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배우 아누크 에메(Anouk Aimee)가 주연으로 나온 60년대 영화 <남과 여>를 국내개봉 때 본 어느 여고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 저렇게 나이 들고 이상하게 생긴 여자가 로맨스 영화 주연이라니!” 아누크 에메는 얼굴선이 굵고 이지적이어서, 청초한 아름다움을 최고로 치는 동양인에게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 여고생은 세월이 흘러 중년부인이 됐을 때 다시 그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 나이 든 여자 주인공이 저렇게 예쁠 수 있다니!” 화면 속 주인공은 그대로인데, 세월을 품에 안은 여고생은 그렇게 변해간 것 같다. 70년대 말 어느 해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다.

60~70년대 학창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포크가수 존 바에즈(Joan Baez)를 기억할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The River In The Pines>인데, 목소리가 청승맞아 노래만 나오면 몸서리를 친 기억이 새롭다. 당시 친구들은 이 곡과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The Saddest Thing>을 ‘제 정신으론 도저히 듣지 못할’기피 1호곡으로 꼽곤 했다. 흡사 산발한 처녀귀신이 원한을 호소하는 듯한 음색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수용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았나 싶다.

손사래 치던 청승, 이제는 애잔함으로

마우스를 재즈 쪽으로 클릭하면 개성 있는 외모에다 독특한 음색을 지닌 니나 시몬(Nina Simone)이 나온다. 존 바에즈와는 다른 류의 청승을 자랑(?)하는 사람인데, 이 목소리는 익숙하지 않으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다. 국내에는 ‘전문 여성킬러’ 원조영화 <니키타(Nikita)>에서 주인공 니키타가 늘 흥얼거리며 좋아하는 가수로 등장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왜 저렇게 상처받은 영혼이 좋아하는 음악이 하필이면 니나 시몬일까?”하며 못마땅해 했던 적이 있다. 감독 뤽 베송의 솜씨나, 영화 전체를 뒤덮는 푸른 색조가 청승스런 음색과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세월이 흘러 다시 들어보니 그 귀신같고 청승맞던 음색이 어느새 ‘고달픈 삶을 품는’ 애잔함으로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가슴 가득 답답함이 차오르던 시절 우연히 들른 레코드 가게에서 산 니나 시몬은 절망, 희망, 애욕과 같은 감정들을 내 가슴에 들이붓는 듯 했다. 흡사 아누크 에메를 재발견한 중년부인처럼 나는 그렇게 다시 존 바에즈와 니나 시몬의 청승을 사랑하게 됐다. 산천은 의구한데 그 때 인걸은 어디 가고, 지금 서 있는 인걸은 또 누구인지 참 헷갈린다.

찰스 밍거스.

재즈 기악은 어떨까? 강렬한 비트를 자랑하는 록음악에 경도돼 있던 젊은 시절 지인들이 들려준 재즈는 한마디로 상종 못할 음악이었다.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심장을 두드리는 박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브러쉬를 사용한 드럼 연주는 질색이었다. 오죽했으면 연주용 브러쉬를 빗자루라고 비아냥댔을까. 아마 요즘 젊은이들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 괴성과 굉음으로 이뤄진 메탈음악을 신주받들 듯이 하고 있지 않은가?

전형적인 재즈풍 스탠더드 곡 중에 <Stella By Starlight>가 있다. 멜로디가 귀에 익는 데만 몇 년이 걸렸을 정도다. 물론 의식적으로 멜로디를 귀에 담으려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수많은 연주자들이 다들 제 멋대로(?) 주제를 찢어놓는 바람에 당최 ‘똥인지 된장인지’ 몰랐던 이유가 더 크다.

세월이 흘러도 한참 흐른 어느 날 밤 다시 접한 <Stella By Starlight>는 가슴을 저미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뭐랄까! 스산함이랄까? 중년의 고독과 삶의 무게? 뭐 이런 것들이 촉촉이 배어있는 듯 했다.

명작 <Mood Indigo>는 또 어떤가? 주제는 정말 단순하다. 몇 가지 계명을 연결해 놓았을 뿐이다. 주제부 첫 소절은 약간 늘어지는 레 도(#) 레 레, 파 도(#) 레. 처음엔 “뭘 이런 걸 명곡이라고?”했다. ‘우리 음악이 재즈입네’ 하는 시덥잖은 작자들이 미국산 흑인음악을 확대재생산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테가 쌓이자 그런 의심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단순함 속에 깃든 유장함이 지친 삶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나아가 세상 티끌을 모두 감싸안는 듯한 주제가 각기 개성을 띤 수백 가지 형태로 변주되는 걸 보면 “아! 이런게 명곡이구나!” 하는 감동을 떨치지 못한다.

<Mood Indigo>같은 명작들은 기교로 구축된 다른 ‘콩나물 대가리’들을 한방에 거꾸러뜨린다. 지미 스미스(Jimmy Smith)는 이를 명징한 오르갠 소리로 표현했다. 개인적으로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밴드가 연주한 걸 가장 좋아한다. 브라스가 화음을 이루는 도입부분이 한마디로 기똥차다.

촌스럽지 않은 옛 것, 늘 새로움을 담는다

나이가 들어 아무리 다시 청승을 사랑하게 됐다 하더라도, 어쩌다 한번이면 모를까 줄곧 존 바에즈를 듣긴 어렵다. 그리고 가끔씩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을 통해 록 비트를 되새김질 해도, 지금은 그들이 남긴 영광이 옛날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대신 재즈기악은 중년부인이 뒤늦게 깨달은 ‘아름다움’에다, 때와 장소에 따라 질감을 바꾸는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동시에 지닌 음악인지라 좀체 물리지 않는다. 빈 공간이 많아 어슬퍼 보이는 가락이 사실은 ‘연륜 깊은 인생’과 동의어가 된다. ‘주제를 찢어놓는 다양성’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연상시킨다.

재즈 연주는 기본적으로 팝 음악처럼 멜로디가 뚜렷한 어떤 곡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제나 멜로디가 단번에 가슴에 꽂히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곡이 다른 아티스트들에 의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나 변주되는 과정을 더듬다 보면, 그 이력이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마치 영욕을 넘나들며 세월을 삼킨 한 인간이 드디어 자신을 돌아보게 됐을 때처럼.

다른 장르도 엇비슷하겠지만, 재즈의 속성을 한자말로 옮기자면 딱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될 듯 싶다. 옛 것을 토대로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옛 것이 결코 촌스럽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단지 내 마음이 그랬을 뿐! 여기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들먹이면 너무 오버한 것일까?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