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시민운동과의 대화] 최갑순·김희경·문숙현

<피플파워>가 경남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치-시민운동-주민공동체에 이어 네 번째 마지막 주제는 바로 ‘여성 인권’입니다. 여성의 삶과 권리가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은 여성입니다. 최갑순 여성인권상담소 소장, 김희경 전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성인지예산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 문숙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를 만났습니다.

여성들이 놓여 있는 현실은 시민단체 이름에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여성단체’는 대부분 익숙해 하지만, ‘남성단체’를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최갑순(56) 소장이 이끄는 여성인권상담소(경남여성회 부설)는 이름만 들으면 뭔가 우아한 일을 비교적 한가롭게 하는 단체 같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막장’ 같은 데서 일하는 성매매여성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매일매일 ‘전투’를 치르는 단체입니다.

문숙현(45)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는 이 단체에 몸담기 전 약 10여 년 동안 경남여성장애인인권연대라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문 대표는 “여성장애인은 장애인사회 그 안에서도 차별받는 존재였다”고 전합니다.

문숙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장애인운동 역시 남성장애인이 주도하고 있더라. 여성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비록 느리고 작겠지만 세상을 바꿔보자 생각했다.” 지난 2002년, 경남여성장애인인권연대가 출범하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지난해 말로 임기가 끝난 김희경(51) 전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은 오랫동안 여성 성폭력·가정폭력 문제에 천착해온 시민운동가입니다. 김 전 소장은 “성폭력·가정폭력 문제 해결을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운동이 아닌 일종의 ‘복지 서비스’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이 있다”면서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게 너무나 많다. 현행 법만으로는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으며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 피해자가 잘 적응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역량 강화’ 프로그램 역시 더 많은 고민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

성매매여성, 여성장애인, 그리고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들. 이름만 들어도 이들의 삶이 어떨지, 대략적이나마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벌써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진 듯합니다만,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지난해 11월 창원에서 있었습니다. 성산구 중앙동에서 발생한 ‘노래방 도우미 살해사건’이 그것입니다.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하던 한 20대 여성이 모텔에서 살해당한 이 사건으로 성매매여성의 인권 문제가 새삼 부각되었습니다. 단란주점·노래방 등에 불법으로 도우미를 공급하는 이른바 ‘보도방’의 심각성이 도마 위에 올랐고, 관리감독 강화, 관련 법 개정 등이 근절 대안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당시 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던 최갑순 소장은 이외에도 성매매여성의 ‘자립기반’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최 소장은 “피해 여성은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자립기반이 취약한 현실에서 빚을 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업소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최갑순 여성인권상담소 소장.

당장이라도 막장을 뛰쳐나와, 일반 여성처럼 살고 싶어도 탈성매매여성을 위한 지원 대책·규모는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최 소장은 “의료·법률·취업 등을 위한 지원금 760만원(1인당)과 쉼터 같은 자활기관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 1년은 너무 부족한 수준”이라며 “정부와 지자체가 성매매여성 인권단체에 지원하는 운영비·구조비 역시 턱없이 모자라다”고 꼬집습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김희경 전 소장은 “2011년 바뀐 제도인데, 가정폭력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들어갈 경우 재산 규모가 3000만~4000만 원 이상인 사람은 생활비를 지원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라고 비판합니다.
즉, 재산이 있어도 남편과 공동명의로 되어 있거나 집에 묶여 있을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 폭력 때문에 집을 나오는데 통장 등을 꼼꼼히 챙겨 나오는 여성이 어디 있겠냐는 반문입니다. 김 전 소장은 “그래서 피해자 쉼터를 가보면 20명이 10명의 생활비로 살아야 하는 곳이 많다”고 전합니다.

그 자신이 1급 장애인인 문숙현 대표는 서른 살이 넘어서까지 모든 삶이 ‘정상’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높은 계단, 불편한 변기, 경사진 길 등 곳곳에 장벽이었습니다. 바깥에 편히 나갈 수도, 일을 할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성장애인단체를 만든 뒤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 대표는 “처음 단체가 생겼을 땐 경남도청 등 관공서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안했다. 뭔가 해주면 해주는 대로 하라는, 동정과 시혜의 시선이 느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자신이 겪은 고통은 고스란히 공적인 ‘투쟁 과제’가 되었습니다. 문 대표는 이중삼중의 어려움에 놓인 여성장애인들의 출산과 이동 권리를 위해 싸웠고 그 결과 출산지원금, 운전면허 취득 지원, 저상버스·휠체어택시 도입 등을 제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합니다. 전국적으로 250만 명, 경남지역에만 18만 명. 경남은 장애인 인구 규모에서 서울·경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원 제도나 편의시설 등은 아직 미흡한 현실입니다.

문 대표는 “장애인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오직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잘못된 생각”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저상버스만 해도 노인, 환자, 임산부 등 모든 교통약자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아닌가. 장애인 문제에 대한 도민들의 관심이 더 나은 경남의 '삶의 질'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1979년 부마항쟁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최갑순 소장은 1985년 경남여성회 창립의 주역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여성운동 슬로건 그대로, 최 소장은 직접 겪은 고통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에 나섰던 것입니다.

좌로부터 문숙현, 최갑순, 김희경.

여성단체들의 성매매 근절을 위한 투쟁의 결실은 지난 2004년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에 녹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이 있음에도 성매매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심지어 법의 무용론까지 제기합니다.

최 소장은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성매매 알선자나 구매자나 실형보다 벌금형을 받는 게 대부분인데 효과가 클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면서 “법 그 자체가 아니라 처벌 수위 등 집행이 문제다. 만약 성매매방지법이라도 없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라.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최 소장이 더욱 기막혀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보호’ 아래 성매매 산업이 번창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른바 ‘장자연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성매매에는 권력자들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단속하고 처벌해야 하는 법조계, 경찰, 정치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른 여성폭력인 가정폭력·성폭력은 대개 가해자가 비이성적이지만, 성매매 가해자는 대단히 지능적일 뿐만 아니라 돈도 있고 조직도 있고 또 권력도 있다. 이렇게 우리보다 힘이 센 자들과 상대해야 하는 현실이 솔직히 버겁다.”

가로등이 줄면 여성의 사회활동도 준다?

김희경 전 소장은 다른 무엇보다 ‘성인지 예산제도’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앞서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지원책이 비현실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성인지(性認知)’ 마인드의 부재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희경 전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

“성인지 예산이란 말 그대로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미리 고려해 예산의 편성, 심의, 집행, 결산 과정에서 남녀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북유럽 국가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2006년 국가재정법에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고 올해부터는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예산안 작성에 반영해야 한다. 대다수 공무원이 내용을 잘 모르고, 상당히 전문적이고 포괄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잘 될지 걱정이 크다.”

성인지 예산으로 남녀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도 해결한 노르웨이의 예를 보면 이 제도의 중요성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에서 지급하는 농업발전기금의 수혜자를 성별로 나눠 분석하니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정부는 이에 여성에 대한 지원을 늘리며 여성이 농촌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와 똑같이 심각했던 여성의 농촌 정착률 하락까지 개선돼, 5년여 만에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 전 소장은 “가로등 예산만 감소해도 여성의 귀가가 빨라져 직업선택과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면서 “예산과 국가정책에 성 구분, 생물학적·사회문화적 차이에 대한 고려가 없으면 결국 성 역할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갑순 소장은 사회 전반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합니다. 법의 보완, 감독과 처벌 강화 등도 중요하지만 남성 스스로 달라지고 사회 구조 자체가 개혁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결국 온 사회에 만연한 성과주의, 1등 제일주의, 서열주의가 낳은 폐해다. 여성과 성 접촉이 ‘잘 나가는 남성’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소중한 사회가 되어야 현실이 개선될 것이다.”

권리·사회참여 이전에 ‘생사’ 문제 다투는

억압받고 차별받는 여성은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주여성, 여성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등 여성운동은 ‘운동 안의 또 하나의 운동’으로 다양하게 조직되고 있습니다.

김희경 전 소장도 말했지만, 사실 여성운동 자체는 성장기를 지나 혼란기·전환기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정치권 진출 확대 등 외형적으로는 놀랄 만큼 성장한 듯하나, 내용적으로는 논란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 전 소장은 “공간은 열렸지만 여성운동 진영이 응집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만한 사람들을 키워내고 지원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았다”며 “여성이면 무조건 지지할 것인가, 어떤 여성을 지지하고 배제할 것인가, 박근혜는 어떻게 볼 것인가 등 이런 논의조차도 없이 (여성의 정치 진출이)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인권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은 사정이 좀 다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성매매여성,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현실이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듯이 이들은 ‘권리’나 ‘참여’ 이전에 ‘생사’의 문제를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인권을 위한 싸움은 비단 여성들만의 몫이 아닐 것입니다. 여성인권단체에서 일하는 남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 인권에 남성들이 무심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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