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향기가 있는 삶-고명천 선생

2월호부터 ‘향기가 있는 삶’을 연재한다. ‘향기가 있는 삶’은 담백하고 소박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신껏 사는 인생을 주인공으로 모시고자 한다. 물론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나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금상첨화다. ‘향기가 있는 삶’의 주인공이 꼭 멀리에 만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 스스로를 나타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여 이런 향기를 맡고 있는 독자가 계시거든 바로 연락을 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다.

1월 13일 오후 4시 30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 마산박물관 자료실에서 고명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인터뷰하는 두 시간 내내 ‘나’ 또는 ‘우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꼭 ‘저’ 또는 ‘저희’라고 했다.

1939년 태어난 선생은 1972년부터 30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가난한 이들, 어려운 이웃과 함께한 선생의 학교 밖 인생이 대상이다.

고명천 선생./김훤주 기자

“1957년 11월 3일 회원국민학교 부설 야간 공민학교를 시작했어요. 열여덟 열아홉 되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친구랑 함께했지요.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이나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은 세대여서 ‘브나로드’ (V narod. ‘민중 속으로’라는 뜻. 1870년대 러시아에서 일어난 계몽 운동으로 우리나라서는 일제 강점기 1930년대에 유행) 정신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못 간 아이는 남자애보다 여자애가 많았어요. 학교 둘레 회원동 500번지는 가난의 대명사였는데 식모(가정부), 공장이나 식당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들, ‘요꼬’라 했는데 편직·면직물 만드는 가내공장에서 여자애들이 왔지요. 가정에 있었어도 학교 못 간 아이들, 가난하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대체로 열 살 안팎이었는데 여자애들은 열대여섯 살도 있었지요. 많을 때는 네 학급까지 있었는데, 한 학급에 20~25명이 됐고요.”

“한글 깨우치기와 숫자 깨우치기와 셈본 공부를 주로 했습니다. 문맹퇴치운동이지요. 처음에는 아무 지원도 없었습니다. 1966년 입대할 때까지 계속했는데 2년이 지나 1959년이 되니 교육청에서 ‘회원국민학교 부설 공민학교’로 만들고 발령장과 함께 실비를 다달이 5000원씩 줬습니다. 교통비 정도 되는 셈입니다.

교육청 행정직으로 있던 여해종씨, 부산상고서 퇴직한 이재근씨, 정면호·안상식·남일랑씨 등이 함께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한 이들을 비롯해 일고여덟이 요일마다 교대로 와서 가르쳤습니다. 저는 날마다 갔고요.”

학교 밖 어려운 이들을 향해

고명천 선생./김훤주 기자

선생은 1966년 군대에 갔고 공민학교는 68년 문을 닫았다. 오던 아이들이 다 커서 나간 까닭도 있고 시절이 바뀜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줄어들고 교사 수급이 어려웠기 때문도 있다.

선생은 앞서 1960년 마산대학(지금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2학년이었다. 학보 취재부장도 하고 학년 대의원을 맡아 학생운동도 했다. 1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5·16 장학금은 거부했다. 군사독재에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마산동중과 마산상고를 나온 선생은 마산 토박이다. 마산합포구 동성동 국민은행 마산지점 근처에서 태어났다.

“1972년 4학년 때 함안여고에 취직이 됐고 이듬해 창신공고 야간으로 옮겼습니다. 1973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잘 될 때라 야간 학생이 많았지요. 1976년 의신여중으로 옮겼습니다. 1908년 창립한 창신학교와 1910년 창립한 의신학교는 마산을 대표하는 민족 사학입니다. 이 두 사학에 모두 근무했다는 것이 뿌듯하지요.”

마산가톨릭여성회관의 한울학교와는 1985년 1986년 인연이 됐다. 수출자유지역 등에서 일하는 근로청소년을 위한 시설이었다. 원래 가포 국군통합병원에 있었으나 가톨릭여성회관으로 옮겨오게 됐다.

“교장을 맡아 중학교 검정 과정을 했습니다. 2년제였고 해마다 두 차례 검정고시를 치게 했습니다. 의신여중에서 교무 주임을 하고 있었던 노하우를 살려 커리큘럼을 짜고 교사 수급 관리와 학생 상담을 해서 학교답게 체계를 잡았습니다.

후원금으로 운영했는데 집기나 분필 장만하는 수준이고 교사들 교통비도 못 줬지요. 저도 봉사 개념이었고요. 제가 맡기 전에는 이름이 ‘학교’가 아니라 ‘배움터’였고 체계화도 돼 있지 않았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한울학교가 할머니들한테 한글 가르쳐 주는 공간이 돼 있습니다만.

스물대여섯 살 난 남자 학생이 있었어요. 양복점에서 일했는데 인물이 잘생겼어요. 알고 보니 초등학교 여교사랑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온 그 여교사가 꼭 검정고시에 합격시켜 달라고 부탁했는데, 18개월 만에 합격해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었지요. 그러니까 최고급 와인을 한 병 선물로 들고 왔는데 인생에서 가장 멋지게 마신 와인이었습니다. 개인 양복점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지요.

한울학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삼성병원 레지던트 부부도 사천 용남고 교사도 있었고, 대학생은 더 많았고요. 고맙고 미안합니다. 자원봉사 개념조차 없던 시절인데도 열심히 했습니다. 시간 맞춰 오라 주문하고 검정고시 칠 때 되면 자기 과목 나와 보충 수업하도록 다그쳤습니다.”

선생은 교장·교감을 하지 않고 평생 평교사만 하려 했는데 재단에서 시키는 바람에 응시한 1987년 교감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1996년 교감이 됐고 1998년에는 교장을 맡았다.

“학생들에게 자유를 줬습니다. 처벌도 하지 않는 쪽으로 바꿨습니다. 복장도 머리카락도 자유스럽게 하도록 했지요. 그런데 4년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니까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어요. 제도에 대한 도전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름 마다치 않고 내민 손

고명천 선생./김훤주 기자

선생은 임기 4년을 마치고 2002년 정년퇴임을 한 다음 창신대 평생교육원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즈음 2003년 범숙학교에서 교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시 이름은 창원 여성의 집 쉼터였다. 범숙학교는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다.

“범숙학교에서 가르친 과목이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수업 과목으로 인정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퇴학생들도 복학시키고 해서요. 여기서는 거마비조로 한 달에 70만원을 받았고 4대보험 가입도 됐습니다. 가르치러 오는 봉사자들에게도 시간당 1만~1만5000원씩 줄 수 있었습니다. 교통비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덜 미안했습니다. 아이들 에너지를 좋은 쪽으로 바꾸도록 애를 썼습니다. 정관과 규약을 만들어 범숙학교 체계를 잡았습니다.”

2010년 범숙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내서주민자치위원회가 운영하는 다문화교실에서 연락이 왔다. 다문화교실의 특성상 국어 정규 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해 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선생은 한 달만인 그 해 3월 다문화교실 일을 시작했다.

“국어교육원에서 만든 교과서 1~6권을 구입해 교재로 썼어요. 월·금 두 차례 하던 수업을 월·수·금 세 차례로 늘리고 반을 둘로 나눠 시간표를 편성하고 담임제를 했지요. 전체 인원이 50명가량이면 출석은 20명 정도, 읽기·쓰기·말하기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체계를 잡아놓고 2011년 3월 그만뒀는데요, 함께하던 선생님 두 분이 지금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후회와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글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희생됐고 80년대 후반에는 많은 가난한 이웃과 청소년들이 한 달에 4만~5만 원 받고 일했습니다. 이들이 일으켜 세운 한국이 자본가들 배불려주는 결과를 낳았고 서민들은 지금도 가난합니다. 이런 면에서 교육이 이바지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행동하는 교육, 실용 교육, 인성 교육을 못했습니다. 이론 교육만 했습니다. 교육이나 사회에 기여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잘 된 사람이 있다면 교육이나 교사 덕분이 아니고 그 사람이 훌륭해서 그렇습니다.”

선생은 올해 3월까지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줬다. 곧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참이다. 선생은 지금 마산박물관 문화유산답사회 회장을 하고 있다. 인터뷰 하루 전인 12일에는 일본에서 되찾은 조선의궤를 전시하고 있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같은 방에 있던 송성안 마산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고명천 선생을 일러 “지역 문화에 대한 사랑이 크고 연세가 일흔이 넘었는데도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라고 했다.

고명천 선생은 가진 것이 별로 없다. 집 한 채가 전부다. 서른세 평짜리 아파트인데 그나마 융자가 수천만 원이라 한다. 연금으로 사는데 통장 잔고도 수백만 원에 그친다고 한다. 평생 살면서 복권 한 번 사지 않았다고 했을 때는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뿌린 것에서 나지 않은 열매를 내가 따먹어서는 안 되지요.”

선생의 이런 성향은 여행을 즐기는 데서 생겨났지 싶다. 요즘은 결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선생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소박한 자세가 선생의 여행관에 그대로 묻어 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를 선생이 발로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여행은 혼자 하면 혼자 하는 여행이 좋고 어울리면 어울리는 여행이 좋습니다. 풍경이 아름다워야 좋은 여행은 아닙니다. 대상과 내가 일치될 때 희열을 느낍니다. 나와 자연, 그리고 여행길이 일치될 때 그렇습니다. 목적지를 두는 여행보다는 가는 길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여행이 좋습니다. 길이 아름답지 않아도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 더 감동적이고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홀로일 때도, 더불어 갈 때도 늘 벅찬 여행

“저는 해질 무렵이 좋습니다. 저녁 무렵 석양을 보려고 마산에서 진주 가는 기차를 타고 군북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전깃불이 너무 많아 그런 느낌이 없지만, 옛날에는 황혼 무렵 멀리서부터 집집마다 불이 하나씩 들어오는 것이 생명이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그런 느낌을 줬습니다.”

여행을 즐기는 성품은 아무래도 타고났지 싶었다. 고등학교 때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한 적이 있는데 이때 제주도로 400~500t짜리 철선을 타고 가서 혈혈단신으로 한라산을 정복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른바 한라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사살됐다는 해였는데 백록담에서 군경들이 카빈총을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명천 선생./김훤주 기자

대학 때는 90cc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도 했다고 한다. 한계령에서, 그때는 당연히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었는데,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보니 뒤에 싣고 가던 쌀이랑 버너 같은 것들이 죄다 떨어져 쏟아지는 바람에 밥을 못해 먹기도 했다는 얘기를 했다. 걸어서 마산을 출발해 창녕과 청도를 지나 경주를 둘러본 다음 변산반도까지 갔던 적도 있단다.

선생은 정년퇴임 하고 나서 카니발 차량을 사들여 앞자리 두 개만 남기고 뒷자리는 평평하게 한 다음 전기장판을 깔아 두 사람이 잘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행을 위해서였다.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기는 선생은 지금도 주말여행은 부인과 함께한다. 선생은 부인 이름을 일러주지 않았다. 다만, 두 살 아래로 1969년 결혼해 1남 2녀를 뒀다고 했다.

선생은 여행과 더불어 술도 즐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술이 있으면 좋겠지요. 요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삼가고 있기는 하지만….” 선생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선생이 술을 못 마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술을 즐겨 마시는 줄을 아는 이도 있다고 했다. 이는 선생이 술을 즐기되 그에 걸맞게 절제도 잘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