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에도 그의 재징계 소식을 들은 동료공무원들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힘있는 자에겐 비굴하고, 약한 자에겐 권위적인 사람. 기본급은 적어보이지만 이런 저런 수당을 합치면 상당한 고소득인데다, 웬만한 비리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잘릴 염려도 없는 철밥통. 그럼에도 자기 돈 쓰는데 인색하고, 승급·승진과 자리보전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내놓는 군상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금방 알아챘을테지만, 바로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런 공무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공무원도 있다. 마산시 6급 임업직 공무원 임종만(49) 씨 이야기다.

내가 본 그는 한마디로 말해 '힘센 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따뜻한 사람'이다. 높은 사람 입장에서 공무원이 '힘센 자에게 강하다'는 것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걸 뜻한다.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깨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임종만 씨는 '공무원이 영혼을 가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기도 하다.

2년 전 그는 공무원노조 경남본부 부위원장으로 '인사협약 위반한 김태호 도지사 퇴진투쟁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등 지방공무원법상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직장이탈 금지, 집단행위 금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직(해임)됐다.

그러나 2년에 걸친 법정소송 끝에 부산고법은 지난해 12월 '해임처분 취소' 판결을 내렸고, 그는 지난 1월 마산시에 복직했다. 마산시가 그의 해직기간 주지 않았던 임금을 한꺼번에 지급한 것도 물론이었다. 이는 결국 경남도와 마산시가 잘못된 해임처분으로 공무원에게 일도 시키지 않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마산시는 임종만 씨와 시민에게 미안해 하기는커녕, 복직한 그에게 2개월이 넘도록 보직도 주지 않고 앉혀놓고 있더니, 덜컥 경남도에 재징계를 요구했고, 경남도인사위원회는 '정직 2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유는 2년 전 그를 해임할 때와 똑 같았다.

그에 대한 마산시의 재징계 요구가 논란을 빚고 있는 때 솔직히 나는 그가 그냥 조용히 있길 바랐다. 기자의 경험상 그가 반발한다고 해서 '영혼이 있을 리 없는 관료'들이 재징계 요구를 철회할 리도 없고, 오히려 괘씸죄만 추가할 것 같아서였다.

결국 '정직 2개월' 통보를 받은 지난 12일, 그를 만나러 가는 택시 안에서 박노해의 시에 고승하가 곡을 붙인 <고백>이라는 노동가요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날 더러 신세조졌다 한다 / 사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 // 사~람들아 사람들아 / 나는 신세 조진 것 없~네 / 노동자가 언제는 별 볼 일 있었나 / 찍혀봤자 별 볼 일 없네 (후략)'

지난 12일 정직 통보를 받고 그가 싼 짐. 서류봉투 하나와 가방이 전부였다.
그는 마산시장실 옆에 설치된 '행정구역개편TF' 사무실 안쪽의 창고 같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서류가방과 서류봉투 한 개씩이 전부였다.

"2년을 쉬게 한 것도 모자라서 다시 2개월 더 보너스를 주네요. 공무원이 노조를 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때를 보여주려는 거겠죠. 일도 하지 않고 봉급을 받아 시민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정직 기간에는 본봉과 수당을 합쳐 3분의 1이 봉급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04년 12월에도 '불법 노조활동'으로 감봉 처분을 받았다. 이번 정직 처분까지 합치면 2호봉이 깎이는 불이익을 받는단다. 이는 물론 앞으로 승급·승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승진에 목을 매는 공무원으로선 희망이 사라지는 치명적인 일이다.

"어차피 윗사람에게 잘 보여 덕 보고 싶은 건 없습니다. 불이익을 받더라도 떳떳이 사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 얼굴을 보다시피 전 굉장히 편안합니다. 승진에 욕심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런 일을 하지 않았겠죠. 다만 우리 (황철곤) 시장님도 이젠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런 악역을 맡아서 어떻게 하려는지…. 정말 남은 임기동안 잘 하시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그는 시장을 걱정했다. 공무원들이 승진에 목을 매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해석했다.

"주위 사람들과 가족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공무원 들어간 지 몇 년이 됐는데 아직 거기까지밖에 못갔느냐는 시선을 의식하는 거죠. 그 욕심이 과하면 동료나 부하직원을 짓밟고 가는 사람도 있죠. 흔히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 같아요. 특히 선배공무원들은 군사정부 때부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체질화해 있는 분들이죠. 그런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니까 영혼없는 공무원이라는 말을 듣는 겁니다. 그걸 탈피하고 시민의 눈치를 보는 공무원이 되자는 게 공무원노조 운동이죠."

그러나 공무원노조가 시민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그는 인정했다.

"공무원노조를 처음 할 때 우리 조합원들이 좀 들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떡값 같은 공직사회의 부조리한 관행을 타파하고 시민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노력도 하긴 했지만 미흡했어요. 초창기의 들떠 있는 기분에 우리의 처우나 권익에 치중하는 모습도 있었죠. 하지만 제일 안타까운 것은 공무원노조가 여러갈래로 찢어진 겁니다. 정권의 의도대로 된 거죠. 그래서 지금 공무원노조가 전혀 힘을 못쓰고 있는 게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노동운동가가 아니었다. 정치적 성향도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정치적 성향은 그냥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거제시 연초면 벽지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거제종고를 거쳐 천안에 있는 연암축산대학을 졸업하고 소 인공수정과 농사일을 하던 중 동기들보다 다소 늦은 1986년 임업직 9급으로 연초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면사무소 임업직은 일명 '산림순사'라고 불리는 '끗발' 있는 자리였다.

"그 때만 해도 어디 출장을 가면 상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것도 많았죠. 공무원이면 다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창원군을 거쳐 도농통합으로 마산시에 근무할 때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죠."

당시 토석채취 인·허가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당시 과장이 아무런 이유없이 결재를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그걸 안 줘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도 계속 결재를 해주지 않았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어느날 다시 결재를 받으러 들어갔더니 과장이 직접 어떤 사업장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설계는 업체가 하는 것인데, 그걸 승인해줄 공무원이 직접 설계를 해준다는 것은 대가를 받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과장에게 다시 결재서류를 내밀었더니 과장이 또다시 아무말 없이 반려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뜸 과장은 "이 호로새끼야!"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 아버지도 돌아가신 상황이어서 울컥했다. 과장의 멱살을 잡고 한 판 붙어버렸다. 이후 감사 결과 과장은 다른 지자체로 쫓겨갔다. 임종만 씨에겐 별 피해가 없었다.

그는 그 일이 공무원으로서 자세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이런 모습은 공무원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부터 민원인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마침 그 후 공무원직장협의회가 생겨 자연스럽게 대의원으로 참여하고 교육도 받으면서 공직사회를 바꿔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는 2기 직장협의회가 출범할 때 자기 발로 회장에게 찾아가 사무처장을 맡겨달라고 했다. 상근이 아니라 본연의 업무를 하면서 과외 시간에 사무처장일을 봤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재미가 있었다.

"그 때부터 임종만은 '강성'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바르지 못한 걸 바르게 가자는 게 강성입니까? 그렇다면 굴복하면서 가는 게 노조의 길입니까? '너무 세게 나가는 것 아니냐'고들 하는데, 조직에서 결정을 한 일은 그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실 저도 많이 자문을 해봤어요. 정말 내가 잘못하는 건가? 내가 너무 세게 나가는 건가? 그러나 정말 이건 잘못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 강성'을 택했고, 결국 2년동안 해직상태를 견뎌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2개월 정직을 받았다. 그는 정말 '강성'일까?

지난 2006년 7월 내가 시민사회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창원공단 내 한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다 다쳐 '식물인간'이 된 중국인노동자 장슈아이 돕기운동을 펼쳤는데, 어떤 공무원이 선뜻 50만 원의 적지 않은 돈을 입금했다. 이름을 확인해보니 임종만 씨였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남몰래 독거노인 두 명에게 매월 쌀 한 포대씩을 마산의 한 쌀가게를 통해 보내온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그가 해임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본 쌀가게 주인이 평소 쌀값을 입금해준 사람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제보했던 것이다. 또 그가 해임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장애아동 보육시설인 숲속자람터어린이집 교사들도 탄원서를 냈다. 그동안 임종만 씨에게 많은 후원을 받아왔던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유니세프에도 매달 적지 않은 후원금을 내고 있다.

그는 또한 2005년 마산 자산동 솔밭공원이 건설업자에게 매각돼 아파트로 개발될 상황에서 이를 사들여 시민휴식공간으로 조성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이 일로 마창환경운동연합으로부터 녹색환경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권력자들의 눈에 '강성'으로 보일진 몰라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에겐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는 해직상태였던 지난 2년간 뭘 했을까?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올해 석사학위를 받았죠."

사회의 구석진 곳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임 씨다운 전공이었다.

학위를 딴다고 해서 공무원으로서 승급이나 승진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야였다.

"퇴직 후에라도 사회복지 분야에서 뭔가 일을 해보고 싶었지요. 하지만 공무원으로 있는 동안에는 잘못된 일에 침묵하지 않고 제목소리를 내는,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될 겁니다."

그는 "공무원노조가 찢어져 힘을 못쓰는 게 안타까울뿐, 내 처지를 후회해본 적은 없다"면서 "이런 아버지와 남편을 이해해주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주는 아이들과 아내가 고맙다"고 말을 맺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고백>의 후렴구를 흥얼거렸다.

"친~구들아 너무 걱정 마라 /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가 // 노~동운동 하고 나서부터 / 참삶이 무엇인지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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