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물자가 흐르는 알토란 같은 곳 밀양

길과 길이 만나고, 사람과 물자가 흐르는…

길게 놓인 철길은 경부선이다. 철길 너머는 바로 낙동강이다. 강을 따라 눈길을 옮기면 멀리 낙동대교에 닿는다. 낙동대교 위로는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낙동대교 너머에는 삼랑진교가 있다. 그 너머에 강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경전선이다. 밀양시 삼랑진읍 작원관지(鵲院關地)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이렇다. 영남지방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 요지라는 이곳 사람들 자랑에는 과장이 없다. 그리고 그 자랑은 조선시대부터 비롯한다.

경남 양산·밀양, 경북 청도·대구·칠곡·상주·문경, 충북 충주, 경기 안성·용인을 이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짧은 길이 생긴다. 걸어서 15~16일, 960리(380여㎞). 이 길이 바로 영남대로(嶺南大路)다. 지금 고속도로나 철길보다 서울과 부산을 가깝게 잇는 길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 사이 사람과 물자는 영남대로 위를 흘렀다.

   

양산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밀양으로 들어가면 강과 벼랑 사이 좁고 험한 길을 먼저 만난다. 작원잔도(鵲院棧道)이다. 양산 황산잔도(黃山棧道), 경북 문경 관갑잔도(串岬棧道)와 더불어 영남대로에서 험하기로 유명한 벼랑길이다. 벼랑길은 둘러가서는 의미 없는 영남대로를 끊기지 않게 한 이음쇠였다.

작원잔도는 겨우 수레 한 대 지나가는 길이었다. 더불어 그 옆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남쪽으로 꺾이며 폭이 좁아지는 지점이기도 했다. 뭍 길도 물길도 다니기는 버거웠지만 관리하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 작원관(鵲院關)을 뒀던 이유다. 작원관 관리는 지나가는 사람과 물자를 검문했다. 관원에게는 묵을 곳을 내주었다. 그리고 좁은 길목은 적을 막기에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1592년 4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 8000여 명이 작원관 앞에서 멈춘다. 부산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왜군은 아무 저항 없이 양산을 지나 북진했다. 영남대로는 한양까지 군사가 이동하기에도 좋은 길이었다. 거침없는 진격을 가로막은 이는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이다. 강과 벼랑 사이 좁은 길목에서 왜군과 대치한 조선군은 300여 명, 백성까지 더하면 700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호락호락 길을 터주지 않으며 여러날 버틴다. 작원관 전투는 결국 양산 쪽으로 산을 넘어 작원관 뒤로 돌아들어 온 왜군이 끝낸다.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지면 돌과 바위를 굴렸고 조총에 당하면 왜군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작원관지는 지난 1995년 원래 자리에서 1.2㎞ 정도 북서쪽에 조성됐다. 남쪽을 향해 '한남문'을 지었으며 전적기념비와 위령비도 세웠다. 교통요지 밀양, 그리고 굽힘 없는 이곳 사람들 기개는 작원관 풍경과 역사에서 엿볼 수 있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알토란 같은 땅

내륙지역인 밀양은 동·북·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지만, 여기저기 솟은 산은 3면을 둘러싼 산과 더불어 곳곳에 분지를 이룬다. 이 같은 땅 생김새 탓에 밀양은 유난히 여름 기온이 높다.

밀양은 '영남 알프스' 주요 봉우리인 가지산(1240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운문산(1188m)이 걸친 곳이다. 영남 알프스 주봉과 더불어 화악산(931m), 구만산(785m), 천태산(631m), 철마산(630m), 만어산(670m) 등은 저마다 부드러우면서 당당한 맵시를 뽐낸다.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다가 봉우리에 다다르면 우뚝 솟는 산세는 동부 경남에 뻗은 산맥들이 지닌 전형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밀양시 전체면적(799.01㎢) 가운데 농경지(175.71㎢)가 차지하는 비율은 22% 정도다. 이 가운데 논이 124.93㎢, 밭이 50.78㎢로 논농사가 활발하다. 이곳 농경지 대부분은 풍부한 하천 덕에 물대기가 편하다. 서남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며 밀양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밀양강은 곳곳에 지류를 뻗었다. 밀양강과 지류를 합한 유역 면적은 1476㎢에 이른다. 풍부한 수량은 예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비옥한 땅을 내주었다. 금천리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논 유적과 '수산제 수문'(하남읍)은 활발했던 옛 농경문화를 증명한다. 특히 낙동강 물을 끌어들였던 수산제 수문은 벽골제(전북 김제), 의림지(충북 제천)와 더불어 삼한시대 3대 농경문화 유적이다.

밀양은 작물·과수 재배도 활발하다. 전국 수요량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들깻잎을 비롯해 고추·대추는 밀양 대표 특산물이다. 또 당도가 높은 얼음골 사과와 삼랑진 딸기 역시 유명하다. 삼랑진은 이 나라에 딸기를 처음 들여온 곳이기도 하다. 삼랑진에서는 한 해 걸러 한 번씩 3월 말에 '삼랑진 딸기 한마당 축제'를 연다.

드넓게 펼쳐진 하남평야.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밀양이지만 밀양강 유역의 비옥한 땅 덕분에 뛰어난 농업생산력을 자랑한다./박민국 기자

풍부한 하천이 농사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밀양강과 낙동강은 은어, 잉어, 향어, 숭어 등 민물 어종이 풍부했다. 더불어 낙동강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다 어종도 올라오곤 했다. 이곳 사람들은 때가 되면 강에서 전어나 문어를 잡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이 같은 환경 덕에 산외면에는 경남에 하나뿐인 '수산자원연구소 민물고기연구센터'가 있다. 1968년 '경상남도 연어인공부화장'으로 들어선 연구소는 경남지역에 토속어와 우량어종을 생산·공급한다. 보유어종은 철갑상어·향어·은어·빙어 등 17종이며 2만 300여 마리를 관리한다. 아울러 연구센터에는 생태공원과 전시관을 운영해 누구나 민물고기 생태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넉넉한 강이 준 또 한가지 선물은 한천이다. 밀양은 예부터 우뭇가사리로 만드는 품질 좋은 한천을 특산물로 내세웠다. 겨울철 밤낮 일교차가 일정한데다가 깨끗하고 풍부한 물은 한천 생산에 적합한 여건이었다. 벼농사를 마친 논에서 만든 한천은 농가에 적지 않은 소득을 안겼다. 이곳 한천은 생산량 가운데 90% 정도를 일본·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는다.

밀양 자연이 품은 신비

산내면 얼음골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는 사과 모양을 한 커다란 간판이 있다. 간판에는 전광판을 넣었는데 얼음골과 주차장 온도를 두 줄로 표시한다. 2012년 7월 28일 낮 주차장 온도는 35℃, 얼음골 온도는 1℃를 기록했다.

밀양 3대 신비 중 하나인 얼음골. 여름 한낮 기온이 1℃밖에 되지 않아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박민국 기자

주차장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얼음골로 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당장은 1℃ 온도를 체감할만한 기운은 없다.

얼음골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먼저 천황사를 만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213호 '천황사 석불좌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머리는 파손돼 새로 만들어 얹었다. 그러나 머리 아랫부분만으로도 옛사람 솜씨를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이 불상이 앉은 대좌는 11마리 사자 조각이 떠받친 사자좌(獅子座)이다. 사자좌 대좌는 국내 하나뿐이라고 한다.

천황사를 마주 보고 오른쪽에 걸친 다리를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몇 걸음만 옮기면 바로 공기가 바뀐다. 마치 벽 없는 냉동창고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재약산 북쪽 중턱에 자리한 얼음골이 뿜는 냉기는 느닷없이 다가온다. 걸음을 더 옮기면 돌무더기 주변에 울타리를 친 '결빙지(結氷地)'에 닿는다.

얼음골 신비는 이미 풀이된 지 오래다. 바깥의 더운 공기가 바위틈 작은 구멍으로 스며들어 땅속 차가운 바위와 지하수에 닿고, 얼음골 바위틈으로 다시 새어나오면서 압력차로 단열냉각(斷熱冷却) 현상을 일으킨다는 게 과학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런 풀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저 '밀양의 신비'로 받아들이는 게 계곡 냉기를 즐기는 마음가짐인 듯하다.

밀양을 대표하는 절이라면 당연히 표충사다. 하지만,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표충사 명성에 '만어사'가 가려지는 것을 늘 경계한다.

삼랑진읍 만어산에 있는 이 절은 가라국 수로왕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만어사에는 보물 제466호 '만어사 삼층석탑'도 있다. 비록 유서 깊다지만 이 땅에 흔한 절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던 이 절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절 앞에 넓게 펼쳐진 바위밭이다. 돌로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들린다는 바위, 경석(磬石)이다. 실제 이곳저곳 바위를 두드리다 보면 금속성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돌로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들린다는 바위, 경석. 삼랑진읍 만어사에 있다.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박민국 기자

무안면 홍제사 안에는 표충비가 있다. 사명대사(1544~1610) 충의와 공적을 새긴 이 비석은 1742년 세워졌다. 높이 380㎝, 너비 98㎝, 두께 56㎝인 거대 비석은 '땀 흘리는 비'로 유명하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이 비석은 사명대사 영험이 서렸다 하여 이곳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다./박민국 기자

밀양시는 얼음골, 만어사 경석, 표충비를 아울러 '밀양 3대 신비'로 내세운다. 하지만, 계곡물이 화강암을 깎아 호박 같은 웅덩이를 만든 '호박소'(산내면), 거대한 바위 하나가 계곡 전체를 덮었다는 '오천평반석'(산내면), 재약산 8분 능선에 펼쳐진 벌판 '사자평'(단장면) 등 곳곳에 있는 절경 역시 그 신비로움이 뒤지지 않는다. '3대 신비'가 영리한 홍보지만 아쉬운 것은 그만큼 여기 자연이 품은 매력이 크기 때문이다.

작은 무덤 하나에도 서린 이야기

밀양시 내일동에는 밀양강을 나지막이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이 있다. 그 언덕에 밀양은 물론 경남이 자랑하는 목조 건물 영남루(嶺南樓)가 의젓하게 서 있다. 고려 때 세운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44년 다시 지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이 나라 3대 누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옛사람들이 영남루에 바친 찬사는 이곳에 걸린 현판만 읽어도 차고 넘친다.

嶠南名樓(교남명루·문경새재 남쪽에서 이름난 누각), 江左雄府(강좌웅부·낙동강 왼쪽에 있는 아름다운 고을), 湧金樓(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누각), 顯敞觀(현창관·사방이 높고 넓게 나타난다), 江城如畵(강성여화·강과 성이 그림 같다) 등이다. 여기에 누각 안쪽 가운데 떡하니 걸려 있는 '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 현판에는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더불어 퇴계 이황(1501~1570), 목은 이색(1328~1396), 삼우당 문익점(1329~1398) 등이 남긴 현판은 가뜩이나 매력적인 건물에 풍부한 이야기를 더한다.

영남루 아래에는 아랑사가 있다.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 딸이었던 아랑을 기리는 사당에 얽힌 이야기는 '장화홍련전'과 상당히 닮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며, 새로 부임한 부사마다 원귀(寃鬼)를 보고 죽었다는 것, 용감한 사내가 부사를 자원해 원한을 풀어줬다는 점 등이다. 밀양에서는 지난 5월 제55회 아랑제가 열렸다.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남루. 이황·문익점 등 위인들이 남긴 현판이 풍부한 이야기를 전한다./박민국 기자

단장면에는 표충사(表忠寺)가 있다. 표충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사명·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이 있다. 불법을 닦는 터전이 '호국 성지'로 거듭난 이유다. 이야기는 또 그렇게 더해진다.

밀양 곳곳에 넘치는 이야기는 큰 유적에만 갇히지 않는다. 부북면에 있는 '추원재'는 밀양이 자랑하는 큰 어른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태어나 자란 집이다. 묘소 옆에는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한 김종직 시신을 끝까지 지켰다는 호랑이 무덤이 있다. 또 상동면에 있는 '운심이 묘'에는 칼춤에 능한 기생이 끝까지 한 남자를 그리워했다는 아련한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다.

상동면에 있는 기생 운심이 묘. 끝까지 한 남자를 그리워했다는 사랑이야기가 전한다./박민국 기자

안타까운 밀양도자기

밀양은 산업화가 더딘 곳이다. 1937년 들어선 '조선모직'이 섬유 산업을, 1939년 들어선 '밀양도자기'가 요업을 이끌었으나 그 정도다. 오늘날 밀양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면 '한국화이바' 정도를 꼽는다. 1972년 설립된 한국화이바는 유리장섬유, 파이프, 각종 복합재 등을 생산하는 업체다. 밀양시는 사포·용전·하남일반산업단지 추진으로 뒤늦은 산업화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성과를 가늠하기에는 한참 이르다. 그런 점에서 한때 밀양 산업을 대표했던 '밀양도자기'가 그 저력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밀양도자기는 우수한 생활 자기를 생산하던 업체였다. 잘나갈 때는 종업원 600~700여 명이 달마다 100만 개가 넘는 그릇을 생산했다. 가곡동 일대에는 3대가 자기 제작 기술을 익힌 집이 흔했다고 한다. 밀양도자기 제품은 유난히 야물고 빈틈없기로 유명했다. 그 기술력은 1972·1973년 우수상품 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으로 증명된다.

밀양이 훌륭한 자기를 생산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흙이 있다. 밀양 흙을 퍼가서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밀양 땅은 풍족하게 농산물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자산이었다. 또 맑은 물은 그릇 질을 더욱 높였다. 밀양도자기는 공장에 수로를 둬 밀양강 물을 끌어 썼다. 더불어 작은 흠집에도 가차없이 망치를 들이대던 꼼꼼한 검수 과정도 제품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밀양도자기는 사운이 기운다. 현재 가곡동 공장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줄어든 '밀양본차이나'가 그릇을 생산하고 있다.

밀양도자기 쇠락에 대한 아쉬움은 짙다. 이는 단순히 무너진 공장에 대한 미련이 아니다. 이미 갖춰진 환경과 빼어난 기술력은 그 쓰임새를 잃었다. 또 도자기와 맞물릴 수 있는 문화적 영감 역시 활용할 길이 없다. 이곳에서 그릇을 빚는 사람 중에는 '밀양도자기' 이름을 지켰다면 최소한 경남에서 도자기 이름 앞에 먼저 붙는 지역이 김해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한숨짓는 이도 있다.

호투쟁(好鬪爭) 밀양 사람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며 기온이 온화하다. 사람들은 농사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나 투쟁을 좋아한다'.

1425년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가 기록한 밀양이다. 짧은 기록이지만 은근히 밀양에 대한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먼저 '학문을 숭상한다'에서 밀양이 자랑하는 두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춘정 변계량(1369~1430)과 점필재 김종직이다.

변계량은 조선 초 20년 동안 대제학을 맡았던 석학이다. 당시 외교문서는 모두 그를 거쳤다 할 정도로 문장가이기도 했다. 초동면에는 변계량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는 '변계량 비각'이 있다.

대제학이 나온 땅이 밀양이니 〈경상도 지리지〉에서 '학문을 숭상한다'는 표현이 빠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구절이 대제학에 대한 예의에서 그치지 않는 것은 김종직 덕이다. 김종직은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세우려 했던 '사림파' 사조(師祖)이다. 조선시대 유학을 크게 발전시킨 '동방오현(東方五賢)' 가운데 정여창(1450~1504), 김굉필(1454~1504)이 김종직에게 배웠다. 부북면에 있는 예림서원은 훗날 김종직을 마음으로 받들던 선비들이 학문을 익혔던 곳이다. 예림서원 근처에 있는 추원재는 김종직이 태어나 자라고 눈을 감은 집이다.

부북면에 있는 호랑이 무덤.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한 김종직의 시신을 끝까지 지켰다는 호랑이다./박민국 기자

〈경상도 지리지〉에 나온 '好鬪爭'(투쟁을 좋아한다)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밀양은 고려 때부터 일어난 크고 작은 민란 기록마다 이름이 등장하는 지역이다. 고려·조선사에 걸쳐 이곳 백성이 모진 관리를 처단했다는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투쟁을 좋아한다는 묘사가 단순히 성격이 거칠고 모나 충돌이 잦다는 해석으로 끝나는 것은 곤란하다. 고려 때 삼별초 항전, 임진왜란 때 의병·승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등 국난 때마다 이에 맞섰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에도 밀양은 빠지지 않는다. 특히 밀양시가 의미를 둬 기록에 남긴 이곳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만 58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약산 김원봉(1898~?)은 따로 짚어둔다.

밀양에서 태어나 19세 만주로 이주한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했다. 1930년 베이징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해 '레닌주의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운영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며 민족주의 운동 한 축을 이뤘다. 그는 이후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역시 밀양 출신인 윤세주(1901~1942)와 함께 상당한 전과를 거둔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하며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으로 합쳐졌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해 각 정파 통일과 단결에 힘썼다. 이후 1948년 월북한 김원봉은 북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다 1958년 숙청됐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활약을 펼쳤던 독립운동가는 남북 역사에서 모두 지워졌다. 이념을 떠나 무엇보다 민족을 앞에 뒀던 혁명가에 대한 평가는 다시 진행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호투쟁'에 담긴 밀양 사람들 성정은 거칠고 지기 싫어하며 꿋꿋하고 강인하다. 오늘날 밀양 사람에 대한 인상도 그런 기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라는 애교와 정든 임이 왔어도 인사 못하는 수줍음을 경쾌한 가락에 담은 '밀양 아리랑' 역시 이곳 사람들 성정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계곡물이 화강암을 깎아 만든 호박소. 옥황상제가 내린 벌로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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