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하고 여유로웠던 통영…일찍 스며든 근대문화에 상상력이 더해져

통영 뭍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뱃길은 어디를 향하든 다채롭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머리를 불쑥 내민 섬들이 빚어낸 풍경 덕이다.

'한려수도(閑麗水道)'·'다도해(多島海)'처럼 건조한 말은 이런 오밀조밀한 눈맛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어머니가 큰솥 끓는 물에 수제비 반죽을 툭툭 던져놓은 것 같다'는 이곳 사람들 비유가 더 정겹고 소박하게 그 매력을 드러낸다.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32㎞ 남짓 떨어진 '욕지도(欲知島)'. 욕지면사무소를 끼고 조금만 뒤로 돌아가면 나오는 밭 사이에서 '욕지도 패총' 안내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이 조개무지를 비롯해 욕지도 주변 사람이 사는 섬에서 나온 선사시대 흔적을 학계에서는 기원전 6600년 언저리 것으로 추정한다. 배를 곯지 않는 게 무엇보다 앞선 과제였을 옛사람들에게 섬은 이미 넉넉한 터전을 내주었다.

통영 사람 대부분은 제 고장 이야기를 400여 년 전 들어선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부터 풀어내려 한다. 물론 '통영(統營)'이라는 땅 이름부터 지역에 남아 있는 유·무형 자산 대부분은 통제영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통영을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땅과 바다가 지닌 원초적인 매력이 통제영이 드리우는 큰 그늘에 덮이지 않기를 바란다. 뭍에서부터 멀리 섬까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통영은 풍요로운 자연이 늘 넉넉한 삶을 거들었던 곳이다.

더없이 빼어난 풍경·음식·문화를 간추리기만 해도 빠듯한 통영과 만남을 굳이 욕지도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 풍요로운 바다가 만든 기질

통영 농업은 딱히 내세울 게 없다. 큰 강을 끼지 않은 통영은 그럴듯한 넓은 땅을 품지 못했다. 이곳 대부분이 섬이며 산지라 논농사는 더욱 부진하다. 통영 사람들이 여기 쌀을 자랑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고성 쌀이라고 보면 된다. 그나마 욕지도에서 생산하는 고구마 정도가 특산품으로 꼽힐 정도다. 한때 온난한 기후 조건을 이용해 난대·열대성 과일을 키우기도 했지만, 농산물 개방 정책으로 소득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땅에서 나는 작물이 넉넉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통영 사람은 없다.

예부터 통영은 풍부한 수산물로 유명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은 낚시를 드리우거나 그물을 던질 줄만 알아도 배를 곯는 일은 없었다. 욕지도에서는 예전에 욕지항 주변에서 멸치를 그냥 주웠다는 주민도 만날 수 있다. 포식자에게 쫓기던 멸치떼가 욕지항을 끼고 돌면서 원심력을 버티지 못해 땅으로 튕겨 나왔다고 한다.

통영 사람에게 늘 풍요로운 바다는 일본인에게도 탐나는 대상이었다. 1900년대 들어 일본인은 아예 통영에 터를 정하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그런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오카야마무라(岡山村·도남동 남포마을)'와 '히로시마무라(廣島村·보디섬)'가 유명했다. 도남동 남포마을에는 아직도 일본식으로 지은 집이 상당수 남아 있다.

통영 매물도에서 만난 흐뭇한 풍경./박민국 기자

새로운 어획 기술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통영 바다를 휘저었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쓸어담은 수자원을 마산항을 통해 중국에 팔아 큰 수익을 거뒀다. 근대에 등장한 이른바 기업식 어획이었다. 그때까지 재래식 고기잡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통영 사람들은 어깨너머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기계식 장비를 쓰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생존만 보장받으면 됐던 이곳 사람들은 점점 부(富)를 얻는 방법을 알게 된다.

척박했던 일제강점기, 통영 사람 상당수는 오히려 부유했다. 자녀를 서울 또는 일본 동경에서 공부시키는 집도 드물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기질을 말할 때 '화끈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술값 계산할 때 미적거리지 않는다는 예를 종종 드는데, 이 역시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시절 밴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기질은 통영 선술집을 대표하는 '다찌' 상차림에서도 살짝 드러난다.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안주가 널린 이곳에서 구태여 음식마다 값을 매기며 셈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안주값을 포함한 술값만 병 수대로 계산하는 게 성질에 맞았을 테다.

통영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어부였다. 땅을 빌려 삶을 이어야 했던 가난한 농부는 땅을 내준 사람 눈치 보는 일도 농사만큼 버거웠다. 하지만, 바다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도 한 살림 꾸리기 어렵지 않았다. 가난한 어부라도 가난한 농부보다 삶은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삶에 더해진 부는 자신감마저 안겼다. 웬만해서는 남들 앞에서 고개 숙이거나 기죽을 일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억세다는 통영 사람 기질은 그렇게 다듬어진 것으로 보인다.

- 충무공이 선택한 통영, 통영이 받드는 충무공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은 통영시로 통합되며 지금 모습을 갖춘다. 여기서 충무시는 이순신(1545~1598) 호 '충무공'에서 따온 이름이다. 통영 역시 '통제영'에서 나왔다. 조선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이다. 통영시는 지명만 놓고 보면 이순신 그 자체다. 전국에 이순신과 작은 인연이라도 엮어서 드러내고자 애쓰는 지역은 허다하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만 해도 30곳이 넘는다. 그런 사연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통영과 이순신은 각별하다. 이는 단순히 지명에 이순신을 담아서가 아니다. 통영은 조선 최초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경상·전라·충청 3남 바다를 통틀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이다. 이순신과 묶이고 싶은 땅이 아니라 이순신이 선택한 땅인 셈이다. 그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이순신 관련 유적으로는 충렬사(명정동)·제승당(한산도)·착량묘(당동)·이순신공원(정량동)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제승당과 충렬사는 통영을 찾는 바깥사람들이 한 번쯤 들러 옷깃을 여미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보다 덜 알려진 착량묘에 담긴 의미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

착량묘는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 이듬해인 1599년 수군과 백성이 뜻을 모아 초가를 짓고 위패를 모신 곳이다. 훗날 선조가 7대 통제사 이운룡에게 충렬사를 짓게 한 게 1606년이니, 착량묘에는 큰 어른을 잃은 슬픔과 조정에 대한 섭섭함이 함께 배었음직하다. 초가였던 착량묘는 1877년 198대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고쳤다. 통영에서는 해마다 이순신이 숨진 음력 11월 19일, 기신제(忌辰祭)를 착량묘에서 지낸다. 400여 년 전 백성이 품었던 마음을 소중하게 이어가는 셈이다.

   
 

- 통영 문화의 자양분 통제영

삼도수군통제영은 1593년 이순신이 한산도에 꾸린 진영을 시초로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이 한산진영은 1597년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조선수군이 모두 태운다. 왜적에게 물자·정보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후 통제영은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등으로 옮겨지다가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문화동 일대)에 터를 정하게 된다. 통제영이 진영 개념을 넘어 군사도시 형태를 갖추게 된 게 이때부터다. 이후 고종(1852~1919) 때인 1895년 통제영이 닫기까지 300년 남짓 통영 문화는 만개한다. 통영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통영 르네상스'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 근거는 먼저 세병관(문화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세병관은 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만들면서 세운 객사(客舍)이다.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9칸, 측면 5칸 단층 건물이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남아있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로 꼽는다.

통제영이 주최하는 큰 행사는 대부분 세병관에서 열렸다. 규모나 기능으로 봤을 때 오늘날로 치면 대형 강당을 떠올리면 되겠다. 임금에게 올리는 예, 제사, 군사 보고, 연회 등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격식이 따랐다. 그런 격식은 자연스럽게 한양에서 누리던 고급문화를 통영에 이식했다.

통제영 행사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군점(軍點)'이다. 군점은 통제사가 담당한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을 총집결해 군선·군사·군물 등을 점검하는 행사로 봄·가을 두 차례 열렸다. 삼도수군이 한 자리에 도열하는 장면은 다른 지역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볼거리였다.

말과 멋, 음식과 놀이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1년에 두 번 통제영에서 뒤섞였다. 통제영, 특히 연회가 열렸던 세병관은 통제사가 누렸던 한양 문화와 경상·전라·충청 문화, 그리고 통영 문화를 뒤섞는 문화적 용광로 구실까지 했다. 그 시절 다른 지역은 물론 한양조차 누리기 어려웠던 문화적 축복이 통영에 쏟아진 셈이다. 300년 남짓 이어온 이 전통은 통영 문화를 키운 저력이 됐다.

통영에서는 해마다 '통영한산대첩축제'를 며칠씩 연다. 올해 51회째인 이 축제는 임진왜란 최고 승전을 자축하는 행사다. 이 행사를 구성하는 프로그램 상당수는 통제영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물론 군점 재현 역시 축제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통제영이 들어오면서 통영은 군사도시 모습을 갖췄다. 군사도시 모습을 갖췄다는 것은 장군과 병졸들이 눌러 살기만 했다는 게 아니다. 통제영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시설까지 모두 갖췄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통영은 군사적 요충지기는 했지만 한양에서 보자면 남쪽 끝 변방이었다. 필요한 물자는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군사물자 생산에는 최정예 기술자들이 투입됐다. 삼도수군통제사는 한양에서 손재주 좋은 기술자와 함께 통제영으로 부임했다. 이들 기술자가 통제영 12공방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솜씨 좋은 물자가 오늘날 통영이 자랑하는 문화적 자산이 됐다. 통영갓, 통영자개, 통영소목, 통영장석, 통영소반, 통영부채, 통영꽃신, 통영놋그릇 등 기어이 앞에 '통영'을 붙이는 수공품은 나라에서 최상품으로 쳤다. 고장 이름 통영은 명품 브랜드이기도 했던 셈이다.

현재 기록에 남은 공방은 12개를 웃돈다. 여기서 '12'는 공방 숫자라기보다 '많다'·'완전하다'로 읽는 게 맞을 듯하다. 세병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통영시향토역사관'에서는 12공방이 남긴 유산을 실물로 볼 수 있다.

통영시는 지난 2000년부터 통제영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통제영 내 30여 동에 이르는 주요 관아를 복원할 계획이다. 외롭게 통제영 영광을 증명했던 세병관이 통제영 복원과 더불어 더욱 늠름해지겠다.

- 문화·예술인을 낳은 통영 유전자

모든 풍요로움을 허락한 바다였지만 성이 날 때는 한없이 무섭고 거칠었다. 통영 사람들은 바다가 베푸는 은혜를 누리기도 했지만 거친 바다를 달랠 줄도 알아야 했다. 거대한 자연을 달래는 일은 사람이 다룰 영역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더 큰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지역들이 대부분 그렇듯 통영도 무속이 발달했다. 마을 평안과 장수, 풍어를 기원하는 '남해안 별신굿'은 그런 바닷사람 마음이 남긴 유산이다. 통영 별신굿은 무당이 부르는 노래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반주 악기에는 북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동해안 별신굿보다 오락성은 적지만 그 덕에 진지함은 더하다.

통영 대표 미술가, 고 전혁림 화백의 작품을 모아둔 전혁림 미술관. 사진은 아들 전영근 화백 작품이 전시된 전혁림 미술관 3층. /박민국 기자

이곳 사람들도 통제영이 남긴 고급문화를 말하다가 예부터 이어진 서민문화를 지나치는 일이 잦다. 하지만, 별신굿에 담긴 서민들 정서와 흥은 통영 문화를 이룬 또 다른 자산이다. 이를 먼저 짚어야 통영에서 나고 자란 유명한 문화·예술인에게 흐르는 발랄한 감성을 설명할 수 있겠다.

통영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빼어난 문화·예술인을 배출했다. 아무리 추려내도 공예가 김봉룡(1902~1994),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 칠예가 김성수(1935~), 시인 김춘수(1922~2004)·유치환(1908~1967), 화가 전혁림(1916~2010)·이한우(1928)·김형근(1930~), 조각가 심문섭(1943~), 극작가 유치진(1905~1974)·주평(1929~),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소설가 박경리(1926~2008)까지는 나와야 한다. 모두 이 나라 근·현대 문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이들이다.

빼어난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에 뿌리를 둔 까닭은 먼저 이곳 사람들 기질에서 찾는 게 마땅하다. 통영 바다는 넉넉한 살림과 함께 호방한 기개와 권위 앞에 떨지 않아도 되는 자유까지 안겼다. 이런 기질은 통영 출신 문화·예술인에게만 허락된 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 전반에 흐르는 감성이다.

통제영 300년이 뿌린 고급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한양·경상·전라·충청이 어우러진 문화적 자산은 다시 이곳 서민문화와 섞였다. 서민문화는 고급문화에 흥을 보탰고, 고급문화는 서민문화에 격을 더했다. 서로 떠받치고 북돋우며 가꾼 문화적 감성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이 나라 서민 살림 대부분이 척박했던 일제강점기, 통영 사람들에게만 허락됐던 넉넉한 살림도 문화·예술인 배출에 힘을 보탰다. 먹고사는 고민을 덜었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상관없는 일을 상상할 여유가 있었다. 경성·동경 유학생이 유난히 많았던 이유도 이곳 사람들이 누린 부에서 비롯한다.

근대 문화 이식이 유난히 빨랐던 것 역시 이 지역 문화·예술인이 누린 복이다. 군사적 요충지는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중요한 곳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곳이라면, 상대는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어느 지역보다 이른 일제 유입은 통영에 신문물을 더 빨리 접하게 했다.

일제강점기 통영시내에는 이미 서양악기를 취급하는 악기사가 있었고 이를 곧잘 연주하는 인텔리도 많았다. 어린 윤이상과 벗들은 짬이 날 때면 집에서 현악 4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1930년대 생긴 '삼광영화회사'가 영화 〈화륜〉을 제작한 곳도 통영이다.

통영을 '예향'으로 부르는 이유가 빼어난 문화·예술인 몇몇을 배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곳 사람들은 섭섭하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순수 한글로 된 시조 동인지를 내고, 1950년대 재경 대학생들이 모여 잡지를 찍고, 1970년대 고등학생들이 동호회를 만들어 연극을 올리며 전국에 내로라하는 문학·예술인을 불러 강의를 들었던 곳 역시 통영이다.

흔히들 통영에 흐르는 문화·예술적 감수성은 미륵산에서 강구안 바다를 거쳐 섬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풍광에서 나온다고 정리한다. 그래서 '통영 앞바다를 보고 키운 감수성' 같은 수식을 감상적으로 붙이곤 한다. 하지만, 통영이 수백 년을 거쳐 다진 문화·예술 자산을 고려한다면 빼어난 이곳 풍광은 덤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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