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가장 공정하고 신뢰성 있는 가치 평가 위해"

58년 개띠인 이경희 회장은 천주교 신자다. 1983년께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기기증센터에서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당시만 해도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 자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어느 맹인 부부가 글을 읽고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대학 1학년, 고교 1학년 아들이 있다. 이들 둘 다 성직자가 된다고 해도 말릴 생각이 없을 정도로 신앙이 깊다. 마산 월영성당 사목회 부회장을 맞고 있다.

조영남의 ‘딜라일라’를 즐겨 부른다. 노래를 잘한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대부분 팡파레를 터뜨린다. 색소폰 연주와 사진이 취미다. 창신대학 부동산학과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제자들의 입학·졸업 때 색소폰 연주를 선물한다. 니콘D80 카메라를 끼고 산다. 가끔씩은 직접 건물 구석구석을 찍어 수업에도 활용한다. 음식은 라면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도 집안 청소와 빨래·설거지는 곧잘 하는 남자다.

부인 조정자(53·전 합포문화여성포럼 회장)씨는 창원지법 마산지원 가사조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은 “원래는 촌스러운 이름인데 조정위원이 되고 나서는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됐다”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 회장 본인도 창원지법·창원지법 마산지원 민사조정위원을 맡고 있다.

색소폰 연주하는 이경희 지회장.

보통사람들에게 ‘감정평가사’는 용어부터 생소하다. 은행에 주택이나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내 소유 토지가 공공사업에 편입돼 보상을 받게 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감정평가다. 감정평가 결과에 따라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 규모도 달라진다. 감정평가는 대출을 해주는 쪽이나 대출을 받으려는 쪽 모두에게 중요한 업무다. 실제 가치 보다 비싸게 평가되면 대출금액이 늘어나 자칫 은행이 부실해질 수 있고, 실제 가치 보다 너무 싸게 평가되면 대출을 받으려는 쪽이 억울하게 된다.

공공사업 보상도 마찬가지다. 도로 건설 등 공공사업을 위해 시민 개인의 토지와 건물을 편입하면서 적정하게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데 턱없이 많이 주면 특혜에다 세금 낭비가 될 터이고 턱없이 적게 주면 말썽이 생기게 되고 공공사업 추진에도 차질을 빚게 된다. 그래서 물건의 가치를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적정 가치를 매겨주는,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바로 감정평가사다.

전국에는 3268명의 감정평가사가 활동하고 있고 이 중 울산·경남에서 177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경희(54·제일감정평가법인 경남지사장) 한국감정평가협회 울산경남지회장은 이들 177명 감정평가사를 대표하고 있다. 한국감정평가협회는 회원인 감정평가사의 전문성·권익 향상과 감정평가제도 개선, 감정평가업계 종사자들의 공익 기여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감정평가는 공정하게, 사람에겐 예의와 신뢰를

이경희 회장은 1997년 늦깎이로 감정평가사가 됐다. 오랫동안 행정고시 공부를 하다 방향을 틀었다. 행시 1차는 여섯 차례나 합격했지만 2차 관문 통과에는 운이 닿지 않아 감정평가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감정평가사 시험문제를 출제할 만큼 업계 안팎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감정평가사가 됐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마산회원구 내서읍을 잇는 현동∼내서 5번 국도와 현재 진해구청, 진해구청 앞을 지나는 2번 국도 구간이 이 회장의 감정평가를 거쳐 진행된 공공사업이다.

1999년 한일어업협정이 맺어졌다. 당시 우리나라 어선이 일본 근해까지 가서 조업을 하는 바람에 마찰이 빚어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됐다. 그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로 어선 감척이 이뤄졌다. 이 회장은 어선 감척 보상을 위한 감정평가를 맡았었다. 하루에 1000km 이상을 달린 날도 많았다. 감정평가를 하려면 직접 어선을 살펴봐야 한다. 어선의 선적은 통영이지만 동해나 서해로 조업을 나가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해당 어선이 항구에 배를 댄다고 하면 동해든, 서해든 어디든 달려가야만 했다. 어선을 평가하려면 필수적으로 살펴봐야하는 부분 중 하나가 기관실이다. 대형 어선의 기관실에 들어가면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소음이 크다. 또 엔진 열기 때문에 비 오듯 땀이 흐른다. 거기다 온통 기름 범벅이어서 입고 간 옷이 온전한 날이 거의 없다. 이 회장은 그렇게 약 6개월 동안 정신없이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이경희 한국감정평가협회 울산·경남지회장./박일호 기자

이 회장에게는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2000년 대 초반, 진해항에는 러시아 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 중에 한 척이 장천항에 발이 묶였다. 러시아에 있는 선주사가 부도가 나면서 진해항 정박료를 못낸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로 돌아갈 연료조차 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배는 경매에 붙여졌고 선원들은 6개월 넘게 배 안에 갇힌 채로 라면만 먹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이 감정평가를 위해 배에 올랐을 때는 한여름이었다. 배 안은 뜨거운 태양에 철판이 달구어져 찜통보다 더 더웠다.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이 회장은 감정평가를 해놓고는 러시아 선원들을 데리고 시내로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주었다. 이후 그 배는 경매됐고 경매대금 중 일부를 임금으로 받은 선원들은 러시아로 돌아갔다. 당시 이 회장의 행동은 그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도 감정평가

감정평가사들은 어떤 것들을 감정 평가할까?

평가 대상 물건은 다양하다. 감정평가업계에서는 ‘사람 빼고는 다 한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건물, 토지, 배, 자동차, 항공기, 기계는 물론이고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대부분의 부동산·동산이 감정평가 대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도 평가한다. 어업권, 광업권, 기업가치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평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필로폰 등 법적으로 거래가 금지된 품목은 감정평가하지 않는다. 또 골동품 등 거래자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물품도 감정평가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이경희 한국감정평가협회 울산·경남지회장./박일호 기자

변호사, 세무사, 노무사, 변리사 등 우리 사회의 전문직종은 대체로 의뢰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감정평가사는 의뢰는 받지만 의뢰인에게 유리하도록 일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일한다.

전문직의 세금 탈루 문제가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감정평가사는 세금도 잘 낸다. 감정평가는 은행, 법원, 지방자치단체, 공사 등에서 의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매출을 속일 수가 없다. 그러니 세금을 덜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구조다.

이경희 한국감정평가협회 울산·경남지회장./박일호 기자

은행이 물건을 담보로 대출을 해줄 때 설정비를 대출받는 사람에게 물게 하는 관행은 잘못됐다는 법원 판결이 작년에 있었다. 이 때문에 금융업계는 대출받는 사람에게 물리던 설정비를 은행이 부담하게 됐다. 최근 금융업계는 이 비용을 줄이고자 자체적으로 담보물건을 감정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회장은 이런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이 회장은 “은행이 자체적으로 물건을 평가하게 되면 안정지향으로 물건을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실제 가치 보다 낮게 평가하고 이를 근거로 대출을 적게 해줌으로써 대출금 상환이 안되더라도 최대한 손해를 적게 보려고 의도적으로 물건을 낮게 평가하게 된다”라며 “이렇게 되면 대출자는 필요한 금액을 대출받기 위해 전보다 더 고가의 물건을 담보로 제공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기관이 특정인과 결탁해 담보물건의 가치를 턱없이 높게 평가하고 이를 근거로 많은 돈을 대출해주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라며 “당장에는 비용을 조금 줄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금융기관을 부실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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