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발터를 아는가? 위대한 클래식 음악 지휘자인 그를 두고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은 “그의 모든 것들은 그가 스스로 갈고 다듬은 영혼의 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격찬했다. 발터는 또한 모차르트 곡을 연주할 때마다 “눈물이 날만큼,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를 늘 강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발터가 예사 음악가가 아님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고매하고 중후한 인격에다 음악에 감정을 이입하려 한 눈물겨운 노력까지. 비단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클래식 팬들에게 발터는 신처럼 떠받들어진다.

그런데 이 훌륭한 음악가가 이런 말을 남겼다. “재즈는 모욕적인 음악이다. 재즈를 들을 때면 마치 내가 타락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언사다. 아니 대가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사실 고결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지금이야 재즈가 어엿한 음악장르로 대접받지만, 초창기만 해도 재즈를 연주하던 사람들은 미국사회 밑바닥을 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류사회가 보기엔 쓰레기들이었고, 실제로도 전과자, 마약쟁이, 알콜 중독자가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재즈가 음악적으로 완성되다 보니 초기 개척자들이 거장으로 대접받는 것이지, 당시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재즈는 몸과 마음을 풀어헤치게 하는 관능적인(?) 음악이 아닌가?

Sonny_Rollins-1.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산 발터에겐 아마도 이런 현실이 재즈에 대한 편견을 갖게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이런 음악적 편견을 발터만 가지고 있었을까? 여성 선교사 클라라 하워드(Clara Howard·허길래)는 한국 땅에서 유치원 교육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 전통을 존중해 전통음악과 장구를 이용해 음악을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린이들에게 장구와 창을 가르치면 기생을 만든다고 해서 학부모들이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우석은 <굿바이 클래식>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지금 교회 음악에서 사용하는 클래식은 ‘자의 반 타의 반’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조선인들이 창과 장구를 천하게 여긴 것은 근대 클래식 음악인들이 재즈를 쳐다보던 시선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이야 창과 장구로 대표되는 국악을 우리 음악으로 인식하지만, 조선말에 그런 이야기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발터가 적극적으로 재즈를 모욕하고, 허길래가 소극적으로 조선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결과는? 잘 알다시피 한국사회에 넘쳐나는 유럽 클래식 음악이다. 넘쳐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클래식 종사자들이 음악패권을 쥐고 있다는 것, 둘째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클래식을 동경하고 지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가수’를 생각하면 얼핏 21세기 한국 음악시장 상황은 대중음악이 주도권을 쥐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음악지배자들이 보기엔 ‘가소로운’ 상황이다. 아무리 대중음악이 각광받는다 하더라도 이 음악은 그야말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인기영합’ 음악일 뿐이다. 철이 지나면 사라질 이런 음악 때문에 그들이 지키는 고매한 클래식이 흔들리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 왜? 근대 이후 우리 국민 가슴에 클래식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훌륭한 음악’이란 사실이 내면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노래방에서 설운도나 송대관을 부르더라도 아들·딸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레슨을 시킨다. 물론 요즘이야 대학에 실용음악과가 많이 생기고, 도시마다 실용음악학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자식에게 실용적인(?) 음악을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긴 하지만, 이 흐름이 부모들 내면까지 바꾼 건 아니다.

재즈는 본시 대중음악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교해지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예술성을 높여왔지만 본질은 대중음악이다. 실제로 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하는 영·미 팝은 재즈가 완성한 형식에 의존하는 바 크다. 지금은 애들까지 예사로 내뱉는 R&B도 재즈와 블루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지금도 그 위세를 잃지 않고 있다. 아니 장르 간 융합이 활발해지면서 재즈에 담긴 음악적 미학은 더 깊게 우리를 흔들고 있다. 가수 이승환의 음악을 들어보라! 반주에 깃든 그루브와 펑키가 퓨전재즈를 그대로 모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점에서 재즈는 장구한 세월동안 대중 민속 음악(folk music)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어법이 다른 서양음악에 밀려 고전하는 국악과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그렇다면, 재즈가 대중음악이란 말은 어떤 함의(含意)를 지닐까? 음악적으로 클래식과 소통하고 교통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음악적으로도 그렇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렇다. 전자는 딱딱한 형식과 엄숙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밑바닥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언제든 주류에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재즈인들은 발터의 모욕을 이렇게 되받아친다. “클래식은 온기를 모두 증발시킨 맹탕이다! 나는 차라리 타락했을지언정 자유가 숨 쉬는 재즈가 좋다!”

리 모건(Lee Morgan)의 트럼펫을 들어보자! 그 유명한 <sidewinder>는 꽉 찬 비트와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음률이 입에 익을라치면 초심자라도 팔다리가 저절로 움직인다. 키스 재릿(Keith Jarrett)과 게리 버튼(Gary Burton)의 앨범 <throb>은 익숙한 화성과 구조를 해체해 재구축한 독창적인 작품이다. 진부한 팝 멜로디에 싫증 난 사람들이라면 말 그대로 '가슴 뛰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Lee_Morgan.

재즈에는 주류에 대한 경건함이 없다. 물론 화석화된 하위장르가 있고, 주류를 모방하는 아티스트가 존재하긴 하나-이는 한국사회에서 특히 심하다-이것이 재즈가 지닌 본질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똥폼을 잡는다고 해도 재즈가 걸어온 자유분방한 발자취를 없앨 순 없기 때문이다.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의 명작 <St Thomas>-개인적으로는 쿼텟 편성이 아니라 트리오 편성을 더 좋아한다. 트리오 편성은 앨범 <Tenor Titan>에 들어 있다.-는 발표당시 전대미문의 색소폰 솔로라는 평을 받았다. 음률이, 비틀거리는 박자 속에서 뒷걸음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재즈에 어깨 힘 뺀 자유분방함만이 있는 건 아니다. 음악전통이 강한 유럽에서는 재즈가 클래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예술장르로 존재한다. 여기엔 실내악을 연상시키는 작품도 수두룩하다. 발터는 재즈를 잘못 이해했다. 쇼스타코비치가 재즈를 받아들인 건 재즈가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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