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이념이나 진영보다 양심이 먼저더라”

“어 왔구먼. 어서 들어와.” 주소만 들고 2층집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일행에게 노인이 손짓했다. 짧게 정리한 백발 덕에 인상은 더욱 다부졌다. 티셔츠 위에 등산조끼 그리고 반바지 차림으로 걸어온 그는 대문을 고정해놓은 끈을 풀며 일행을 맞았다. “더운데 고생 많소. 안에 들어가면 시원할끼구마.”
노인은 1층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소파 옆에 스테인리스로 만든 높은 원기둥이 눈에 띄었다. 집보다는 공공장소가 어울릴 법한 재떨이였다. 노인은 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아 당겼다. “한 대씩 펴, 한 대씩 피라구.” 70년대 한국 농촌소설 전형을 만들었다는 <쌈짓골>(창작과 비평·1977) 작가 김춘복(74). 그가 사는 밀양 산내면 남명리 집은 고조·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던 곳이며 작가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마을은 <쌈짓골> 무대다.

소설가 김춘복 / 박민국 기자

“아니, 할배한테 들을 얘기가 뭐 있다고.”
“선생님 얘기가 듣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지, 어떻게 살았으며 등단은 어떻게 하셨는지, 편하게 옛날 얘기하듯 해 주시면….”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바짝 당겼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대더니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웃음 때문에 잠시 가려졌던 눈빛이 순간 반짝했다. 코로 연기를 뿜어내면서 말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면서기였어. 그때는 그게 뭐 큰 출세인줄 알았지. 난 산내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늘 전교 1등을 했어. 집에서도 기대가 컸지.”

중학교 2학년 때 정한 꿈

영특한 아이는 부산중학교에 진학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해, 부산은 임시수도였다. 지금 서울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인재가 한 곳에 모일 수밖에 없었고 부산중학교는 명문이었다. 밀양 촌놈은 입학하자마자 반에서 1등, 전교생 500명 가운데 10등을 한다.

“아버지 머리를 닮았는지 공부는 꽤 했어.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때 이용목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시집이라고 뭘 하나 들고 왔는데, 켄트지에 손으로 깔끔하게 옮겨 쓴 거라. 진짜 책처럼 만들었더라고. 와, 그게 참 그렇게 멋지더군.”

3학년 형이 만들었다는 수제 시집은 어린 춘복을 부추겼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밤을 새서 그럴듯한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반 친구들에게 내밀었다. 주변에서는 감탄이 쏟아졌다.

“재능 있다고, 멋지다고, 잘 만들었다고 어찌나 난리법석이던지…. 그때부터 내 취미는 글 쓰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거야. 애들이 춘복이 최고다 하면서 모여드는 재미가 쏠쏠하더라고. 그러다 보니 또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야. 그게 일상이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은사님을 만났지.”

새 학기 시작 때 수업이라 해봤자 뻔했다. 선생은 칠판에 자기 이름 쓰고 편한 이야기 하다가 자습시키고 1시간 마치는 게 당연했다. 처음 들어오는 국어 선생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소개도 없이 교과서부터 폈다. 마치 늘 하던 수업인 것처럼 한 시간을 마쳤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선생 이름을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한 놈이 막 알아봤나봐. 좀 있다가 들어오더니 애들한테 국어책을 막 흔들어. 교과서에 <윤이와 소>라는 작품이 있었거든. 국어 선생이 그 소설을 쓴 오영수 선생이라는 거야. 사람이 진짜 멋있게 보이더라고. 그래서 딱 정했어. 나 소설가 해야겠다고. 그래서 교과서에 이름 올려야겠다고.”

소년은 오영수 선생(1914~1979)을 찾아가 수줍게 습작을 내밀었다. 특정한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풋풋한 글. 굳이 나누자면 ‘콩트’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오영수 선생은 꼼꼼하게 봤다. 그리고 어린 춘복에게 조언했다.

“성격 묘사야. 친구 한 명을 정해 이름을 쓰지 않고 묘사해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 글을 보고 다른 친구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면 통과인 거야. 바로 감이 오더라고.”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전국에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라면 잡지에 기고를 했다고 한다. 춘복에게 <학원>은 마음껏 끼를 펼치는 무대였다. 춘복은 그 맛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늘 앞줄이었던 성적은 사정없이 미끄러져 전교 100등 안에도 춘복 이름을 볼 수 없었다. 결국 담임에게 야무지게 얻어맞고서야 다시 공부에 공을 들인다. 부산고등학교에는 가야되겠다고 다짐했고 무난히 합격했다. 그리고 다시 공부는 손을 놓았다.

소설가 김춘복 가족사진 / 박민국 기자

김동리 선생과 만남… 오만했던 시간들

“춘복아, 너 신문사에 응모했냐?”

“네.”“그런데 이름을 뭐라고 썼냐? 김거복이 뭐고?”

춘복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제신문이 주최한 ‘경남학생문예콩쿠르’에 응모했다. 원고지 70매 분량인 단편소설 제목은 <탈출기>였다. 소설·시·희곡·수필·평론 5개 부문 작품을 모집한 대회에서 춘복은 원래 있지도 않은 ‘경남도지사 상’을 받는다. 주최 측이 마련한 특별상이었다. 심사위원들에게 5개 부문 우수작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한 심사위원이 부산고등학교 국어 교사에게 그 일을 귀띔했고 그 교사가 춘복에게 확인한 것이다.

“김춘복이라고 썼지. 그런데 춘(春)을 초서로 날려 쓴 게 거(去)로 보였나봐. 우스운 것은 애초에 특등이 없어서 나만 상금이 없네. 그래서 소설 1등한 친구에게 원래 내 돈이니 너가 술을 사라고 했지.”

고등학생 춘복은 술을 곧잘 했다. 까만 교복 바지 무릎 아래는 늘 하얀 점이 콕콕 박혀 있었다. 선술집에서 마시다 바닥에 흘린 막걸리가 튀어 남긴 자국이었다. 그때부터 춘복은 이미 대학과 학과까지 정해놓고 있었다. 서라벌대 문예창작과, 당시 문예창작과가 있는 유일한 학교였다.

“그때는 공부 잘하면 당연히 법대, 하다못해 의대였지.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 간섭도 않으셨어. 난 완전 자유의지로 대학 갔다니까. 아버지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구.”

서라벌대 문예창작과에는 일주일에 한 번 ‘창작 실기’ 시간이 있었다. 당시 강사가 소설가 김동리(1913~1995)였다. 수업은 학생들이 쓴 소설을 돌려 읽고 품평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하루는 김동리 선생이 춘복이 쓴 <낙인>이라는 소설을 들고 온다.

“이 정도면 <현대문학>에 추천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옆에서 난리도 아니었지. 박수치고 부러워하고, 그때까지 그런 식으로 추천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22살 때 <현대문학> 추천작을 써낸 춘복은 23살 군대에 들어간다. 휴가 때면 그는 서울 명동을 거닐었다. 특히 당시 문인들 아지트였던 다방 ‘갈채’는 꼭 들렀다. 그리고 마침 김동리 선생을 다시 만난다.

“김동리 선생이 반기더라고. 그러면서 <낙인>을 ‘동인문학상’에 추천하려고 했다더라고. 그때가 동인문학상이 5회째였는데 그동안 김동리 선생 추천작이 모두 상을 받았어. 추천만 하면 수상하는 거야. 그런데 안 했다더라고. 그 이유가 등단도 안 한 내가 어린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받으면 기고만장해서 작품이 거기서 끝난다는 거야. 그럴 것 같으면 그 말도 안 했어야 하잖아.”

이야기를 잠시 멈춘 그는 다시 담배를 권했다. 그 대목에서 담배를 빨아들이는 숨은 더욱 깊어졌고 내쉬는 숨은 짧았다. 허허롭게 웃었지만 웃음은 입가까지 넓게 퍼지지 못했다.

“난 거기서 습작은 끝났다고 생각했어. 동인문학상 받은 사람이 됐지. 아예 공부를 놓았어. 평생 해도 끝이 없는 공부를 말이야. 군대 3년 동안 완전 썩었지.”

소설가 김춘복 / 박민국 기자

산중신곡 그리고 쌈짓골

1963년 김춘복은 밀양 단장면 홍제중학교에서 교사 일을 시작한다. 재정이 충분하지 못한 사립학교에서 일은 몇몇 교사에게 몰렸다.

국어 교사로는 할당된 시간을 채우지 못했고 미술과 체육교사를 겸했다. 그리고 매일 쏟아지는 공문 작업 역시 일상을 더욱 빡빡하게 했다. 원고지와 펜은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방학 때 김동리 선생께 작품을 써서 보냈어. 그런데 계속 무소식이야. 작품이 되면 추천해줄 건데 아무 말도 없어. 오죽 갑갑해서 친구들이 김동리 선생을 찾아갔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 선생 말이 첫 작품이 너무 탁월해 그것을 능가하지 못하면 추천할 수 없다는 거야. 어쩌겠어. 맞는 말인데….”

1968년 김춘복은 홍제중학교에서 세종고등학교로 옮겼다. 그는 그 때를 낚시와 술에 빠진 시기라고 기억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찮게 부산일보 기자에게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처음 받아 본 신문사 원고 청탁, 그리고 분량은 원고지 6매. 하지만, 그는 며칠째 글을 쓰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김춘복이 이제 끝났네. 당신도 끝났어’라고 했다. 그는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린다.

“내가 원래 사회 참여적인 글을 좋아했어. 그런데 당시에는 이청준이 쓰는 글 스타일이 대세인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안 되는 글을 쓰려고 했지. 당연히 뭐가 되겠어? 그런데 마침 황석영 <객지>, 김정한 <인간단지> 같은 글이 뜨는 거야. 그때부터 막 쓰고 싶더라고.”

김춘복은 일단 밀양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1974년 부산 영남상고로 옮긴 그는 그때부터 <산중신곡>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원고지 129매 분량으로 마무리한 <산중신곡>을 그는 마침 부산에 있던 김정한(1908~1996) 선생에게 들고 간다. 김정한 선생은 춘복에게 사흘 뒤에 오라고 했다.

“김정한 선생이 무슨 소설이든 3분의 1 이상 읽은 게 없대. 그런데 내 소설은 끝까지 읽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나보고 형상화가 부족하다더군.”

주인공이 ‘아침을 먹고 지게 지고 나갔다’는 한 구절만 놓고 김정한 선생은 이렇게 충고했다. 아침을 뭘 먹었는지, 반찬은 뭐였는지, 가난하다 말하지 말고 밥과 반찬만 보면 무슨 삶인지 알게 하고, 지게는 어떤 지게를, 낫은 어떤 낫을, 꼴은 무슨 꼴을 베었는지 써라. 세상에 이름 없는 풀 없다. 소설가라면 그 정도 성의를 보여라.

“난 그때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 같더라고. 지금까지 배운 게 모두 헛배웠구나 싶었을 정도로 순간 뭐가 스쳤지. 난 그냥 스토리만 적었던 거야.”

1975년 김춘복은 서울 중앙대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일상은 수업과 창작이었다. 오후 3시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가서 저녁 먹고 잤다. 그리고 오후 7시쯤 일어나 밤새 글을 썼다. 원고지 1150매 소설 <쌈짓골>은 그렇게 나왔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한국사회 구조적 모순을 밀양에 있는 한 시골마을을 무대로 펼친 이 소설은 현대 농촌문학 전형으로 꼽히는 수작이다.

잠시 손짓으로 말을 멈춘 그는 서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트 한 권을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색이 바라 잘못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노트는 <쌈짓골> 초고였다. 무대가 되는 마을 지도, 등장인물 성격·습관·묘사 등을 상세하게 정리한 노트였다. 노작가는 <쌈짓골> 마지막 단락에 ‘끝’을 쓰고 한참 울었다고 했다.

김춘복 소설가 인터뷰 장면 / 박민국 기자

등단, 꽃바람 꽃샘바람… 그리고

“<쌈짓골>로 응모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해 유난히 공모가 없는 거야. 황당하더라고. 목표를 잃었지. 이거 어떡해야 하나 하는데 친구가 ‘창작과 비평’에 들고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보자기에 1150매 원고를 싸서 들고 갔지. 염무웅 씨와 백낙청 씨가 있었어. 백낙청 씨가 원고를 두고 가면 연락을 준다고 하더라고. 1개월 뒤에 연락을 받았어.”

1976년 <쌈짓골>은 ‘창작과 비평’을 통해 연재됐다. 소설가 김춘복 등단은 이 때로 보면 된다. 그는 ‘창비’를 통해 등단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창비 덕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가입할 수 있었고 함석헌, 문익환, 이영희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쌈짓골> 이후 김춘복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다. 원고지 2000매가 넘는 <계절풍>을 연재했고, 단편을 모아 <벽>이라는 소설집도 냈다. 그리고 1989년 <꽃바람 꽃샘바람>을 내놓는다.

“나에게 최고는 <꽃바람 꽃샘바람>이야. 아마 우리 소설에서 3·15를 제대로 다룬 게 그것밖에 없을 걸. 더 고마웠던 건 몇 년 전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이 책을 재발간하겠다는 거야. 나는 뭐 3·15 기념관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 그래서 영 마음에 남았던 아쉬운 부분을 손질해서 다시 내놓았어. 고마운 일이야.”

노작가는 갑자기 책꽂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며 자리를 옮겼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런 사진이 없다며 밝게 웃었다. 걸걸한 목소리에 잘 짜인 이야기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걸음이 편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건강? 하루에 담배 두 갑 태워. 운동기구 많이 사놓았는데 하나도 안 해. 걷기라도 많이 해야 하는데, 내가 담배 사러 저 밑에 가게에 하루 두 번은 왔다 갔다 하자 해놓고 막상 가면 담배 한 보루 사버려.”

그는 9년 전부터 한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이르면 오는 9월 출간할 예정이다. 제목은 <칼춤>이라고 했다. 밀양 출신 기생 운심과 운심이 사모한 관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와 현대, 280년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라고 했다. 노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념과 진영을 넘어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진보만 있어도 안 되고 보수만 있어도 안 돼. 함께 가는 거야. 그런데 무조건 하나로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야. 기준과 인식은 있어야 해. 나는 사람들이 최소한 역사의식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거 양심이다.”

노작가는 높은 단계 양심과 낮은 단계 양심으로 갈라서 설명했다. 개인 양심, 가족 양심, 마을 양심 그리고 정당, 국가, 민족, 인류 양심까지. 낮은 단계 양심에서 아무리 걸리는 게 없더라도 높은 단계 양심에 걸리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정당들 마음대로 하는 짓거리가 정당 양심에서는 맞을지 몰라. 그런데 국가 양심으로 볼 때 아니면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요즘 우리는 높은 단계 양심을 무시하고 낮은 단계 양심만 챙겨서 안 되는 거야. 그거 주먹 쓰는 놈들 논리랑 다를 바 없다고.”

거기까지였다. 그는 나머지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곧 나올 책에 미뤘다. 그리고 그때까지 말을 듣던 사람, 받아쓰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을 모두 모아 재촉했다.

“먼 길 왔잖어. 삼겹살이나 구워 먹자고. 내가 잘 가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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