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명의 존엄성 '삶의 질' 에도 있다

법원이 지난 11월 28일 처음으로 존엄사(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존엄사 찬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경실련에서는 이번 판결을 두고 존엄사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고, 윤리·종교 단체에서는 생명경시 풍조가 조장될 우려가 있다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병원에는 사고나 치유 불가능한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들이 질병의 고통과 대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고통받으면서도 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물론, 인간의 생명이 존엄하다는 명제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 서부지방법원의 판결은 질적인 고양 없이 단순히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법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대한의사협의회는 "의사가 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로부터 충분한 동의를 얻는다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존엄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뇌사나 말기 암환자의 자기 생명 결정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길이인 수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아무리 길게 연장된다고 해도 삶의 질이 충족되지 못하면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생존 그 자체보다는 생존을 통해서 영위되는 자유로움이나 즐거움, 행복 등이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운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식 없이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으며 사는 삶이 가치 있고 존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긴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삶의 질도 중요하지만 인간 생명 자체의 존엄성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존엄사를 법제화하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장하게 되며 악용할 가능성도 크다고 주장한다. 가족이나 의사는 환자가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덕적이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한다. 환자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생명연장을 중단한다면 살인이나 다름이 없다고 여긴다.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소생할 가능성이 없고 생존율이 낮다는 이유로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김정범 대표는 "존엄사는 개념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실제에는 적극적인 안락사와 구별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며 "존엄사라는 멋있는 개념을 사용해서 생명을 경시하는 그런 풍조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인간 존중의 길이라면 존엄사는 명백히 살인이다. 그러나 인간이 한 인격체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인정한다면
   
 
 
존엄사를 신중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질을 고려하여서 한 인격체가 내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환자의 결정이 단순하게 고통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본능적인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이루겠다는 합리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면 존엄사를 존중해야 한다. 물론, 존엄사를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사례가 생기지 않도록 더욱더 확실한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승호(유레카 국어논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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