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야기가 있는 맛집-우리집

피플파워 4월호 ‘이야기가 있는 맛집’은 ‘우리 집’이다. 맛있다고 소문 듣고 찾아가 사먹는 ‘식당 밥’ 이야기가 아니다. 4월 어느 일요일 우리 집 밥상 위에 올라올 봄나물이야기이다.

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쑥, 냉이, 두릅은 굳이 산과 들을 찾아 캐러 가지 않아도 가까운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할 수 있다. 쉬는 날 중 하루는 겨울을 뚫고 지나온 ‘에나로 기운 찬 것들’로 몸을 보하자는 은근슬쩍 귀띔이다.

봄밤엔 온 천지 물오르고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야단법석이다. 그런 다음날 새벽시장에 가면 가게들이 문 열기 전, 가까운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들이 잔뜩 풀어놓은 보따리에서 온갖 봄나물을 만날 수 있다. 아이 손바닥처럼 새파랗게 차오른 머위며, 통통하니 살 오른 두릅이며, 뽀얀 새털을 달고 병아리 부리만큼 자란 쑥이며, 뿌리수염을 달고 하얗게 반들거리는 달롱개(달래)며, 연둣빛 작은 꽃송이처럼 핀 돈나물(돌나물)…. 눈으로 보기만 해도 벌써 입 안이 환해지는 게 바로 봄나물들이다.

‘약쑥’이라 한 소쿠리에 만원

산청 단성장에서 만난 봄나물./권영란 기자

“아지매, 벌써 쑥이 나왔네예.”

“볕이 따신 데는, 가시나 젖몽울 나오삐드시 요렇게 나온다 아이가.”

돌아오는 첫마디에 푸핫, 웃고 말았다.

지난 달 10일 아침, 산청군 단성장에서 만난 아지매는 가지고 온 보따리로 돈을 사는 것보다 말동무가 생긴 게 더 좋은지 돌리는 발걸음을 자꾸만 붙든다.

“제일 먼저, 요때 나는 걸 ‘약쑥’이라고 한다 아이가.”

아지매는 첫물이라며, 한 소쿠리에 만원이라 했다.

물정 모르는 나는 순간, ‘윽, 비싸다’라는 생각부터 했다.

“없어가꼬 못 판다. 깎을 생각일랑 아예 허지도 말어.”

내 생각을 짐작이나 했듯이 딱 잘라 말하는 아지매.

몇 해 전 시골 들어가 살면서 난생처음 쑥을 캘 때, 쑥 한 소쿠리 캐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때서야 알았다. 두어 시간 캐도 소쿠리는 다 차지 않고 쪼그려 앉은 다리와 허리가 저려 절로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 그러고는 시장에서 쑥을 사게 되면 절대 깎거나 덤을 바라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 경칩 지나 첫물 '약쑥'은 어지간히 비쌌다.

쑥은 단군신화에도 나온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됐다고 하니, '기도빨'과 함께 ‘엄청난 풀’임에는 분명하다. 그만큼 기운을 돋워주거나 체질을 바꿀 만한 약성이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쑥, 봅등./권영란 기자

쑥찌짐과 어머니

‘첫물 약쑥’은 보통 쑥국으로 끓여먹는다. 어머니는 멸치로 다시를 내어 무를 숨벙숨벙 삐져넣고, 된장을 연하게 풀어 끓이다가 마지막에 쑥을 넣었다.

“오래 끓이면 쑥이 질겨지고 쑥향이 날아가니까 살짝쿵 끓여라.”

언제 해보겠냐 싶으면서도, 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시곤 했다.

“남들은 들깨가루를 넣어 먹기도 하는데, ‘첫물 약쑥’을 그리 먹는 건 아깝다. 들깨맛과 향에 쑥맛이 뭔지도 모르고로…. 이 귀한 걸 그리 먹으면 안 되지.”

어머니는 4월 들어 제법 자란 쑥들은 ‘쑥털털이(쑥버무리)’라 해서 밀가루나 쌀가루를 버무려 솥에 쪄 주셨다. 어른들은 그걸 좋아했지만 모양새 때문인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쑥찌짐을 해주셨다. 진달래 화전을 부치듯, 특별한 날엔 찹쌀과 멥쌀가루를 섞은 반죽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밀가루반죽에 소금 간을 약하게 한 뒤 기름을 살짝 둘러 부쳐주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 옆에 놓인 둘레상 주위에 옹기종기 붙어, 어머니가 갓 부친 것을 건네 올릴 때마다 제비새끼들처럼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쌉스레한 쑥맛이 고소한 기름맛에 묻어있었다. 어린 나에겐 쑥향이나 쑥맛보다는 입 안으로 퍼지는 기름의 고소한 맛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봄밥상./권영란 기자

새참으로 먹은 냉이라면

“야아야, 라면 끼리거든 이거 넣고 퍼뜩 불 꺼라이.”

몇 해전 시골살이 흉내 내며 살 때였다. 감자 씨 심는 날, 밭에 일하러 온 동네 아지매들이 새참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 했다. 밭가에 휴대용 가스렌지를 갖다가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봉지를 뜯고 있었다.

밭가에서 쉬는가 싶던 한 아지매가 웅크린 채 꼼지락거리더니, 잠시 후 냉이를 한 움큼 잔뜩 가져왔다. 뜨악해하는 나를 보던 아지매는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싶었나보다. 벌써 돌아서서 그 옆 흐르는 개울물에 설렁설렁 씻어, 뚜껑을 들썩거리며 끓는 냄비에 냉이를 북북 찢어 넣었다.

냉이라면./권영란 기자

라면과 냉이. 그렇게 궁합이 잘 맞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라면 스프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먹다보니 하도 감탄스러워, 냉이가 마치 라면에 있는 유해독소 성분을 다 해독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냉이의 향과 맛은 다른 것과 섞였을 때 배타적이거나 이질적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새참으로 먹은 ‘냉이라면’은 두고두고 나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언젠가는 한 TV방송에서 맛있는 라면 끓이기 서바이벌을 할 때, 왜 냉이라면은 안 나오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 봄 이후, 나는 봄에 라면을 끓일 때는 종종 냉이를 잘게 썰어 넣어 먹는 호사(?)를 누리곤 한다.

쑥은 4월 말 되면 웃자라 먹기에 힘들지만 냉이는 5월 말 하얀 꽃이 피기 전까지 봄 내내 먹을 수 있다.

먹을 때 입 안이 환해지는 기분을 안겨주는 냉이는 흔히 된장국으로, 나물무침으로 많이 먹는다. 특별한 조리과정 없이 더 간편하게 먹는 법도 있다. 나는 냉이도 회로 먹었다. 끓는 물에 굴려주듯이 데쳐서 매실액과 물, 식초를 섞어 만든 아주 묽은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거다.(나는 직접 만든 2년 숙성 매실액과 3년이상 숙성 감식초를 사용했다.)

‘막걸리 한 잔에 두릅회’

김동리 소설 ‘역마’에는 유독 ‘막걸리 한 잔에 두릅회’가 많이 나온다. 그 말에 술렁 빠진 듯, 시골살이 몇 해 동안 봄만 되면 두릅 순이 언제 올라오나 기다려지던 때가 있었다. 쑥이며 냉이며 달래가 밥상 위를 여러 번 들락거려도, 두릅은 종내 무소식이었다. 그러다가 아궁이 옆 부지깽이 같은 두릅나무 가지 끝에서 새 순이 보이면 얼른 팍팍 차오르기를 또 기다렸다.

4월 청명 무렵 제법 먹을 만큼 자란 두릅 순. 그 해는 친구들을 불러 봄꽃놀이를 했었다. 가까운 시골장터 도가로 달려가서 막걸리를 말 통으로 받아오고, 고추장에 5년 숙성한 감식초를 풀어 설탕은 살짝만 넣어 초장을 만든다. 두릅은 날 것으로 먹을 만치 보드라운 것이지만, 끓는 물에 푸욱 담가서 바로 끄집어낸다. 두릅은 독성이 있어 날 것으로는 먹으면 탈이 생긴다.

달래, 머위, 민들레잎, 골담초./권영란 기자

막걸리 한 잔에 두릅 한 점 찍어먹고, 또 막걸리 한 잔에 두릅 한 점 찍어먹고…. 거기다 된장을 풀어 푹 삶은 돼지수육을 곁들여 먹으니 다들 노래도 나오고, 시고 나오고

“두릅을 먹어보긴 처음인데, 정말 기가 막히다.”

한 친구는 두릅 맛에 반해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먹었나 보다. 그렇게 먹고도 집으로 돌아갈 때 두릅 한 봉지를 싸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친구는 며칠 뒤에 고생깨나 했단다. 가져간 두릅으로 서너 차례 끼니때마다 두릅을 먹고는, 나중에는 설사병이 도졌다고 한다. 두릅의 독성이나 찬 성질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그 연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거나 집착하면 ‘개똥’보다도 못하다는 건 새겨볼 만하다.

돌나물./권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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