길 씨는 무척 갑갑해했다. 이런 취재가 뭔 소용이 있는가 싶으면서도 하동시장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좀 하자는 심정인 듯했다.

지난 8월 7일 하동읍내시장 주차장에 들어서니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하동경찰서 쪽 입구와 농협 쪽 입구에 내건 ‘소설토지 하동읍내시장’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서희가 진주에 가기위해 중간에 들린 곳도 하동장이었고, 용이가 월천댁과 마주친 곳도 하동장터였던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줄거리가 아슴아슴 떠올랐지만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이곳 시장이 활성화 방안으로 소설 <토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읽혀졌다.

시장 재정비사업을 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길목길목이 깨끗했다. 동네부엌, 여울목식당, 통일상회; 평화상회, 화개청과, 태성침장, 파랑새, 하동순대, 꼬마친구, 호야상회, 꼬까방, 다래탕제원, 덕성미곡상회…. 동그란 간판에 아기자기하고 순한 이름들이 정겹다. 뒤쪽으로 난 시장 골목길을 따라 이리저리 발길을 두니 어시장이 나오고 식료품 가게, 그릇 가게, 음식점·반찬 가게, 수산물 센터 등이 나왔다.

이곳의 면적은 1만 3625㎡이며, 연면적은 4,781㎡이다. 꽤 넓은 시장이다. 2010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점포는 47동에 471칸, 63㎡ 크기의 화장실 3개 동이 있다. 외곽에는 농협, 읍내파출소, 우체국, 산림조합, 병원. 터미널 등의 공공 기관과 다양한 편의 시설들이 늘어서 있다. 시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다.

현재 이곳은 지난해부터 ‘5일장을 문화광장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시장 활성화 방안을 다양하게 찾고 있다. 예전에 시장은 시장이자 그 지역의 문화메카였다. 경제의 중심만이 아니라 약장수, 서커스 등 서민문화가 있고 온 동네 이야깃거리가 도는 지역정보처이기도 했다. 지금은 지역경제와 물류의 중심이라는 그 기능마저도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다.

/사진 권영란

하동읍내시장은 장날이었다. 2일과 7일이 장날인데다가 때마침 시장 안 중앙광장에서 ‘5일장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통기타 반주에 맞춰 7080, 추억의 가요 같은 인기가요가 귓전을 울렸다. 또 10여명의 브레이크·힙합 댄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제법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올해 시장경영진흥원의 ‘2012년 공동마케팅 지원사업’에 선정돼 인제대학교 통기타·댄스 등 대학생 동아리를 초빙해 7차례의 공연을 준비해두고 있다. 젊은 층과 관광객의 발걸음을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시장 관계자인지 공연스텝인지 바쁘게 움직이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으니 간단히 소개하고는 금세 내뺀다.

여기에다 하동군 관계자의 설명은 더 자세했다.

“배, 감, 등 중간상인, 집합장소이다. 일반 소비자도 있고 중개상인도 있다. 봄나물부터 중개상인의 역할이 컸다. 시장 활성화를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상인들의 요구방안과 행정의 방안이 다르다. 문광부의 문전성시 등을 볼 때도 서로 경제마인드가 다르다. 중기청 등 아케이드 사업이 잘못될 수 있다. 중기청과 문광부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점도 이해한다.”

또 그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여져 한다. 덤과 인정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찾으러 시장에 온다. 강원도 주문진 등 관광형 시장으로서 손색없지만, 365일 생활 밀착형으로 돼야 한다. 주민들이 시장에서 물건 사서 속거나 실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성화시장이 있어 규모는 적지만 그 지역에만 가면 ‘딱’ 볼 수 있는 집중 물품을 마련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정아 형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동읍내시장은 지금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시장 상인들은 상인대로, 행정은 행정대로 옛 명성을 찾고 하동군의 경제동력이 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장 외곽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면이 모두 네 개의 큰 마트로 둘러싸여 있다. 어이쿠나, 싶다.

하동읍내시장의 ‘보물찾기’
“생재첩을 살 수는 없나”

/사진 권영란

이곳에는 먼저 유명한 ‘하동배’가 있다. 섬진강과 19번 도로를 따라 이어진 배밭은 배꽃이 피는 무렵이면 또 다른 하동의 볼거리였다. 요즘은 대봉감, 매실도 유명하다. 고추 마늘은 예전부터 하동읍내장이 집하장이었다. 어물전에서는 숭어, 민어 등을 잡자마자 소금에 절어 말린 ‘배다구’를 살 수 있다. 짭조름하니 쫀득한 생선살이 입맛을 돋운다. 게장을 두고 밥도둑이라는데 ‘배다구’만한 밥도둑도 없다. 그런데 하동읍내시장에선 그 유명한 재첩이나 참게를 구경하기는 어려웠다.

“재첩은 안 팔아예?”

“재첩 묵을려면 식당 가야제.”

하동읍내시장이라 해서 ‘재첩을 대야에다 놓고 되로 팔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생재첩을 구경할 수는 없었고, 식당에 가야 먹을 수 있었다. 가공을 해야 생산자들은 돈이 되고 소비자들은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이곳 시장에서 생재첩을 살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또 하동은 녹차가 유명하지만 녹차를 읍내시장에서 사고파는 일은 드물었다. 녹차는 고급화, 브랜드화 되고 있어 그런가 싶었지만 이 또한 아쉬운 일이었다. 재첩보다 더 유명했다는 ‘하동김’. 1960년대, 70년대를 풍미했던 ‘하동김’은 갈사만의 개발 탓인지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건어물전에서도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 시장 난전에는 ‘세장딴’이라는 말이 있다. 난전 자리는 일찍 와서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인 것 같지만 자리 주인이 다 있다.

“몇 날 며칠을 비우면 자리 주인이 바뀔 수 있다. 줄곧 자기 자리였지만 몇 번 빠지면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한 달 정도 비우면 난전 상인들은 옆 상인들이나 친한 사람에게 자리를 맡겨두고 간다.”

점포가 없는 난전 상인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방법이다. 이를 두고 ‘세장딴’이라 했다. 하동읍내시장에 가면 ‘세장딴’을 물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자료사진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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