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정자 125채 '풍류의 땅'…농민운동 불꽃핀 '저항의 땅'

거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저마다 수승대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 거북바위에 스며있는 옛 풍류가 멋을 흉내 내듯, 꽃잎 띄운 술잔 기울이며 시 한 자락 마음 놓고 읊기도 했다. 이런 별천지가 바깥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마음 졸이던 것은 옛 시간으로 남고, 이제 넘쳐나는 외지 손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창이 가야·백제·신라 접경지대에 놓여 치열한 다툼의 장이었다는 점은 '수승대'라는 이름에서도 끄집어낼 수 있다. 신라 땅에 발 들여 놓아야 하는 백제 사신들은 앞서 수승대에 꼭 들러 마음을 다스렸다 한다. 보내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근심 수(愁)' '보낼 송(送)'을 따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물론 훗날 1543년 유람차 들렀던 퇴계 이황 선생이 그 연유를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소리가 비슷한 '수승대(搜勝臺)'로 바꿀 것을 권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거열산성군립공원에서도 거창이 백제·신라 땅을 오갔다는 사실을 찾게 된다. 건계정주차장에서 건흥산을 40~50분가량 오르면 563m 꼭대기 지점에 다다른다. 여기서 둘레 2.1㎞에 이르는 거열성(居烈城)을 마주하게 된다. 삼국시대 말 백제 혹은 신라에서 쌓았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다만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그 후예들이 거열성을 거점으로 부흥을 꾀했는데, 3년 후 이 땅은 다시 신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거열성 /박민국 기자 

거창은 이렇듯 삼국시대 지리적으로 주목받는 곳이었고, 고려시대 합천 해인사 영향까지 더해져 불교문화도 꽃피웠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상림리 석조보살입상·농산리 석조여래입상·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심우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렇게 불상 5개가 국가지정 보물이라는 사실은 내세울 만하다.

거창에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 문화가 발달해 있다. 누각이 6개, 정자가 119개다. 이는 거창이 빼어난 경관을 안고 있었고, 힘 있는 집성촌이 많았으며, 누정을 관리할 경제적 여력이 있었다는 것을 달리 말해준다. 특히 거창신씨(居昌愼氏) 문중은 누정 10개를 세우고 보살펴, 이 지역에서 '거창신씨 거창신씨'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또 한편으로 수승대에 있는 요수정(樂水亭)은 흔치 않게 정자 내부에 방이 있다. 이는 거창이 겨울엔 만만치 않은 산간지역 기후임을 떠올리게 한다.

요수정 /박민국 기자

여러 선비를 배출한 안의현(安義縣)은 이후 안의군으로 되었다가 1913년 거창군·함양군에 나뉘어 편입됐다. 일제가 굳이 안의지역을 찢어놓은 것은 이곳 사람 기개를 표현한 '함양 사람 열이 안의 송장 하나 못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정유재란(1597년) 때 안의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혼내줬다는 점도 뒷받침된다. 어떤 이는 "지금도 안의 사람들 동창회 하면 그 지역 사람 전부 다 오는 듯하다.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오늘날 거창 북상면·위천면·마리면은 안의 지역에 속했던 곳이다. 거창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인물인 정온(1569~1641) 선생 종택이 위천면에 자리하고 있다. 함양이 자랑하는 정여창(1450~1504) 선생에 대해 거창 사람들은 '함양 사람이 아니라 안의 사람'이라며 이곳과의 연결고리를 잇는다. 하지만 무신란(1728) 때 안의 사람이던 정희량(鄭希亮·?~1728)이 가담했다 실패하면서 안의뿐만 아니라 거창도 나라 눈 밖에 났다한다. 이 지역 선비들이 큰일 할 길도 함께 막혔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 역사적 인물을 들춰보고자 하면 심심하기는 하다.

거창읍 가지리 쪽에는 그 의미와 달리 외면받고 있는 사당이 있다. 1862년 거창민란을 주도한 송재 이승모를 모신 '인민사(仁民祠)'다. 1932년 지역민이 나서 양반도 아닌 평민 사당을 세웠다. 1980년대 도올 김용옥 선생이 농활 학생을 이끌고 거창을 찾았다가 인민사를 보고 '평민 사당은 이례적'이라며 아주 놀라워했다고 한다. 현대사에서 거창 농민·사회운동은 유별난 면이 있는데, 그 출발점을 여기서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한때 지역 뜻있는 이들이 인민사에서 추모제를 올리기도 했지만, 다시 발걸음은 끊겨 지금은 폐허로 내버려져 있다.

침류정 /박민국 기자

거창의 현재 모습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도시와 시골이 함께 보인다. 군 단위이니 시골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웬만한 도시에 밀리지 않을 법한 읍 중심가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이곳 사람들은 "유명 메이커 중에서 안 들어온 게 없다"고도 한다. 특히 수두룩한 입시학원은 '교육 거창'의 한 단면을 보게 한다. 들리기로는 '아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외지에서 엄마만 아이와 함께 들어온 이들이 많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이름 알려진 거창고등학교 외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는 '거창고 애들도 못 푸는 문제를 내가 어떻게 풀어'라고 내뱉기도 한단다.

읍내 거창박물관에는 1864년 판 재간본인 대동여지도가 전시돼 있다. 밀양 박씨 문중에서 보존하다 기증한 덕인데, 이런 소중한 것을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할 일이다.

읍내를 벗어나 아래쪽으로 눈 돌리면 신원면이 들어온다. 거창 사람들 머릿속 한 곳에는 여전히 '거창 사건'이 자리한다. 특히 많은 노인은 봉인했던 눈·귀·입을 계속 풀지 못하고 있다. 신원면 거창사건추모공원 한 묘비에 새겨진 글귀 하나를 옮겨본다.

'아버지! 정말 불러 보고 싶었던 말입니다. 소자와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육십오 일을 함께 살았다고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불효자는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생전 말씀하시더군요. 너거 아버지 얼굴 볼라카면 명겅놓코 네 얼굴 보라고요. 아버지! 소자가 정말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그렇게 비명에 아버지를 먼길 보내시고 천 구백 구십 구년 이월 삼일 어머니께서도 먼저 가신 아버지 길 따라 가셨는데 혹시 얼굴 알아 보시고 만나셨는지요. 만나셨다면 근심 걱정 없는 영원한 안식처인 그 먼 곳에서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영원히 영원히 누리소서. 갓난아이가 오십대 중반을 바라보며. 소자 성제 통곡으로 씀'.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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